남다른 시련이 남다른 나를 만든다.
바이올린의 명품,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다른 바이올린에 비해 가격도 비싸지만 신비의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신비의 소리를 내는 이유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바이올린을 만드는 나무에 있다는 설이 유력한 걸로 알려져 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신비의 소리를 내는 원천은 바로 빙하기 때 자란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나무가 성장을 거의 멈추고 나목으로 버티면서 새 봄을 준비하는 휴면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무가 겨울에도 자란다는 점이다. 여름에 비해 비록 성장은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지만 겨울에도 모진 풍상과 추위를 나목으로 버티면서 봄의 희망을 잉태하는 것이다. 겨울도 아니고 빙하기라면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무는 자란다. 작은 성장이지만 의미심장한 성숙의 고통이 나무를 더욱 튼실하게 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나무의 성장은 나이테에 그대로 반영된다. 나무의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이유가 나이테 때문이다. 나이테는 나무의 나이뿐 아니라 성장 환경까지도 나타낸다. 나이테 간격이 넓은 것은 여름에 자란 흔적이고 나이테 간격이 좁은 것은 겨울에 자란 것이다. 나이테 간격이 좁다는 것은 그 만큼 나무가 자라는 동안 외부 환경이 녹녹지 않았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성장에 좋은 환경이었는지 힘든 환경이었는지 알수 있는 것이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눈보라도 나무는 나목으로 견딘다. 겨울 동안 나무는 외형적 성장보다는 내면적 성숙의 시간을 통해 새 봄과 함께 힘찬 출발을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다. 외형적으로 빠르게 성장한 나무는 나이테 간격이 넓은 대신 외부적 충격이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부러질 수 있다. 비록 빠르게 성장하지는 못해서 나이테 간격이 좁지만 시련과 역경을 견뎌냈기에 웬만한 충격과 압력에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 내성을 갖고 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신비의 소리를 내는 원동력은 바로 빙하기 때 거의 자랄 수 없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홀로 버티면서 참아낸 인고의 시간을 내면적으로 승화시킨 나무의 생존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탄탄대로를 아무런 시련과 역경 없이 자라는 사람은 작은 장애물과 걸림돌에도 쉽게 넘어지고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인생의 첩경을 통해 탄탄대로를 걷지 못했지만 고생하면서 고뇌의 족적을 많이 남긴 인생의 뒤안길에는 상처 뒤에 남은 흉터의 흔적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롱져 떠오른다. 걸림돌을 만나면 디딤돌로 밟고 지나가고, 한계를 만나면 도전하면서 자기만의 길을 개척한 사람들은 언제나 빠른 성장보다 느린 성숙의 길을 묵묵히 걸었을 것이다. 빨리 가는 쉬운길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어렵지만 도전하면서 느끼는 성취와 보람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는 등불 역할을 한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신비의 소리를 내는 원동력은 혹독한 추위를 나목으로 버티면서 내면으로 승화시킨 고통이 내는 선율의 진동이었듯이 보람있고 가치있는 성취의 이면에는 항상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사람만이 표출할 수 있는 인격적 신앙적 향취와 독창적인 색깔이 있다. 무엇인가를 달성하려고 할 때, 그리고 그 결과를 흔들리지 않는 토대 위에 세우려할 때 시련과 역경은 좋은 재료가 된다. 온 몸으로 겪는 진통의 체험과 흔적은 나만의 성취의 예술을 연출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빛을 발하는 것과 같다. '진통'을 경험하는 가운데 생긴 상처가 아름다운 기억이 되고, 영광스런 흉터로 남는 것이다. 나는 나만의 아름다운 상처, 영광스런 흉터를 남기기 위해 어떤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가? 아무런 '진통'없이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안일함을 버리지 않고는 영광스런 자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작이 두려운가? 두려우면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시작하지 않으면 시험도 시련도 없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 시련을 견디지 못한 사람치고 위대한 시금석을 만든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시작해서 남다른 시험도 통과하고 시련도 겪어야 남다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시작하면 시험과 시련은 필연적으로 따라 온다. 시작하지 않으면 시험과 시련을 경험할 수 없다. 시험을 견뎌내고 시련을 이겨낸 사람만이 마침내 꿈꾸던 목적지, 소원하던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다.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쉬지 않고 시추에 도전할 때 남들이 발견할 수 없었던 보석을 만나게 된다. 지하자원을 개발하기 위해서 시추는 필연적이다. 허공을 뚫는 것 같은 헛수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끊임없이 지속하던 어느 날 시추공에 이끌어 올려진 흙 속에서 반짝이는 광맥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요되는 비용이 아깝고 육신적 고통이 무서워 시작을 주저하며 차일피일하면 그 자리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핑계는 완벽한 준비 때문이라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소심과 두려움 때문에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완벽한 준비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한없는 시작 지연은 완벽한 준비가 아니라 완벽한 시작 포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행착오가 있을지라도 과감히 도전하는 사람이 실패 속에서 더 값진 것을 얻어낸다. 기억하기 조차 싫은 쓰디쓴 인내의 과정이 이 세상 어디서도 맛 볼 수 없는 달고 향내나는 열매를 맺게 한다. 인류 역사를 빛나게 했던 인물들의 공통점은 형용할 수 없는 불행의 터널을 헤쳐나온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한 때는 12제자들에게 정통성 시비의 대상이었던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면 심장이 저리고 사지가 오그라드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지구상의 인물 가운데 그만한 고통을 받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도 바울은 남들이 감히 흉내낼수 없는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