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미스교회 성서대학이 20년을 맞아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말씀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히브리적 사고와 성서해석’이라는 주제로 현 서울신학대학 구약학교수이자 히브리 전문가인 권혁승 목사를 초청한 가운데 심도 깊은 메시지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말씀축제는 히브리적 사고로 기록돼 있는 성경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취지로 계획됐으며 이날 권혁승 목사는 히브리어의 구조와 의미 등을 곁들어서 말씀을 전했다.
30년간 이스라엘과 히브리어를 연구한 권혁승 목사는 창세기 1장1절에 대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만나기 위해 시공간으로 개입해 들어오시는 인카네이션 사건”이라고 강조하는 등 깊은 메시지를 던졌다.
프라미스 성서대학은 평신도 사역과 목회를 위한 성경적, 신학적 인프라를 위한 목적으로 1993년 퀸즈성전 개척과 함께 시작돼 지금까지 개교회 성서대학으로는 최대규모인 3천 여 명의 학생이 입학했고 1079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혁승 목사는 첫째 날 ‘동행하시는 하나님’(창3:8-10), 둘째 날 ‘말씀하시는 계시의 하나님’(히4:12, 딤후3:16-17), 마지막날 ‘온전케 하시는 샬롬 하나님’(민6:22-26) 등을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다. 다음은 첫째날 말씀 주요 내용.
81년 7월에 이스라엘로 유학을 갔다. 이스라엘의 유학은 제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그 유학이 저의 두 번째 30년을 여는 중요한 사건이 됐다. 그 전 32년은 이스라엘 유학이라는 하나님의 부름과 연결되고 이스라엘 유학과 함께 시작된 또 다른 30년은 거대한 분수령과 같이 저의 방향, 제 연구를, 제 사역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앞으로 저는 정년이 조금 남아 있지만 또 다른 30년을 준비하게 됐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역이 시작됐다고 본다. 이스라엘은 제 생애 2번의 30년을 이끌어가는 견인차와 같다. 이 이스라엘 유학,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공부를 종합해주는 용어가 있다면 히브리적 사고다.
이 히브리적 사고에 대해서 정리를 간략히 해드리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이든지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이 사고방식은 개인적인 사고방식도 있지만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전통 속에서 숙성된 사고방식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도 하는데 개인적이든지 민족 전체가 갖고 있는 것이든지 사고방식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오랜 기간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세포가 생성되듯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자리잡는 것이 히브리적 사고다.
유대민족은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가졌는데 그것을 4천년이라는 과정 가운데 그들의 삶과 문화 속에 전체 민족에 공유하고 있는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히브리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 왜 중요한가 하면 이것이 성서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성서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신앙의 중요한 바탕을 마련하셨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평생 관심 갖고 영적 자양분을 삼는 이 성경 그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히브리적 사고의 바탕 가운데 있다. 그 히브리적 사고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사고다. 인간 중심의 사고는 헬라적 사고라고 이야기하는데 히브리적 사고는 우리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적 사고다. 이것이 성경의 바탕이다.
왜 이 히브리적 사고가 중요한가. 라디오든 TV든 우리에게 들리거나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주파수가 맞아 떨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주파수를 보내주시는데 히브리적 사고가 그 주파수를 수신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인간중심의 주파수를 갖고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다. 이것은 거대한 주제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설명드린다는 것은 쉽지는 않다. 4천년의 긴 기간동안 유대민족 전체가 공유하고 있던 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체내 속에 간직된 사고방식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저는 그 가운데 아주 핵심이 되는 3가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첫째는 하나님 중심적 사고다.
하나님이 우선순위를 갖는 것이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시다. 하나님 경외라고도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행동중심적 사고다.
이스라엘 민족이 사용하는 히브리어는 제일 앞에 위치하는 것이 동사다. 주어는 동사 뒤에 오든지 아니면 대명사로 표현될 때는 동사 속에 포함이 된다. 이것은 동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어가 우선이다. 그런데 히브리적 사고, 성서적 사고는 주어보다 중요한 것이 동사다. 심지어 be 동사가 히브리어에 있는데 그 be 동사는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인 것이다. 그런 언어로부터 동작중심적, 행동중심적 사고가 히브리적 사고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 분 하나님, 그 분을 사랑하고 경외하라는 의미와 연결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듣는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동작중심적 사고, 순종이 전제된 자세인 것이다.
