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충선왕 때 살았던 우탁(禹倬)은 한 평생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관료요, 많은 학문적 업적을 이룩했던 성리학자였다. 그가 말년에 은퇴한 후, 예안이라는 마을에 내려가 후학들을 양성하던 어느날, 문득 우물가에 비친 자신의 백발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 한절을 읊기 시작했다.
“한 손에 가시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의 탄로가(歎老歌)에서>
늙음이 찾아오는 것을 가시덩굴로 막고 백발은 몽둥이로 쫓아 못오게 하려 했지만, 백발이 우탁의 속셈을 알고 지름길로 왔다는 고백이다. 이 시조를 언뜻 보면 백발을 막아 보겠다는 생각이 장난스럽게 느껴지지만, 다시 살펴보면 늙는다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인생의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세상을 살았던 그 어떤 이도 자신에게 찾아온 늙음과 백발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늙는다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회피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잠16:31)이라 말씀하고 있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언20:29)라고 말씀한다. 젊을 때는 힘이 있어서 아름답고, 나이가 들어서는 백발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발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인가? 백발이란 수많은 연륜과 경험을 통하여 얻은 지혜를 말한다. 나이가 들어서 아름다운 것은 그 지혜 때문이다.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 봄과 같이 새로운 생명이 소생하는 시기가 있고, 여름과 같이 왕성한 푸르름을 발휘하는 시기가 있다. 또한 가을과 같이 인생의 원숙함으로 열매를 맺는 시기가 있고, 겨울과 같이 모든 것을 정리하는 시기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인생의 사계절 중 그 어느 하나도 아름답지 않은 계절이 없다는 것이다.
봄과 같은 어린아이에게는 천진난만함과 사랑스러움이 아름답고, 여름과 같은 청년의 시절에는 힘있게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가을과 같은 중년의 시기에는 인생의 열매를 맺어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겨울과 같은 노년의 시기에는 인생의 지혜를 가지고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을 수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철이 든다는 말이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자신이 인생의 어느 계절에 와 있는 지를 깊이 깨닫고 그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자신의 인생의 계절을 감사히 여기며 그 곳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한다면, 그는 이미 인생의 철이 든 자이다.
반면에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자신의 인생의 계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는 결코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없으며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없을 때 그는 결코 철이 든자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인생의 계절 속에서 아름다움의 능력을 보여주는 철든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끝이 나는지를 제대로 알 때 가능하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시작될 수 있었고, 그 은혜 때문에 앞으로도 살게 된다. 이를 알 때,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제대로 알고 아름다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철이 든다는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