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공영방송이 심층보도하는 한국교회의 실추된 모습
지난 2012년 12월 26일 공영방송인 KBS TV 오후 9시 뉴스에서 “이슈와 뉴스: 한국교회 달라져야”라는 보도가 있었다. KBS 방송이 보도했던 “세습·대형화, 일부 교회 신뢰 추락”이라는 주제의 한국교회 세습에 관한 심층보도를 들으면서 기독교 신자의 한 사람으로 자존감이 훼손되는 것을 느꼈다. 이 심층보도는 한국의 대형교회 중심으로 일고 있는 담임목사직 세습을 비판적으로 다루었고, 장자교단이라는 예장합동총회의 일그러진 모습과, 소외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본령을 도외시하는 한국대형교회 일부 목회자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2012년 12월 9일자 기독공보는 기독교윤리실천위원회가 전국 성인 1,000명을 상대로 교회의 공신력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도하였다. 천주교: 61.8%, 불교: 55.1%, 개신교: 28.1%로 나타났다. 개신교의 신인도가 가장 낮은 이유로는 1) 교회의 불투명한 재정운영 2) 담임 목사 1인체제의 교회 운영 3) 목사들의 부도덕성과 비민주성 4)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언행 불일치 5) 목회자의 자질문제 6) 무분별한 전도활동 7)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 등이다.
오늘날 기독교를 사회적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하고 초창기 기독교가 이루어 놓은 대사회적 좋은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자들은, 거의가 일반 신자들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이다. 구설수에 오른 일부 목회자들에 대하여는 이들이 교양과 자질이 부족하거나 자기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품성적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공교회의 윤리와 명예보다는 소인배의 욕심을 앞세우는 것이 아닌지 하는 비난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를 염려하여 지난해 11월 29일에는 뜻을 같이 하는 개신교 원로 목회자들이 한국기독교목회자 윤리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공영방송까지 특집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공영보도는 침체되고 있는 한국교회에 불명예를 안겨주어 사회를 향한 복음 전도를 막는 일이 되고 있다. 그 빌미는 한국기독교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1. 대형교회 대물림에 대한 사회적 비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여태까지는 주로 MBC 방송에서 대형교회 목회자의 호화판 생활과 관련하여 자주 있었다. 그런데 공영방송인 KBS까지 대형교회의 목회직 대물림 문제 등 에 대해 보도하면서 우려를 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KBS 방송은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줘 이른바 세습 1호 대형교회가 된 충현교회의 원로목사가 뒤늦게 이를 참회했던 장면을 보도하면서, 1970년대 1980년대부터 빠르게 성장해온 한국교회의 성장이 최근 정체되는 가운데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대물림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공영방송이 기독교를 폄하한다는 자기 변명보다는 그러한 충분한 원인을 제공한 한국교회 자신이 스스로를 깊이 성찰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재벌기업이 2세들에게 대물림한다고 세습경영에 대한 비판 소리가 크고 고위 관료들이 자신의 근무처에 자식들을 취직하게 하는 편법 인사에 대한 비판소리가 높으며, 더욱이 북한의 3대에 이르는 세습정권에 대한 비판소리가 높은 가운데 한국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이런 세속적 관행을 탈피하여 모범을 보여주기는커녕 이러한 세습적 관행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구설수에 이르고 비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세습이라는 관행 문제는 보편적인 사회적 양식에 속하는 문제다. 부모 불공경,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탐냄은 종교적인 죄 이전 사회적인 관습에 어긋나는 일로 법적 제재를 받기도 한다. 세습관행도 사회적 양식(良識)에 속하는 문제들이다. 목회자 대물림을 감리교가 지난 9월 총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자 교계 언론 뿐 아니라 일반사회 언론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그 후 한기총 대표회장을 배출한 왕성교회가 담임목사의 아들을 후임으로 정하며 파장이 일었고 15개교단 목회자로 구성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목회자 윤리선언문을 발표했다. 2013년 1월에는 성남성결교회가 한기총 회장을 지낸 담임목사의 아들을 후임자로 정하였다. 감리교가 세습금지를 하였으나 교단이 다른 장로교나 성결교를 비롯한 다른 한국교회가 이에 보조를 맞추지 않고 어긋나는 행동을 하니까 공영방송까지 나서서 이에 대한 비판적 경고를 해주는 것이다.
