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 오랫만에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 온 Grace 와 함께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을 뮤지컬 영화화한 레미제라불(불쌍한 사람들)을 관람하였습니다. 19세기 전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여전히 비참한 민중의 삶을 배경으로 엮어지는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이야기들을 감동적으로 전해주는 훌륭한 뮤지컬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전편을 통하여 그 사랑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사랑이라는 메세지를 잔잔히 전해주는 것 같아 또한 기뻤습니다. 이미 이 영화는 놀라운 흥행률을 보인다고 하는데 부디 이 영화를 통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마음을 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영화에 대한 평론가운데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관객들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모으는 <레미제라블>의 힘은 무엇일까?” 물론 그 평론가는 몇가지 이유를 대었습니다.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청순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정, 레미제라불, 즉 비참하고 불쌍하게 버려지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쟝발쟝을 비롯한 출연진들이 보여주는 숭고한 사랑이 가장 압도적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제 자신도 그 영화를 본 이후, 참된 사랑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숭고한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잔인한 살인과 비참한 전쟁이 만연한 지구촌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위대한 용서와 참된 사랑을 배우고싶어 한다는 사실을 이 영화의 높은 흥행률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은망덕하게도 자신을 돌봐준 신부님의 은접시를 훔치고 달아난 쟝발쟝이 경찰에 붙들려 왔을 때, 경찰들에게 그 접시는 내가 그에게 준 것이라 말하며 왜 은촛대는 안 가지고 갔는가 하며 경찰 앞에서 은촛대를 선뜻 내어주는 신부님의 숭고한 모습은 얼마나 우리를 사로잡습니까? 그 위대한 사랑 앞에서, 굶고 있는 조카를 위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19년 감옥살이를 하다 가석방 상태로 떠돌아다니는 쟝발장의 상하고 찢겨진 마음은 드디어 무너져 내립니다. “내가 오늘 너를 샀다.” 라는 짤막한 신부님의 멘트속에서 십자가 구속의 사랑을 깨닫고, 쟝발장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마음의 억울함과 아픔을 다 쏟아낸 후, 드디어 새 사람이 되어 자신도 그렇게 비참하고 불쌍한 인생들을 위하여 살아갈 것을 결단합니다. 그러다 죽어가는 창녀의 사생아, 코세트를 헌신적 사랑으로 돌보며 키우는데, 후에 학생혁명에 앞장선 코세트의 연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도 혁명에 가담하여 결국은 총탄에 맞은 그를 구해내고 자신은 병들어 죽게 됩니다. 쟝발쟝은 또한 자신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원수와도 같은 인물의 생명을 구하면서 용서의 위대한 정신을 그에게 가르칩니다. 쟝발장의 이같은 이타적 사랑은 주변의 여러 인물들을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하여 용서가 용서를 낳고 사랑이 사랑을 낳는 아름다운 사랑의 원자탄이 지속적으로 터지는 감격이 이 영화 전편에 흘러내립니다.
어떤 평론가가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메시지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것. 자신보다 못한 비참한 자들을 자비로 돌보라는 것. 막달라 마리아 같은 창녀에게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정들을 저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돌보고 용서하라는 것. 그러한 예수의 구원의 메시지가 육중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장발장을 통해 구현된다.“ 맞습니다. 이 영화의 에센스는 예수님 구원의 메세지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모든 출연진들은 민중의 노래, 미래의 소리라 불리우는 “내일은 오리라” 를 합창하는데, 이 노래는 인류의 궁국적 희망을 노래합니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듯, 우리에게 예수님 구원의 사랑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의 내일은 오고 있습니다. 이제 2012년이 저물어 갑니다, 주님은 이 영화를 통하여 한 해동안 전쟁과 분열과 가난과 죽음의 소식들에 절망하는 모든 지구촌 인생들에게, 성탄절을 전후하고, 새 해를 맞이하기 직전,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시며 위대한 초청을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 나아가 갈보리 사랑의 주님 앞에 나의 인생을 맡기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소망의 새해가 밝아올 것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평론가운데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관객들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모으는 <레미제라블>의 힘은 무엇일까?” 물론 그 평론가는 몇가지 이유를 대었습니다.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청순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정, 레미제라불, 즉 비참하고 불쌍하게 버려지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쟝발쟝을 비롯한 출연진들이 보여주는 숭고한 사랑이 가장 압도적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제 자신도 그 영화를 본 이후, 참된 사랑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숭고한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잔인한 살인과 비참한 전쟁이 만연한 지구촌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위대한 용서와 참된 사랑을 배우고싶어 한다는 사실을 이 영화의 높은 흥행률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은망덕하게도 자신을 돌봐준 신부님의 은접시를 훔치고 달아난 쟝발쟝이 경찰에 붙들려 왔을 때, 경찰들에게 그 접시는 내가 그에게 준 것이라 말하며 왜 은촛대는 안 가지고 갔는가 하며 경찰 앞에서 은촛대를 선뜻 내어주는 신부님의 숭고한 모습은 얼마나 우리를 사로잡습니까? 그 위대한 사랑 앞에서, 굶고 있는 조카를 위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19년 감옥살이를 하다 가석방 상태로 떠돌아다니는 쟝발장의 상하고 찢겨진 마음은 드디어 무너져 내립니다. “내가 오늘 너를 샀다.” 라는 짤막한 신부님의 멘트속에서 십자가 구속의 사랑을 깨닫고, 쟝발장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마음의 억울함과 아픔을 다 쏟아낸 후, 드디어 새 사람이 되어 자신도 그렇게 비참하고 불쌍한 인생들을 위하여 살아갈 것을 결단합니다. 그러다 죽어가는 창녀의 사생아, 코세트를 헌신적 사랑으로 돌보며 키우는데, 후에 학생혁명에 앞장선 코세트의 연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도 혁명에 가담하여 결국은 총탄에 맞은 그를 구해내고 자신은 병들어 죽게 됩니다. 쟝발쟝은 또한 자신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원수와도 같은 인물의 생명을 구하면서 용서의 위대한 정신을 그에게 가르칩니다. 쟝발장의 이같은 이타적 사랑은 주변의 여러 인물들을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하여 용서가 용서를 낳고 사랑이 사랑을 낳는 아름다운 사랑의 원자탄이 지속적으로 터지는 감격이 이 영화 전편에 흘러내립니다.
어떤 평론가가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메시지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것. 자신보다 못한 비참한 자들을 자비로 돌보라는 것. 막달라 마리아 같은 창녀에게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정들을 저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돌보고 용서하라는 것. 그러한 예수의 구원의 메시지가 육중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장발장을 통해 구현된다.“ 맞습니다. 이 영화의 에센스는 예수님 구원의 메세지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모든 출연진들은 민중의 노래, 미래의 소리라 불리우는 “내일은 오리라” 를 합창하는데, 이 노래는 인류의 궁국적 희망을 노래합니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듯, 우리에게 예수님 구원의 사랑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의 내일은 오고 있습니다. 이제 2012년이 저물어 갑니다, 주님은 이 영화를 통하여 한 해동안 전쟁과 분열과 가난과 죽음의 소식들에 절망하는 모든 지구촌 인생들에게, 성탄절을 전후하고, 새 해를 맞이하기 직전,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시며 위대한 초청을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 나아가 갈보리 사랑의 주님 앞에 나의 인생을 맡기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소망의 새해가 밝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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