세 번째는 공동체 중심적 사고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는데 이것은 인간의 구성자체가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적인 존중이 전제돼 있지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인간은 단독자인 내가 아니라 적어도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 이질적 요소의 둘이 모였을 때 하나라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고가 공동체 중심적인 사고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반 시 뿐만 아니라 산문에도 나오는 표현이 A와B가 동시에 제시되는 형태다. 둘이 모여야 그것이 올바른 표현이 되는 것이 많다. 이것이 히브리적 사고다. 어쩌면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 나의 파트너일 수 있다. 이것은 굉장히 폭넓은 공동체 의식이다. 나와 반대하는 사람도 나를 세워주는 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나의 파트너라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 공동체 안에 들어 있고 성경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번 강좌를 통해서 히브리적 사고의 중요한 내용들을 성경 본문과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선택한 창세기 3:8-10은 범죄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께서 첫 번째 대화를 인간에게 건네시는 것이다. 그 전에도 물론 아담에게 많은 대화를 나누셨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것은 첫 번째 대화인 것이다. 이 내용을 통해서 절대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 첫 번째 시작을 어떻게 이해를 하는가.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고 단순히 말할 수 있지만 조금 더 말씀에 다가서서 두드려볼 필요가 있다. 말씀은 살아있는 유기체적인 말씀이기에 두드리기만 하면 다른 응답을 주실 것이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여러분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두드리고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주기에 진리다. 같은 방향으로 말고 그 내용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계속 접근하시기 바란다.
창세기 1장1절을 저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안에는 2가지 창조가 있다. 하나는 공간의 창조다. 태초에라는 것은 시간을 의미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공간과 함께 시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과는 전혀 관계없이 존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시공간의 제한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존재가 없다. 시간이 없는 인간, 공간이 없는 우리 상상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래서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철저히 우리를 위한 것이 공간과 시간이다.
우리를 위한 시공간의 창조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그 시공간 속에서 들어오시는 것이다. 우리와 만나기 위해서 들어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성경은 처음부터 인카네이션 성육신을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위해서 시공간을 마련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들어오시기 위한 전략이 창세기 1장1절이다. 이 창세기 1장1절이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과연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지 살펴보자. 저는 그것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뜻의 히브리어 ‘히트할라크’는 우리와 함께 산책하신다는 의미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나와있다. 노아는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자였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창17장1절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돼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인물을 소개할 수 있지만 아주 대표적인 인물 세 분을 소개했다.
오늘 본문으로 함께 나눴던 창세기 3장8절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의 소리를 들었다. 밤이 되면 기온이 떨어지고 바닷가로부터 바람이 지중해로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중앙산지까지 몰려온다. 예루살렘에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그 시점이 오후4시가 된다. 이스라엘의 시간을 대입하면 바람이 불 때를 오후4시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시간이 되면 하나님은 동산을 거니시는 것이다. 아담은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 곁에 가서 함께 산책하는 것이 일상인데 그날은 아담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3장1절에 나온 범죄 때문에 그렇다.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아담이 초청돼 있지만 그 약속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나가는 것을 우리는 데이트라고 하는데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아담을 향해 찾으시면서 그 아담을 부르시는 내용, 그 내용이 창3:9에 나와있다.
창3:10의 핵심을 이야기 하라면 ‘내가 숨었나이다’이다. 나머지 7마디는 변명이다. 범죄한 인간은 한마디의 말을 위해 그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7배의 더 많은 단어를 사용하는지 모른다. 자기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 그것이 무료 7배나 덧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어쩔수 없는 자기의 상황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데이트 약속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였다는 것이다. 벗었다는 것은 수치심을 이야기하고 두려움은 글자그대로 두려움이다. 수치심과 두려움 그것을 느끼기 전에도 벗고 있었다. 그러나 수치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벗은 것이 수치심으로 드러났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갓난아이에게는 수치심이 없다. 그만큼 자의식이 발달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자의식이라는 것을 너무 강조하지 말고 갓난아이와 부모 사이에서 부모의 사랑 속에 감쌈을 당하고 있을 때 그 벗은 것이 수치가 되지 않는 것으로 우리가 해석할 수 있다. 그 이 전에도 벗었지만 수치심이 없었다. 그러나 수치심이 생기는 것은 자신의 부족이나 결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부족함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드러난 것이다. 인간은 자체가 약점, 결점이 많다.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인간은 없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덮어주신 것이다. 범죄의 결과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내가 탈출해버린 것이다. 내가 스스로 독립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가 수치심으로 드러나게 됐다. 스스로 독립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맞서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벗은 것이 수치심이 되는 것이다.