2. 교단 연합기구 선거를 둘러싼 갈등
여기다 교단 연합기구, 총회,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한국교회의 공신력에 먹칠을 하고 있다. 첫째, 한기총의 분열이다. 보수적 교단연합기구인 한기총의 대표회장 선출에 있어서 금권 선거 시비가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수습되자 대표회장의 선출에 대한 정관 개정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주요 교단의 탈퇴와 한국교회연합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한기총은 초창기 한경직 목사가 주도하여 한국교회 보수교단의 화합을 위하여 만든 기구였고 여태까지 20여년 동안 좋은 역할을 많이 했는데, 근자에 들어서 함량미달의 지도자들이 세속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주도권을 쥐고자 하다가 한기총을 불신임받도록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한교연을 만든 자들은 불가피하였다고 탈퇴 분립을 정당화하나, 한국교회를 이끈다는 지도자들이 그만한 인내심 없이 새로운 단체를 순식간에 만들고 재단 등록까지 했다는 것은 교권에 욕심이 있었지 한국교회 전체의 화합을 배려하였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극심한 부패에 빠져 들었던 서구 중세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황 니콜라스 5세(1447-55)에서, 교황 칼릭스투스 3세(145-1458), 교황 폴(1464-1471), 교황 식스투스 4세(1471-84), 교황 인노센트 8세(1484-92)에 이르는 45년간 교황의 타락은 극에 도달하였으나 교회의 분열은 없었다. 교회의 주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때가 되면 정리하시는 것이다. 지도자 개인은 왔다가 가는 연극 광대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을 못 참아 한교연을 만든 것은 납득이 안 된다. 연합기구가 연합정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분리기구를 만든 것이다.
둘째, 지난 가을 3백만 명의 신자가 소속된 국내 최대 교단인 예장 합동 총회에서 교단 대표목사 선거를 둘러싼 갈등이 빚어지는 와중에, 선출된 대표목사의 유흥업소 출입의혹이 제기됐고, 대표목사를 지지하는 총무목사가 신변을 보호하겠다며 용역을 동원한 데 이어 가스총까지 집어든 것이다. 이것이 사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종교 모임을 정치판이나 시장터로 바꾸는 목회자들이 이끄는 추락한 총회의 모습이다.
KBS 방송은 교회가 대형화를 추구하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사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부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응답이 60%를 넘었고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보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3배 가까이 됐다고 보도했다. 2011년 11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한 여론조사기관과 공동으로 1,000명의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한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우리 국민의 17.6%만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가톨릭교회 41.4%, 불교사찰 33.5%와 큰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신뢰 추락은 주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교권투쟁과 비리에 기인하고 있다.
셋째, WCC 부산대회 참여를 위한 한기총과 NCCK 사이의 노선 갈등이다. 한기총의 대표와 NCCK의 대표가 신학적 차이를 무시하고 정치적 고려로 서로 화합을 모색하다가 한기총은 근본 보수주의자들에 의하여 비판을 당하며, NCCK 대표들은 근본 진보주의자들에 의하여 에큐메니칼 정신을 타협했다고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성장 위주로 양적 팽창하는 데만 전력을 투구해왔고, 서로 간에 진실한 신학적 대화가 없었고, 다름을 인정하는 상호존중과 협력에 소홀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서로 다름을 확실히 인정하고 그 위에서 서로 공존하고 협력을 시도한다면 WCC 부산총회를 위하여 상호협력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다.
