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제10차 부산 총회’의 해인 2013년, 연초부터 한국교회는 한기총-NCCK간의 ‘공동선언문’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한국교회 보수-진보간의 이 갈등은 뿌리가 깊다. 특히 1970-80년대 ‘개인 구원’을 강조하던 보수 진영은 사회참여를 등한시했고, ‘사회 구원’을 부르짖으며 활동하던 진보 진영은 이를 비판하면서 극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교회 사회운동사-칼빈에게 길을 묻다(CLC)>는 한국교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장로교, 특히 ‘칼빈주의’ 입장에서 한국교회 사회운동사를 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인 전준봉 박사(성민교회, 총신대)는 칼빈의 정치사상, 특히 ‘불복종 신학’을 말하면서도 시민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양면성을 살피고, 이후 프랑스와 미국, 네덜란드와 남아공 등지에서 이 정치사상이 발전 또는 오용되는 과정을 되짚는다. 이후에는 한국교회의 민주화·노동·통일 분야 사회참여를 돌아본 다음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80년대 학번’인 전 박사는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에 관심이 가게 됐고 개혁주의 입장, 특히 그 원류인 칼빈이 사회운동과 저항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의 교회론·국가론에 근거해 연구했다.
-사회참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어떠했는지 간단히 말해 달라.
“칼빈의 정치사상은 16세기 유럽의 정치상황과 무관치 않은데, 국가가 종교에 예속됐던 중세와 이원론적 세계관의 재세례파에 반대하여 나왔다. 한 마디로 교회와 국가의 유기적 관계, 즉 국가와 교회의 통치영역을 구분했다. 그는 <기독교 강요>를 통해 국가는 교회의 예배를 보장하고, 교회는 국가가 바른 길로 가도록 충고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독재자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을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복종을 우선시하는 친정부적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1534년 ‘뮌스터 반란’ 때 극심한 혼란을 경험했기 때문에, 시민의식이나 질서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설교나 주석 등을 통해 충분하진 않지만 저항에 대한 내용들도 드러나 있다. 칼빈 자신은 시민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후예들은 1572년 ‘위그노 대학살’ 등을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어 저항권이나 사회계약론, 시민주권까지 용인하게 됐고 로크와 루소 등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면서 서구 민주주의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됐다.”
-칼빈의 정치사상이 후대에 가장 모범적으로 구현된 사례는.
“아무래도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때라 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화란의 소시민과 상인들에 의해 주로 수용돼 독립전쟁에도 깊이 관여했고,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사실상 칼빈주의 국가가 됐다. 여기서 카이퍼는 ‘영역주권 사상’을 통해 정치와 교육 등을 개혁했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
반면 칼빈의 후예들인 미국 청교도들과 남아공의 경우 ‘칼빈주의의 오류’라고도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학살했고, 남아공의 인종분리 정책은 칼빈주의자들이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을 오용한 결과였다. 칼빈주의가 근대 민주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칼빈주의의 폐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부분들까지 공과(功過)를 모두 다뤄야 앞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칼빈주의와 상관이 있는가.
“민주화에 앞장섰던 기장이나 통합측이 스스로 칼빈주의자라고 이야기하지 않나. 그러나 그들이 칼빈주의 입장에서 운동에 나선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보다는 칼빈주의 입장에서 한국교회 사회운동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장합동이나 보수주의 교단들은 정치에 대해 침묵하거나 ‘정교분리’를 내세웠는데, 칼빈이 말하는 정교분리는 무엇인지도 이야기해볼 수 있다.
1970-80년대 한국교회 사회운동은 민주화운동·노동운동·통일운동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민주화운동의 경우 보수 교단에서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사실상 침묵했는데, 이는 칼빈이 말하는 ‘파수꾼’ 역할은 아니다. 칼빈은 정치가 잘못하면 충고를 하라는 입장이었다. 반면 진보 쪽은 원하든 원치 않든 ‘폭력적’이 됐는데, 칼빈은 폭력을 절대 선호하지 않았다. 독재자가 있더라도 일단 순응하라고 했다. 백성들이 방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인내하도록 허락하셨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진행중인 이집트와 시리아 등 중동에서 민주화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무기를 들기 이전에 자위권적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제네바 사역 동안 자선기관(General Hospital)을 통해 과부와 어려운 사람들을 돌봤는데, 노동운동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교회가 이런 분야에서 침묵한다면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전도 차원에서 노동자들을 돌볼 순 있지만, 맹목적으로는 먹히지 않으니 노동운동과 함께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물론 후에 변질되기도 했다. 통일운동의 경우 진보 측에서는 북한 교회를 인정하거나 여러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운동들이 통일에 긍정적 역할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진보 측이 폄하했던 보수 측의 북한에 성경보내기 등이 자생적 지하교회들을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내 후일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중동 민주화 이야기가 나왔는데, 독재 정권에서는 어느 정도 종교 자유를 누리던 현지 기독교인들이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오히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 칼빈주의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보나.
