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창 6: 15-16)

규빗은 성경의 언어가 아니다

창세기 6장 말씀은 창세기 기자(모세)가 하나님 계시를 그대로 인용한 부분이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말 ‘규빗’이라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한다. 그런데 실은 성경 창세기 6장 15절 본문에 ‘규빗’이라는 말은 없다. 즉 규빗은 성경 원문 히브리어가 아니다.

그럼 우리 성경의 규빗은 도대체 어디서 온 단위일까? 이 말의 히브리 원어는 ‘암마’(ammah)이다. ‘암마’는 아마 아카드어 아마투(ammatu)에서 왔을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길이를 측정하는 단위로 인간의 지체(肢體)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규빗은 바로 ‘팔꿈치’를 나타내는 라틴어 ‘큐비툼’(cubitum)에서 온 말이다.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히브리어 ‘암마’는 라틴어 ‘규빗’으로 바뀌게 되었다.

규빗의 단위

보통 라틴어의 규빗은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가 기본적인 길이의 단위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규빗을 얼마로 계산하였을까? 실로암 비문에 히스기야의 도수터널(tunnel)의 길이가 1,200규빗이었다는 기록을 참고하고, 실측에 의해 그 길이는 533.1m였으므로, 이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1규빗은 약 44.425cm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 같은 수치는 이스라엘의 규빗이 바벨론의 것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략 45cm 내외를 한 규빗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성막 및 성전 건축에 쓴 규빗이 바로 이 길이였다(출 25-27장, 왕상 6-7장, 대하 3-4장). 이를 바탕으로 1규빗을 약 18인치(약 45 센티미터 내외)로 보면 방주는 길이 약 133-137미터, 폭 23미터, 높이 약 13-14미터 가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6장에 기록된 방주의 치수를 확정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몇 가지 난제가 있다.

방주의 규빗 단위를 규정하는 난제

라가슈의 제사왕 구데아(Gudea, 전 2000년경) 의상에 새겨진 척도표에 따르면, 1규빗은 지금 단위로 약 49.5cm이다. 이것은 보통의 규빗인데, 왕실에서 사용하는 규빗은 그보다 큰 55cm였다. 바벨론 사람들은 약 50.3cm에 해당하는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규빗’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집트의 척도표에서도 한 규빗은 45cm, 왕실 규빗은 55cm였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애굽 사람들은 약 67.5cm와 44.7cm에 해당하는 긴 규빗과 작은 규빗을 가지고 있었다.

애굽에서 일반 규빗과 왕실 규빗을 다르게 적용했던 것처럼 에스겔 선지자도 장대 규빗(long cubits)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장대 규빗은 보통의 규빗에 한 손바닥을 더한 것이다. 즉 에스겔은 일곱 손바닥의 규빗을 쓰고 있다(겔 40:5). 이스라엘에서도 바벨론, 애굽과 마찬가지로 장·단의 규빗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반 규빗은 45cm이고 장 규빗은 52cm로, 애굽의 그것에 근접해 있었다.

또 한 가지 난제는 홍수 당시 규빗을 지금의 규빗 단위에 과연 적용할 수 있느냐다. 홍수 이전에는 인류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장수하였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수명이 기록된 홍수 이전의 실명 인물 가운데 에녹을 제외할 경우 계산해 보면 평균 912세가 된다.

노아는 5백세 되던 해 아들 셈을 낳았다. 오늘날 인간의 성장은 대개 20살을 전후하여 멈춘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생리적 출산 가능 연령은 60세 전후하여 멈추게 된다. 이것은 남녀가 거의 일치한다. 물론 이것은 생리적 가능성일 뿐 현실적인 사회문화적 조건 아래서 실제 자녀 출산 가능 연령은 그보다 훨씬 더 젊은 나이에 그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의 노아는 5백세가 지난 후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은 것으로 보아 홍수 이전 인간의 성장 연한은 20세를 훨씬 넘어 10배 이상 즉, 수백 년(최소 250년 이상)간 지속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체형도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규빗(팔꿈치) 단위로 제시된 방주의 크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아주 달랐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900세가 넘게 살던 인류의 팔꿈치 크기를 지금의 우리식 판단대로 45cm 내외라고 판단하여 방주 길이는 137m이고 배수량은 32,800톤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소박한 발상일 뿐이다.

1세기 때 유명한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1규빗이 20인치라고 했다. 고대 화폐 단위와 도량형을 연구하기 위해 고대 여러 지방을 여행한 바 있는 그레이브스는 1규빗의 길이가 거의 22인치에 달한다고 보았다. 네빈 목사가 저술한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규빗을 모든 도량의 모체라고 부른다.

즉 팔꿈치로부터 가운데 손가락 끝부분까지의 길이는 균형 잡힌 남자 신장의 4분지 1이라고 한다. 보통 한 규빗은 18인치다. 카펠러스 등은 히브리인에게는 두 종류의 규빗이 있었다고 했다. 즉 하나는 종교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것이다. 종교적인 것은 36인치이며 일반적인 것은 16인치가 된다. 아마도 지역과 시대에 따라 규빗의 길이가 조금씩 다르게 표시되었던 것 같다”고 했다. 지금도 남녀노소 사람마다 인종마다 팔꿈치 길이는 천차만별이다.

이 같은 규빗 단위의 변천을 통해 볼 때 성경 원문에 나타난 방주의 칫수 “암마”(규빗)의 단위에 대한 정확한 규명은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가능할 뿐, 당시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우리들은 잠정적인 상상의 치수만을 말할 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마 정확한 방주의 규모 파악은 방주의 실물이 발굴되는 그 날이 와야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 속에서 그런 날을 허락하실까?

방주가 알려주는 참된 의미는(방주의 크기와 모습이 아니다)

방주(方舟)는 히브리어로 ‘테바’라고 한다. 그 정확한 어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배를 나타내는 애굽어 텝트(Tept)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닐까 학자(Keil, Kalisch)들은 추정할 뿐이다. 이 단어는 아기 모세를 나일강으로 태워보냈던 갈대 상자(출 2:3, 5)에 사용되었던 바로 그 단어였다. 아기 모세가 탄 갈대 상자나 노아의 방주가 동력이나 키를 가진 배가 아니라, 안정하게 물 위에 부유하는 오늘날의 바지선과 같은 부류의 선박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방주의 참된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창세기 6장의 방주가 알려주는 진정한 의미는 규빗단위나 배수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얘기다.

그런 과학적 결과에 집착할 필요도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방주의 참된 의미는 방주의 치수나 배수량이 아니라 오늘날 구원의 방주로서의 교회를 예표한다는 것이다(마 24: 37-39; 눅 17: 26-27).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교회의 몸이기 때문이다. 방주가 생명선인 것처럼 저주와 죽음의 길 앞에 인류는 영원한 생명선인 교회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 방주가 크든 작든, 나일강의 흔들리는 초라한 갈대상자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음으로 방주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예배당 건물이 크든 작든, 화려하든 초라하든 전혀 상관없다. 믿음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도 방주 사건이 중요함을 분명 알려주셨다. 다만 과학적 언급이 아닌 방주 사건의 구원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예수님의 마태복음(24장)과 누가복음(17장) 설교는 인류에게 과학적으로 전혀 규정할 수도 없는 방주의 규빗에 대한 규명과 집착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설교였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믿음 안에서 방주가 지니는 구원의 예표를 깨달으라는, 방주가 구원의 전형적 모형임을 명확히 말씀하신 것이다.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