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 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우리 민족이 일제 암흑시대에 나라를 잃은 슬픔을, 그리고 그 울분을 달래던 노래다. 이 봉선화로 손톱에 예쁜 물을 들여 아름다움을 뽐냈던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봉선화가 토해 내던 그 붉은 한을 삯이며 102명의 우리 이민선조들이 미국적의 증기선 갤릭호에 몸을 싣고 저 망망대해 태평양의 거센 파도를 헤쳐 낯선 이국땅, 아메리카의 하와이 섬에 첫 발을 디딘 그 감격적인 역사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 110년 전인 1903년 1월 13일이었다.
미국인들의 눈에 비친 봉선화의 민족, 한인 이민들의 대미기여도가 사상 그 유례가 없는 긍정적 모범이 인정되어 연방상하원은 8년 전 공동결의문을 채택하고 이 날을 “미주 한인의 날"로 선포했다. 미주한인재단-워싱턴은 이 뜻 깊은 모멘트를 기리기 위해 새해 1월 13일 오후 5시 노바 대학에서 "미주 한인의 날" 축전행사를 거행한다.
우리이민 선조들이 화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뿌린 피와 땀, 눈물, 그리고 도전과 희생정신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 이곳 미주 땅에 250만에 달하는 코리언-아메리칸을 배출했다. 이 같은 도약은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결실이고 자랑이다. 이들이 1902년 12월22일 제물포에서 미국의 증기선 갤릭 호에 승선할 때는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의 요충지에 위치한 조선 오백 년의 사직이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등 열강의 요동과 한반도 침탈 각축이 고조되면서 파선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조선 땅 대한제국은 계속된 기근과 관리들의 수탈로 대부분의 백성들이 아사 직전이었으며, 이들은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노예생활이라도 서슴지 않을 만큼 절박한 사정에 처했었다. 이 같은 참담한 상황에서 초기 이민자들의 이민 목적은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사실 이들 한인이민 초기 개척자들을 맞은 노동조건과 현실은 노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열악한 상태였으며, 따라서 이들의 삶은 첨예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의 중노동으로 받는 일당이 고작 70센트였다. 한달 월급이 15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갖은 고난을 감내했다. 밟아도 죽지 않고 다시 돋아나는 시골 길 민들레처럼 끈질긴 생명력, 바로 그 것이 한인의 미국 이민사에 성공을 장식한 원동력이었다. 이들은 우리의 조국이 일제의 말발굽에 밟혀 마치 세찬 폭풍에 할퀸 가냘픈 봉선화처럼 쓰러졌을 때 박봉의 30퍼센트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하여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채권을 매입했다. 이들이 1920년대까지 헌납한 액수는 200만 달러,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3억불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이러한 조국애, 인내와 끈기, 그리고 협동정신이 우리 민족이 미국, 아니 세계의 도처에서 발전하는 한인 커뮤니티를 축성(築城)해 가고 있는 “앙팡 떼리블(Infins Terrible)"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조국은 동란의 폐허를 딛고 눈부신 경제 발전을 거듭하여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되었고, 인류의 평화와 공영에 기여하는 나라로 성장, 발전하고 있다.
영국의 청교도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천지에 진출한 지 282년 후에 이 땅을 밟은 봉선화의 후예 우리 한인들이 정치적 대립, 경제적 위기, 도덕의 추락, 정부 재정의 “절벽”으로 파선의 도전을 받고 있는 미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는 제 2의 뉴프론티어의 기수가 되는 꿈을 꾸어본다.
[이은애 칼럼]미국에 핀 봉선화
미주한인재단-워싱턴 이은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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