“칼빈은 독재 정권을 용인하지 않았지만, ‘무정부 상태보단 독재가 낫다’고 했듯 질서를 많이 강조했다. 무분별한 시민 폭동은 정국을 더 혼란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중간 관리자’ 위그노가 국민들 도움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지금 시리아나 이집트는 이러한 질서가 많이 파괴된 상태로, 이슬람 근본주의가 판치다 보니 핍박을 당하고 있다. 그곳 상황은 독재자들이 친미 성향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과도기이거나 이슬람 정권이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고 박해하는 것일 뿐으로 사실 별다를 게 없다고 본다.”
-우리나라도 독재 정권 당시 교회가 부흥했고, 민주화 이후 교회가 정체 상태인데.
“독재 정권 때는 경제개발이 이뤄지는 과정이어서 정신적 버팀목이 필요했고 성도들도 대부분 신앙심이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경제적으로도 부흥하니 점차 명목상 기독교인들이 늘어나 버렸다. 한국교회는 민주화 이후 세대교체 과정에 있어 분열이나 분쟁도 많았다.
또 한 가지는 2006년 이후 기독교는 정체 상태이지만 천주교는 상승세인데, 교리상 ‘믿음과 행위’를 모두 강조해 이뤄졌던 가톨릭의 1970-80년대 사회참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한국교회는 독재 정권 당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폭력은 절제하는 대신, 국가를 향해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칼빈주의 입장에서, 21세기 한국교회 사회운동의 나아갈 방향은.
“한국교회는 칼빈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보듬고 민중들의 삶에 뿌리내리는 디아코니아의 삶을 실현하고 정의를 하수처럼 흘러보내야 한다. 칼빈주의의 긍정적·부정적 입장을 충분히 되짚고 ‘자성적 칼빈주의’로 개혁주의 사회운동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 정치권도 그렇지만 교계도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그러므로 사회 구원과 영혼 구원의 우선순위를 따지면서 대립하기보다, 서로 공존하면서 사회적 약자에게 손을 내밀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들을 보살피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통일에 대한 의식의 저변을 확대하면서 북한 주민들을 위해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말고, 북한선교와 탈북자 돕기, 탈북자 지위와 북한인권 등에서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윤리적인 면에서도 사회가 바르게 설 수 있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우, 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 낙태, 매매춘 등 생명 내지 존엄성 문제들을 ‘하나님 형상’으로 인간이 창조됐다는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
저자인 전준봉 박사(성민교회, 총신대)는 칼빈의 정치사상, 특히 ‘불복종 신학’을 말하면서도 시민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양면성을 살피고, 이후 프랑스와 미국, 네덜란드와 남아공 등지에서 이 정치사상이 발전 또는 오용되는 과정을 되짚는다. 이후에는 한국교회의 민주화·노동·통일 분야 사회참여를 돌아본 다음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80년대 학번’인 전 박사는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에 관심이 가게 됐고 개혁주의 입장, 특히 그 원류인 칼빈이 사회운동과 저항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의 교회론·국가론에 근거해 연구했다.
-사회참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어떠했는지 간단히 말해 달라.
“칼빈의 정치사상은 16세기 유럽의 정치상황과 무관치 않은데, 국가가 종교에 예속됐던 중세와 이원론적 세계관의 재세례파에 반대하여 나왔다. 한 마디로 교회와 국가의 유기적 관계, 즉 국가와 교회의 통치영역을 구분했다. 그는 <기독교 강요>를 통해 국가는 교회의 예배를 보장하고, 교회는 국가가 바른 길로 가도록 충고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독재자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을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복종을 우선시하는 친정부적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1534년 ‘뮌스터 반란’ 때 극심한 혼란을 경험했기 때문에, 시민의식이나 질서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설교나 주석 등을 통해 충분하진 않지만 저항에 대한 내용들도 드러나 있다. 칼빈 자신은 시민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후예들은 1572년 ‘위그노 대학살’ 등을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어 저항권이나 사회계약론, 시민주권까지 용인하게 됐고 로크와 루소 등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면서 서구 민주주의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됐다.”
-칼빈의 정치사상이 후대에 가장 모범적으로 구현된 사례는.
