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쓰다만 치약과 같다. 뭔가 훨씬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은 새것으로 바꾸고 싶은데, 버리려고 생각하니 아깝기도 하고 짜다 보면 계속 나와서 쓰레기통에 들어갈 처지를 겨우 면한다. 다 쓴 치약과 같이 12월도 빨리 지나서 내년이 되어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막상 남은 한 장의 달력을 찢어버리고 새로운 달력을 달기가 쉽지 않다.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뒤돌아보면 언제나 남는 것은 후회와 아쉬움뿐이다. 연말을 한두 번 맞아본 것도 아닌데, 매번 연애하다 실패한 사람처럼 거울에 비친 모습이 해가 갈 수록 초라하기만 하다. 이제는 미래에 대한 꿈보다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텨내나 하는 것이 훨씬 더 절실한 문제가 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봐도 늘 유리 벽에 부딪힌다. 그때 조금만 더 경제적인 여력이 있었으면, 그런 선택을 하지만 않았다면 혹은 했으면 하고 후회해 보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다.

우리는 실패와 좌절의 기억을 숨기려고 12월 31일이 다 가기도 전에 새 달력을 걸어놓고, 달력 속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잘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새해가 되면 지금보다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은 긁어보지 않은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다. 인생역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만 잘 해봐야 본전이고 십중팔구 기대가 무너질 것이다. 누가 복권에 당첨됐다더라는 소문처럼 성공은 우리 주위 너머의 먼 이야기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런 복권 같은 새해를 기다린다면 결과는 '인생여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며칠 남지 않은 날 동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뭘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인가? 그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좀 더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이다. 어려운 말로 하면 '자아 성찰'이다.
우리의 맨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그 누구보다 우리 자신에게 고통이다. 우리의 얼굴 속에, 삶 속에 가슴 아픈 일들과 회한들이 거울에 비친 모습에 그대로 드러나있다.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그러나 바둑을 두는 사람이 대국 후에 복기를 하지 않으면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달력 찢어버리는 것으로 과거를 잊으려고 하는 사람도 역시 훌륭한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런 막연한 기대만을 하는 사람은 내년에도 긁어보나 마나 한 꽝이다.

지나온 일 년의 삶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가족과 모두 모여 함께 식사한 때가 몇 번이나 되는가? 무엇이 나를 그렇게 바쁘게 만들었는가? 그것이 정말 중요한 일들이었을까? 내게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 주어졌더라면 나는 그 시간을 정말 잘 활용할 수 있었을까? 12월이 가기 전에 내 앞에 커피 한잔과 빈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고 물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달력의 잃어버린 한 장을 찾아보자. 마음을 열고 우리가 쉽게, 그리고 나태하게, 무의미하게 보냈던 시간이 모여 만들어내는 눈에 보이지 않는 13월을 찾아보자. 지나간 안타까운 시간이 허공으로 사라지기 전에, 자기들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달라고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어보자.

우리는 이제껏 아쉬움을 애써 잊어버리고 매번 12월 다음 1월을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13월을 살아보자. 우리는 매년 인생의 경주에서 한 번이라도 끝까지 우리를 하얗게 불태워 본 적이 있는가? 매번 부정 출발한 선수처럼 몇 걸음 달리다 말고 다시 출발선에서 새로운 신호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는 다시 출발선 앞이 아니라 결승선 앞에 서보자.

다가오는 1월을 시작하는 달이 아니라, 모든 것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는 13월이라고 생각하자. 우리가 새해 달력의 1자 옆에 마음의 3자를 그려넣어 13월을 만든다면 우리의 모습은 훨씬 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이제껏 바라보며 기대만 해 왔던 인생의 결승선 테이프를 13월에 끊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