3. 교회 안에 스며든 세속주의
한국교회는 지난 130여년 동안 한국사회 속에서 제도권 종교로서 자리잡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세속화되었다. 세속주의가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과 봉사 희생 같은 가치보다는 돈 명예 권력 같은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되고 말았다. 세습하는 대형교회목사들은 재임 동안 교인들의 헌금으로써 교회의 성장과 대형화를 위하여 부동산들을 매입하고 사업체(회사, 신문사, 복지시설, 국내의 선교단체 혹은 교육기관)를 형성하여 그 자신의 이름 혹은 가족이나 친척의 이름으로 등기했거나, 법적으로 애매하게 처리하여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폐단 때문에 대체로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예장통합측 총회에서는 개교회 부동산 처분에는 제직회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고 정관을 고치고 있다.
4. 모범적 교회 사례: 높은뜻숭의교회, 분당우리교회, 높은뜻광성교회, 신반포중앙교회, 과천소망교회 등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KBS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겠다며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는 교회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사례들을 취재, 보도하고 있다. 성장제일주의와 대형화가 교회 간 경쟁을 불러왔다는 지적에 따라 외형보다 내실을 지향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높은뜻숭의교회, 분당우리교회 등은 대형교회로 성장했지만 지금도 고등학교 강당을 임대해 예배를 보고 있다. 큰 건물을 짓는 대신 장애인 등 이웃을 돕는 사역에 중점을 두었다.
예배당은 후순위의 문제로 헌금의 3분의 1을 복지재단과 지역사회 봉사 등에 쓰고 있다. 필자가 가 본 중형교회들로는 거룩한빛광성교회, 신반포중앙교회, 과천소망교회 등 우리 주위에 조용히 빛을 발하는 교회들이 결코 적지 않다. 거룩한빛광성교회는 평신도들이 주체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며 상식이 통하는 탈권위주의를 시도하는 교회이며, 신반포중앙교회는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를 공부하고 생활화하는 교회이며, 과천소망교회는 로고스센터를 통하여 지역사회에 기독교문화를 전파하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들이 있기에 한국교회는 몇 대형교회의 세습과 비리로 구설수에 오르고 비난을 받으나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목회자들은 극소수이며,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들 교회 목회자들처럼 모범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헌신적인 분들이다. 그러나 극소수가 잘못하게 되더라도 전체 한국교회가 비난과 불명예를 뒤집어 쓰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보수”라는 자칭하는 교단과 대형교회들이 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5. 한국교회는 초창기 기여한 사회의 선구자 역할을 지속해야
1) 개화기의 등대 역할
한국교회의 초창기에는 예언자적인 소명과 영성을 지닌 목회자들이 폐쇄적이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당시의 조선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운동을 일으켰다. 초창기 목회자들은 목회자이면서도 사회 계몽가들이었다. 이들은 창조적이고 희생적인 정신과 함께 개혁적인 복음능력에 사로잡힌 자들이었다. 이들 초창기 목회자들은 일제에 항거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한글 사용, 새 교육운동, 계급타파, 미신추방, 민족부채청산운동, 물산장려운동, 농촌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초창기 교회 지도자들은 억압과 고난과 어둠의 민족사를 거두어내기 위하여 수많은 학교, 신문, 잡지, 병원들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는 당시 전 인구의 1.5%에 불과한 수였으나 한국교회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유일성 신앙을 잃지 않은 채 종교화합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불교, 유교, 대종교, 동학교 등의 타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2) 민주화에 기여한 교회
1960년대에서 70년대를 거쳐 1980년 중반에 이르는 군사독재 시절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과 민주화를 주장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에 민주화와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려고 하는 정당, 개인, 지식인, 학생, 노동단체와 교회는 군사정권에 의하여 잔혹하고 압박당하고 체포되고 고문을 받고 생명을 잃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진보교회와 목회자들은 민주화와 인권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감옥에 들어가고 박해를 당하면서도 민주화와 인권을 신장하는 데 공헌을 하였다. 보수교회는 1970년대까지는 사회참여에 소극적이었다가 1908년대 들어 적극적으로 민주화와 인권신장에 참여하였다. 이는 1974년 로잔협약의 영향이 컸다. 존 스타트를 중심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사회참여를 복음화와 떼어놓을 수 없는 짝으로 강조한 것이다.
