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당동 골목길은 떡볶이 집들로 유명하다. 신당동 떡볶이집의 원조로 알려진 마복림 할머니는 91세를 사시고 별세하셨다. 고인이 살아계실 때 어느 한 TV광고에서 “우리 떡볶이 고추장 맛의 비결은 며느리도 모른다”고 해서 한때 유명해 졌다. 그 맛의 비결이 바로 마복림 할머니의 knowhow(노우하우), 곧 일명 ‘비법‘이다. 이러한 노우하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받는 노우웨어(Knowwhere)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노우웨어가 있어야 노우하우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행복하고, 좋은 세상은 언제나 원칙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방법이 뒤따를 때 오게 된다. 공부를 잘 가르치는 학교가 좋은 학교가 아니라 사람을 키우려는 마음에서 학생들에게 성실함과 수고함으로 공부를 잘 가르치는 학교가 좋은 학교이다. 남아공의 장애인 육상선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가 런던올림픽에서 필드를 달릴 때는 그가 메달을 딴 것과는 관계없이 박수를 받았다. 그 이유는 그가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여러 가지 삶의 제약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두 발 없이 달리는 그의 모습, 이름하여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는 칭찬을 받았고, 그 달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최근 그의 여자 친구 리바 스틴캄프를 총으로 살해했다는 말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는 원칙을 버리고 방법을 택하고 말았다.
기독교가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도 기독교로서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과 다른 차별화이다. 이것을 사도성, 거룩성, 보편성, 유일성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기독교를 한 보자기에 싸서 말하는 것이 외람된 일이기에 조심스럽기만 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서 있고, 예수님이 죄인의 죽음가운데서도 의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언제나 영존할 수 밖에 없다. 파괴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오늘 날 기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무엇인가 방향을 잃어버린 바다위에 표류하는 배 같아서 불안하기만 하다. 성경의 진리는 분명한 것이다. 보리 가운데서 쌀을 분별하는 것과 같이 혼란스러운 것이 진리가 아니라 하얀 바둑알 가운데서 검은 바둑을 고르는 것과 같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참된 구원이고, 누가 이단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려지고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8:12). 기독교가 기독교인 것은 바로 세상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둡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이 욕심과 교만과 시기와 다툼과 불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눈이 어두운 세상을 밝은 빛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처럼 세상이나 교회가 다 함께 구덩이에 빠지게 될까 조심스럽다. 교회의 4S즉, 세속화(Secularization), 고립화(Separation), 세습화(Succession), 범종교화(Similarity) 등 세상의 파도가 교회를 덮치는 쓰나미(?)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이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담임목사 빌 하이벨스 목사가 쓴 “지도자(Courageous Leadership)에서 “교회는 생명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생명력은 설교자의 강단에서 흘러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열심히 가르치는 제자훈련도 아니라고 했다. 좋은 설교와 훌륭한 가르침도 아니라고 했다. 하이벨스 목사는 교회의 생명력은 교회와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Influence)을 줄 수 있는 헌신된 사람들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힘은 바로 진리만이 갖는 노우하우의 원칙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과 감격을 줄 수 있도록 사랑과 섬김을 보인다면 기독교는 어느 누구에서라도 칭찬받는 노우웨어(knowwhere)의 기독교가 될 것이다.
행복하고, 좋은 세상은 언제나 원칙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방법이 뒤따를 때 오게 된다. 공부를 잘 가르치는 학교가 좋은 학교가 아니라 사람을 키우려는 마음에서 학생들에게 성실함과 수고함으로 공부를 잘 가르치는 학교가 좋은 학교이다. 남아공의 장애인 육상선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가 런던올림픽에서 필드를 달릴 때는 그가 메달을 딴 것과는 관계없이 박수를 받았다. 그 이유는 그가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여러 가지 삶의 제약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두 발 없이 달리는 그의 모습, 이름하여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는 칭찬을 받았고, 그 달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최근 그의 여자 친구 리바 스틴캄프를 총으로 살해했다는 말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는 원칙을 버리고 방법을 택하고 말았다.
기독교가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도 기독교로서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과 다른 차별화이다. 이것을 사도성, 거룩성, 보편성, 유일성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기독교를 한 보자기에 싸서 말하는 것이 외람된 일이기에 조심스럽기만 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서 있고, 예수님이 죄인의 죽음가운데서도 의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언제나 영존할 수 밖에 없다. 파괴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오늘 날 기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무엇인가 방향을 잃어버린 바다위에 표류하는 배 같아서 불안하기만 하다. 성경의 진리는 분명한 것이다. 보리 가운데서 쌀을 분별하는 것과 같이 혼란스러운 것이 진리가 아니라 하얀 바둑알 가운데서 검은 바둑을 고르는 것과 같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참된 구원이고, 누가 이단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려지고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8:12). 기독교가 기독교인 것은 바로 세상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둡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이 욕심과 교만과 시기와 다툼과 불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눈이 어두운 세상을 밝은 빛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처럼 세상이나 교회가 다 함께 구덩이에 빠지게 될까 조심스럽다. 교회의 4S즉, 세속화(Secularization), 고립화(Separation), 세습화(Succession), 범종교화(Similarity) 등 세상의 파도가 교회를 덮치는 쓰나미(?)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이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담임목사 빌 하이벨스 목사가 쓴 “지도자(Courageous Leadership)에서 “교회는 생명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생명력은 설교자의 강단에서 흘러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열심히 가르치는 제자훈련도 아니라고 했다. 좋은 설교와 훌륭한 가르침도 아니라고 했다. 하이벨스 목사는 교회의 생명력은 교회와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Influence)을 줄 수 있는 헌신된 사람들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힘은 바로 진리만이 갖는 노우하우의 원칙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과 감격을 줄 수 있도록 사랑과 섬김을 보인다면 기독교는 어느 누구에서라도 칭찬받는 노우웨어(knowwhere)의 기독교가 될 것이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