“아무래도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때라 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화란의 소시민과 상인들에 의해 주로 수용돼 독립전쟁에도 깊이 관여했고,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사실상 칼빈주의 국가가 됐다. 여기서 카이퍼는 ‘영역주권 사상’을 통해 정치와 교육 등을 개혁했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
반면 칼빈의 후예들인 미국 청교도들과 남아공의 경우 ‘칼빈주의의 오류’라고도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학살했고, 남아공의 인종분리 정책은 칼빈주의자들이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을 오용한 결과였다. 칼빈주의가 근대 민주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칼빈주의의 폐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부분들까지 공과(功過)를 모두 다뤄야 앞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칼빈주의와 상관이 있는가.
“민주화에 앞장섰던 기장이나 통합측이 스스로 칼빈주의자라고 이야기하지 않나. 그러나 그들이 칼빈주의 입장에서 운동에 나선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보다는 칼빈주의 입장에서 한국교회 사회운동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장합동이나 보수주의 교단들은 정치에 대해 침묵하거나 ‘정교분리’를 내세웠는데, 칼빈이 말하는 정교분리는 무엇인지도 이야기해볼 수 있다.
1970-80년대 한국교회 사회운동은 민주화운동·노동운동·통일운동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민주화운동의 경우 보수 교단에서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사실상 침묵했는데, 이는 칼빈이 말하는 ‘파수꾼’ 역할은 아니다. 칼빈은 정치가 잘못하면 충고를 하라는 입장이었다. 반면 진보 쪽은 원하든 원치 않든 ‘폭력적’이 됐는데, 칼빈은 폭력을 절대 선호하지 않았다. 독재자가 있더라도 일단 순응하라고 했다. 백성들이 방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인내하도록 허락하셨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진행중인 이집트와 시리아 등 중동에서 민주화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무기를 들기 이전에 자위권적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제네바 사역 동안 자선기관(General Hospital)을 통해 과부와 어려운 사람들을 돌봤는데, 노동운동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교회가 이런 분야에서 침묵한다면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전도 차원에서 노동자들을 돌볼 순 있지만, 맹목적으로는 먹히지 않으니 노동운동과 함께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물론 후에 변질되기도 했다. 통일운동의 경우 진보 측에서는 북한 교회를 인정하거나 여러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운동들이 통일에 긍정적 역할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진보 측이 폄하했던 보수 측의 북한에 성경보내기 등이 자생적 지하교회들을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내 후일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중동 민주화 이야기가 나왔는데, 독재 정권에서는 어느 정도 종교 자유를 누리던 현지 기독교인들이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오히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 칼빈주의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보나.
“칼빈은 독재 정권을 용인하지 않았지만, ‘무정부 상태보단 독재가 낫다’고 했듯 질서를 많이 강조했다. 무분별한 시민 폭동은 정국을 더 혼란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중간 관리자’ 위그노가 국민들 도움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지금 시리아나 이집트는 이러한 질서가 많이 파괴된 상태로, 이슬람 근본주의가 판치다 보니 핍박을 당하고 있다. 그곳 상황은 독재자들이 친미 성향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과도기이거나 이슬람 정권이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고 박해하는 것일 뿐으로 사실 별다를 게 없다고 본다.”
-우리나라도 독재 정권 당시 교회가 부흥했고, 민주화 이후 교회가 정체 상태인데.
“독재 정권 때는 경제개발이 이뤄지는 과정이어서 정신적 버팀목이 필요했고 성도들도 대부분 신앙심이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경제적으로도 부흥하니 점차 명목상 기독교인들이 늘어나 버렸다. 한국교회는 민주화 이후 세대교체 과정에 있어 분열이나 분쟁도 많았다.
또 한 가지는 2006년 이후 기독교는 정체 상태이지만 천주교는 상승세인데, 교리상 ‘믿음과 행위’를 모두 강조해 이뤄졌던 가톨릭의 1970-80년대 사회참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한국교회는 독재 정권 당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폭력은 절제하는 대신, 국가를 향해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칼빈주의 입장에서, 21세기 한국교회 사회운동의 나아갈 방향은.
“한국교회는 칼빈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보듬고 민중들의 삶에 뿌리내리는 디아코니아의 삶을 실현하고 정의를 하수처럼 흘러보내야 한다. 칼빈주의의 긍정적·부정적 입장을 충분히 되짚고 ‘자성적 칼빈주의’로 개혁주의 사회운동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 정치권도 그렇지만 교계도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그러므로 사회 구원과 영혼 구원의 우선순위를 따지면서 대립하기보다, 서로 공존하면서 사회적 약자에게 손을 내밀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들을 보살피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통일에 대한 의식의 저변을 확대하면서 북한 주민들을 위해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말고, 북한선교와 탈북자 돕기, 탈북자 지위와 북한인권 등에서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윤리적인 면에서도 사회가 바르게 설 수 있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우, 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 낙태, 매매춘 등 생명 내지 존엄성 문제들을 ‘하나님 형상’으로 인간이 창조됐다는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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