본회퍼(D. Bonhoeffer)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로 사신 것 같이 그의 몸된 교회도 이웃을 위하여 존재할 때,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보수교회 지도자들은 안타깝게도 전혀 신학적 비전도 없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단지 제도종교에서 자기 자리와 신분을 보장받는 것에 안주하고자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3)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도피처가 되어야
한국교회는 오늘날 새로운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경제환경 속에서 IMF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사회의 안전망을 요구하는 도시빈곤층, 하우스푸어, 88만원 세대 등이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정부가 이러한 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지만 교회는 정부로 하여금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신적 지도와 감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당장 어려운 노숙자들이나 안주할 곳이 없는 탈북자들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착한 일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이들을 위하여 도피처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4) 사회양심의 보루가 되어야
한국교회는 이러한 상황에 사회양심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복권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는 개교회는 교회의 운영을 먼저 투명하게 해야 한다. 교인들은 교역자들이 교회에 속한 부동산의 변동을 보고하도록 요구하고 그것을 교회의 내규로 정하고 실시해야 한다. 특히 대형교회의 회계감사(동산과 부동산과 모든 사업체들)는 교회의 감사가 아니라, 사회의 신용 있는 공적인 기관을 통하여 회계감사를 받는 것을 제도화해야 한다. 교회가 상식과 양심에 따라서 운영될 때 교회는 이 사회의 부조리와 비리를 벗어난 성역이 되며 사회양심을 지키는 보루가 된다.
맺음말: 사회적으로 이웃 섬김 없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없다
칼빈은 “십계명의 둘째 부분을 지키지 않고 모든 부정직과 폭행을 그치지 않으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할 수 없다. 이웃을 속이고 해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 폭행을 가하는 자다”(Corpus Reformatorum, 37:378)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둘째 부분을 이웃사랑으로 요약하셨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하셨다(요일5:3). 교회가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라 할 수 없고, 교회의 존재와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사회를 향해 선행의 빛을 발하는 것이 복음을 효과있게 선포하는 길이다. 한국교회여, 초창기의 교회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가자.
지난 2012년 12월 26일 공영방송인 KBS TV 오후 9시 뉴스에서 “이슈와 뉴스: 한국교회 달라져야”라는 보도가 있었다. KBS 방송이 보도했던 “세습·대형화, 일부 교회 신뢰 추락”이라는 주제의 한국교회 세습에 관한 심층보도를 들으면서 기독교 신자의 한 사람으로 자존감이 훼손되는 것을 느꼈다. 이 심층보도는 한국의 대형교회 중심으로 일고 있는 담임목사직 세습을 비판적으로 다루었고, 장자교단이라는 예장합동총회의 일그러진 모습과, 소외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본령을 도외시하는 한국대형교회 일부 목회자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2012년 12월 9일자 기독공보는 기독교윤리실천위원회가 전국 성인 1,000명을 상대로 교회의 공신력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도하였다. 천주교: 61.8%, 불교: 55.1%, 개신교: 28.1%로 나타났다. 개신교의 신인도가 가장 낮은 이유로는 1) 교회의 불투명한 재정운영 2) 담임 목사 1인체제의 교회 운영 3) 목사들의 부도덕성과 비민주성 4)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언행 불일치 5) 목회자의 자질문제 6) 무분별한 전도활동 7)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 등이다.
