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그 때에 세상은 평화가 없었다. 정복자 로마제국의 말발굽과 전차의 수레아래 피 정복지의 식민들은 고통가운데 신음할 수 밖에 없었다. 고율의 세금과 그들 종교의 강압적 숭배요구는 사람들에게서 웃음을 앗아갔고 뿐아니라 동족사이도 오손도손의 공동체가 무너져 버려 살기가 감도는 그런 형편이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가는 곳마다 훈풍을 이 삭막한 세계에 불어 넣으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 기사회생하여 훈훈한 열기들을 이곳 저곳에서 발산하기 시작하였다. 냉냉하고 칼칼하고 징징대던 공동체가 살아났던 것이다. 생기를 찾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온기가 전해지고 성령의 훈풍은 소용돌이로 팔레스타인을 뒤 흔들었던 것이다. 사회에서 격리되고 소외되어 냉대받던 병자와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덮여지고 그리고 2천년 교회사는 이 훈풍이 세상의 냉기를 계속 몰아내는 영적기류임을 입증하고 있다.

오늘날은 전세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냉기가 지구촌 각곳에서 감돌고 있다. 냉전시대 보다 더 차가운 인간군들이 모여살고 있는 이 세상에 다시 온기를 불어 넣을 세력은 훈훈한 그리스도인들 외에는 없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아래서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거나 재벌 운영 마켓 한 둘을 털어 가난한자에게 나누어주는 신종 로빈훗이 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망해버린 리만 브라더스나 눈치보면서 여전히 부의 창출과 그 독점을 시도하는 골드만 삭스뒤에는 여전히 세상을 얼어붙게하는 냉각기류들을 생산하는 거대세력들이 있다. 결국 공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갈 태세이다. 그러나 결코 이는 짱돌이나, 죽창이나 화염병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어떤 분이 햇볕정책을 거론하였지만 사람이 변하고 공동체가 변하지 않는 햇볕정책은 무용지물이다. 우리는 그 씁쓸한 결과를 한반도에서 되풀이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슨 거대한 운동으로 번져가기를 계획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속한 작은 공동체를 훈훈함으로 채우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다. 훈훈 그리스도인 이것이 해결의 실마리이다. 훈훈하다라는 말은 '날씨나 온도가 견디기 좋을 만큼 덥다. 혹은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주는 따스함이 있다.' 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이 풀어져서 다른 사람들의 얼음과 같은 마음들을 녹여주는 따스함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질것이다. 지난 2일 워싱턴교협이 주관한 제 11회 성탄 축하음악 예배야 말로 이 훈훈함을 번지게 한 아름다운 모임이었다. 임원들이 보여준 간결하고 축소된 진행솜씨는 전 프로그램을 통하여 이 훈훈함이 상승기류가 되어 예배장소를 가득메우고 여운이 되어 청중들 주위를 맴돌게 하고, 장장 세시간의 공연이 쉼 없이 계속되었지만 사람들로 자리를 뜨지 않게 하였다. 어린아이에서 할머니들까지 그들에게서 풍겨진 온화한 미소들은 오랫동안 참석자들의 마음속에 새겨질 것이며 그것은 또다른 훈풍의 재생산을 가저오게 될것이다. 훈훈신드롬의 생산지는 바로 교회일수 밖에 없는 이유가 예수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