두려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사랑으로 감싸질 때 두려움이 아닌 경외로 나타난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수치심과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모습이다. 모든 종교는 내적 수치심과 외적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동기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주셨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과의 산책의 회복인 것이다. 여러분도 이 산책의 회복이 있으시기를 바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여러 행보를 보여주시는데 그 가운데 특이한 것 하나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동행하신다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 내려가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에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그들과 대화하시고 설득하신 것을 보면 산책의 성격이 포함돼 있다. 다른 어떤 부활 내용보다 많은 23절이 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12제자가 아닌 다른 인물이다. 이 사건 외에 기록이 없는 변두리인이다. 그런데 왜 이 변두리인에게 왜 무려 23절이나 되는 많은 기록이 할애됐을까. 이 인물은 바로 우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 이 엠마오 두 제자를 통해 우리에게 던져지는 메시지는 그들을 설득해서 그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부활하신 주님임을 깨닫게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그날 밤 돌아가게 하셨다. 우리 집 근처에 10분만 걸어나가면 40분을 걸을 수 있는 산책코스가 있다. 하천주변으로 산책로를 잘 만들어 놓았고 한바퀴 돌면 40분이 걸린다. 저녁식사 후에는 특별히 다른 일이 없으면 집사람과 산책을 나간다. 걸으면서 이것저것 떠오르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한바퀴 돌때쯤 산책의 결과는 우리 집에 이런 기도제목이 있구나, 우리 교회에 이런 일로 기도할 일이 있구나, 기도제목이 무언 속에서 정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날 아침 새벽기도에 그 기도를 하게 된다. 산책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산책이 아니라 우리 집사람과의 산책은 기도제목을 나누며 둘이 서로 말없이 이렇게 기도해야하겠구나하는 기도의 사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중요한 시간인 것이다.
저는 우리 집에 산책과 같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산택하시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산택이 아니라 아담에게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다가가셔서 대화하시고 격려하시고 다시금 힘을 내게 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음에서 목적을 향해 걸어나가게 하는 산책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부드러움 뒤에 우리를 인격적으로 건드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푸근하게 끌어안으시며 마지막은 사명을 새롭게 던져주는 그런 자리로 나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다가오심이다.
아담은 실업자가 아니었다.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사명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훼손되지 않도록 잘 가꾸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역할을 했다. 지배권을 의미하는데 그 지배권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것이다. 위임받은 것이다. 에덴동산의 관리자이자 하나님 창조한 피조물을 다스리는 자였다. 그것이 억압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산책하며 우리에게 격려하시는 것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그날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활의 증인으로 예루살렘에 새로운 부활의 메시지를 전달해 준 것 같이 예수님의 공생애 자체가 우리와 산책하신 것이다. 산책을 통한 훈련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3년의 결과는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주신 것으로 마지막 정리가 된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산책해주신 은혜가 분명하다면 거기에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달라는 요청, 그것이 우리와 산책하시는 목적인 것이다.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나님, 그것을 깨우쳐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성경의 큰 흐름인 것이다.
이 둘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불연속성이 있다. 예수님은 3년동안 같이 산책하시며 길을 제시해주셨는데 제자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갭이 있다. 이 갭을 메워주는 것이 사도행전 2장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하더라도 분명한 메시지를 받았다고 해도 우리에게 행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에게 거듭남의 기회를 또 주시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고의 중심에는 절대 하나님의 우선권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같이 산책하시면서 맡겨주시고 그 안에서 또 다시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우리가 그 일을 행할 수 없을 때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을 섬기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 중심적이지만 내가 그 일을 행하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그 일을 하도록 설득하시면서 또 그 능력을 주시리라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히브리적 사고의 구조다.
32년 전에 이스라엘로 유학을 갈 때 저는 신대원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히브리어가 선택과목이었다. 히브리어를 가르치시는 교수님이 갑자기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나게 되어 선택과목인 그 과목을 배울 수 없고 대체할 강사를 학교가 세우지 않고 그 과목 자체를 빼버렸다. 히브리어 어려워하는 학우들은 좋아했는데 저는 서운했다. 앞으로 목회자로서 가르쳐야 하는데 히브리어를 못배우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대로 끝났으면 끝나는 것이다. 안배우면 되니까. 그런데 생각의 꼬리가 이어졌다. 이스라엘 가면 제대로 배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목적지가 굳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