오늘날 기독교를 사회적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하고 초창기 기독교가 이루어 놓은 대사회적 좋은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자들은, 거의가 일반 신자들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이다. 구설수에 오른 일부 목회자들에 대하여는 이들이 교양과 자질이 부족하거나 자기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품성적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공교회의 윤리와 명예보다는 소인배의 욕심을 앞세우는 것이 아닌지 하는 비난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를 염려하여 지난해 11월 29일에는 뜻을 같이 하는 개신교 원로 목회자들이 한국기독교목회자 윤리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공영방송까지 특집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공영보도는 침체되고 있는 한국교회에 불명예를 안겨주어 사회를 향한 복음 전도를 막는 일이 되고 있다. 그 빌미는 한국기독교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1. 대형교회 대물림에 대한 사회적 비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여태까지는 주로 MBC 방송에서 대형교회 목회자의 호화판 생활과 관련하여 자주 있었다. 그런데 공영방송인 KBS까지 대형교회의 목회직 대물림 문제 등 에 대해 보도하면서 우려를 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KBS 방송은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줘 이른바 세습 1호 대형교회가 된 충현교회의 원로목사가 뒤늦게 이를 참회했던 장면을 보도하면서, 1970년대 1980년대부터 빠르게 성장해온 한국교회의 성장이 최근 정체되는 가운데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대물림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공영방송이 기독교를 폄하한다는 자기 변명보다는 그러한 충분한 원인을 제공한 한국교회 자신이 스스로를 깊이 성찰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재벌기업이 2세들에게 대물림한다고 세습경영에 대한 비판 소리가 크고 고위 관료들이 자신의 근무처에 자식들을 취직하게 하는 편법 인사에 대한 비판소리가 높으며, 더욱이 북한의 3대에 이르는 세습정권에 대한 비판소리가 높은 가운데 한국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이런 세속적 관행을 탈피하여 모범을 보여주기는커녕 이러한 세습적 관행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구설수에 이르고 비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세습이라는 관행 문제는 보편적인 사회적 양식에 속하는 문제다. 부모 불공경,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탐냄은 종교적인 죄 이전 사회적인 관습에 어긋나는 일로 법적 제재를 받기도 한다. 세습관행도 사회적 양식(良識)에 속하는 문제들이다. 목회자 대물림을 감리교가 지난 9월 총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자 교계 언론 뿐 아니라 일반사회 언론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그 후 한기총 대표회장을 배출한 왕성교회가 담임목사의 아들을 후임으로 정하며 파장이 일었고 15개교단 목회자로 구성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목회자 윤리선언문을 발표했다. 2013년 1월에는 성남성결교회가 한기총 회장을 지낸 담임목사의 아들을 후임자로 정하였다. 감리교가 세습금지를 하였으나 교단이 다른 장로교나 성결교를 비롯한 다른 한국교회가 이에 보조를 맞추지 않고 어긋나는 행동을 하니까 공영방송까지 나서서 이에 대한 비판적 경고를 해주는 것이다.
2. 교단 연합기구 선거를 둘러싼 갈등
여기다 교단 연합기구, 총회,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한국교회의 공신력에 먹칠을 하고 있다. 첫째, 한기총의 분열이다. 보수적 교단연합기구인 한기총의 대표회장 선출에 있어서 금권 선거 시비가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수습되자 대표회장의 선출에 대한 정관 개정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주요 교단의 탈퇴와 한국교회연합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한기총은 초창기 한경직 목사가 주도하여 한국교회 보수교단의 화합을 위하여 만든 기구였고 여태까지 20여년 동안 좋은 역할을 많이 했는데, 근자에 들어서 함량미달의 지도자들이 세속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주도권을 쥐고자 하다가 한기총을 불신임받도록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한교연을 만든 자들은 불가피하였다고 탈퇴 분립을 정당화하나, 한국교회를 이끈다는 지도자들이 그만한 인내심 없이 새로운 단체를 순식간에 만들고 재단 등록까지 했다는 것은 교권에 욕심이 있었지 한국교회 전체의 화합을 배려하였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극심한 부패에 빠져 들었던 서구 중세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황 니콜라스 5세(1447-55)에서, 교황 칼릭스투스 3세(145-1458), 교황 폴(1464-1471), 교황 식스투스 4세(1471-84), 교황 인노센트 8세(1484-92)에 이르는 45년간 교황의 타락은 극에 도달하였으나 교회의 분열은 없었다. 교회의 주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때가 되면 정리하시는 것이다. 지도자 개인은 왔다가 가는 연극 광대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을 못 참아 한교연을 만든 것은 납득이 안 된다. 연합기구가 연합정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분리기구를 만든 것이다.
둘째, 지난 가을 3백만 명의 신자가 소속된 국내 최대 교단인 예장 합동 총회에서 교단 대표목사 선거를 둘러싼 갈등이 빚어지는 와중에, 선출된 대표목사의 유흥업소 출입의혹이 제기됐고, 대표목사를 지지하는 총무목사가 신변을 보호하겠다며 용역을 동원한 데 이어 가스총까지 집어든 것이다. 이것이 사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종교 모임을 정치판이나 시장터로 바꾸는 목회자들이 이끄는 추락한 총회의 모습이다.
KBS 방송은 교회가 대형화를 추구하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사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부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응답이 60%를 넘었고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보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3배 가까이 됐다고 보도했다. 2011년 11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한 여론조사기관과 공동으로 1,000명의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한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우리 국민의 17.6%만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가톨릭교회 41.4%, 불교사찰 33.5%와 큰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신뢰 추락은 주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교권투쟁과 비리에 기인하고 있다.
셋째, WCC 부산대회 참여를 위한 한기총과 NCCK 사이의 노선 갈등이다. 한기총의 대표와 NCCK의 대표가 신학적 차이를 무시하고 정치적 고려로 서로 화합을 모색하다가 한기총은 근본 보수주의자들에 의하여 비판을 당하며, NCCK 대표들은 근본 진보주의자들에 의하여 에큐메니칼 정신을 타협했다고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성장 위주로 양적 팽창하는 데만 전력을 투구해왔고, 서로 간에 진실한 신학적 대화가 없었고, 다름을 인정하는 상호존중과 협력에 소홀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서로 다름을 확실히 인정하고 그 위에서 서로 공존하고 협력을 시도한다면 WCC 부산총회를 위하여 상호협력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다.
3. 교회 안에 스며든 세속주의
한국교회는 지난 130여년 동안 한국사회 속에서 제도권 종교로서 자리잡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세속화되었다. 세속주의가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과 봉사 희생 같은 가치보다는 돈 명예 권력 같은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되고 말았다. 세습하는 대형교회목사들은 재임 동안 교인들의 헌금으로써 교회의 성장과 대형화를 위하여 부동산들을 매입하고 사업체(회사, 신문사, 복지시설, 국내의 선교단체 혹은 교육기관)를 형성하여 그 자신의 이름 혹은 가족이나 친척의 이름으로 등기했거나, 법적으로 애매하게 처리하여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폐단 때문에 대체로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예장통합측 총회에서는 개교회 부동산 처분에는 제직회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고 정관을 고치고 있다.
4. 모범적 교회 사례: 높은뜻숭의교회, 분당우리교회, 높은뜻광성교회, 신반포중앙교회, 과천소망교회 등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KBS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겠다며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는 교회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사례들을 취재, 보도하고 있다. 성장제일주의와 대형화가 교회 간 경쟁을 불러왔다는 지적에 따라 외형보다 내실을 지향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높은뜻숭의교회, 분당우리교회 등은 대형교회로 성장했지만 지금도 고등학교 강당을 임대해 예배를 보고 있다. 큰 건물을 짓는 대신 장애인 등 이웃을 돕는 사역에 중점을 두었다.
예배당은 후순위의 문제로 헌금의 3분의 1을 복지재단과 지역사회 봉사 등에 쓰고 있다. 필자가 가 본 중형교회들로는 거룩한빛광성교회, 신반포중앙교회, 과천소망교회 등 우리 주위에 조용히 빛을 발하는 교회들이 결코 적지 않다. 거룩한빛광성교회는 평신도들이 주체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며 상식이 통하는 탈권위주의를 시도하는 교회이며, 신반포중앙교회는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를 공부하고 생활화하는 교회이며, 과천소망교회는 로고스센터를 통하여 지역사회에 기독교문화를 전파하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들이 있기에 한국교회는 몇 대형교회의 세습과 비리로 구설수에 오르고 비난을 받으나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목회자들은 극소수이며,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들 교회 목회자들처럼 모범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헌신적인 분들이다. 그러나 극소수가 잘못하게 되더라도 전체 한국교회가 비난과 불명예를 뒤집어 쓰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보수”라는 자칭하는 교단과 대형교회들이 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5. 한국교회는 초창기 기여한 사회의 선구자 역할을 지속해야
1) 개화기의 등대 역할
한국교회의 초창기에는 예언자적인 소명과 영성을 지닌 목회자들이 폐쇄적이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당시의 조선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운동을 일으켰다. 초창기 목회자들은 목회자이면서도 사회 계몽가들이었다. 이들은 창조적이고 희생적인 정신과 함께 개혁적인 복음능력에 사로잡힌 자들이었다. 이들 초창기 목회자들은 일제에 항거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한글 사용, 새 교육운동, 계급타파, 미신추방, 민족부채청산운동, 물산장려운동, 농촌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초창기 교회 지도자들은 억압과 고난과 어둠의 민족사를 거두어내기 위하여 수많은 학교, 신문, 잡지, 병원들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는 당시 전 인구의 1.5%에 불과한 수였으나 한국교회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유일성 신앙을 잃지 않은 채 종교화합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불교, 유교, 대종교, 동학교 등의 타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2) 민주화에 기여한 교회
1960년대에서 70년대를 거쳐 1980년 중반에 이르는 군사독재 시절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과 민주화를 주장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에 민주화와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려고 하는 정당, 개인, 지식인, 학생, 노동단체와 교회는 군사정권에 의하여 잔혹하고 압박당하고 체포되고 고문을 받고 생명을 잃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진보교회와 목회자들은 민주화와 인권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감옥에 들어가고 박해를 당하면서도 민주화와 인권을 신장하는 데 공헌을 하였다. 보수교회는 1970년대까지는 사회참여에 소극적이었다가 1908년대 들어 적극적으로 민주화와 인권신장에 참여하였다. 이는 1974년 로잔협약의 영향이 컸다. 존 스타트를 중심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사회참여를 복음화와 떼어놓을 수 없는 짝으로 강조한 것이다.
본회퍼(D. Bonhoeffer)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로 사신 것 같이 그의 몸된 교회도 이웃을 위하여 존재할 때,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보수교회 지도자들은 안타깝게도 전혀 신학적 비전도 없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단지 제도종교에서 자기 자리와 신분을 보장받는 것에 안주하고자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3)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도피처가 되어야
한국교회는 오늘날 새로운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경제환경 속에서 IMF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사회의 안전망을 요구하는 도시빈곤층, 하우스푸어, 88만원 세대 등이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정부가 이러한 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지만 교회는 정부로 하여금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신적 지도와 감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당장 어려운 노숙자들이나 안주할 곳이 없는 탈북자들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착한 일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이들을 위하여 도피처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4) 사회양심의 보루가 되어야
한국교회는 이러한 상황에 사회양심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복권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는 개교회는 교회의 운영을 먼저 투명하게 해야 한다. 교인들은 교역자들이 교회에 속한 부동산의 변동을 보고하도록 요구하고 그것을 교회의 내규로 정하고 실시해야 한다. 특히 대형교회의 회계감사(동산과 부동산과 모든 사업체들)는 교회의 감사가 아니라, 사회의 신용 있는 공적인 기관을 통하여 회계감사를 받는 것을 제도화해야 한다. 교회가 상식과 양심에 따라서 운영될 때 교회는 이 사회의 부조리와 비리를 벗어난 성역이 되며 사회양심을 지키는 보루가 된다.
맺음말: 사회적으로 이웃 섬김 없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없다
칼빈은 “십계명의 둘째 부분을 지키지 않고 모든 부정직과 폭행을 그치지 않으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할 수 없다. 이웃을 속이고 해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 폭행을 가하는 자다”(Corpus Reformatorum, 37:378)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둘째 부분을 이웃사랑으로 요약하셨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하셨다(요일5:3). 교회가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라 할 수 없고, 교회의 존재와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사회를 향해 선행의 빛을 발하는 것이 복음을 효과있게 선포하는 길이다. 한국교회여, 초창기의 교회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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