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성도님들로부터 많이 듣는 말이, 자아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아니, 자아를 죽이려고 애를 쓰지만 그놈의 자아가 죽지를 않는다고 좌절하기도 하고, 하소연을 하기도 합니다. 나의 못된 자아를 죽이는 것이 기독교의 영성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거라 생각하기에 그렇게 열심히도 자아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겠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의 자아는 내 손으로는 죽일 수가 없습니다. 내 손으로 죽을 정도의 그런 별볼일 없는 자아라면 애초에 죄가 들어와 유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그렇게 강하고 끈질기고 또한 죄에 물들어 악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공부 좀 했다고 하는 그 지식으로, 내가 도를 좀 터득했다고 하는 그 깨달음으로, 내가 믿기 시작했다고 하는 그 믿음으로, 나의 자아를 죽겠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어찌보면 참 무모한 것입니다.
자아를 죽이기 위해서 공부하고 도를 닦고 하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행동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게해서 약간의 유익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자아는 내 손에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자아를 죽인다는 말을 교회 안에서는 여러가지 말로 표현합니다. 자신을 낮춘다고도 하고요, 자신을 비운다고도 하고요, 자기를 부정한다고도 하고요 – 표현은 다양하지만 결국 자기자신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의 자아를 죽였다고 하는 사람 보셨나요? 혹시라도 자신은 자아를 죽였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만함에 있어서 올림픽 금메달 감이겠지요?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죽일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다 하여도, 그렇게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좀 더 나은 사람(?), 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겠느냐고?
글쎄요!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영성이 그런 영성인가요? 죽지도 않는 자기의 자아를 죽이기 위해서 – 고행도 하고, 수련도 하고?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낮아짐, 성경이 말하는 자기 비움,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정은 – 죽지 않는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아를 죽여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자아를 죽여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아를 죽여서 자신을 비우는데 있어서 남들보다 월등히 앞선 사람들을 보면 –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인간 말종이었는데, 예수 믿고 사람이 참 겸손해졌다고 – 그런 말을 듣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혹시라도 월등한 노력과 훈련으로 자아를 죽여 그런 겸손에 도달한 것이라면, 어느 순간 자신의 힘으로는 자아를 죽일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더 이상 겸손할 수 없는 그래서 자신의 본색을 다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맞이할 것입니다.
정말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인 줄로 알았는데 –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의 감정을 쏟아내는 경우가 있잖아요?
왜 그래요? 눌러 죽이고 또 죽였지만, 우리의 자아가 그런 식으로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겸손함을 성경은 “꾸며낸 겸손” 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2:18)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겸손, 참된 낮아짐, 참된 자기부정, 참된 자기 비움은 – 내 힘으로 나를 죽여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눈을 떠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봄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옆 사람을 보십시오!
혹시 예수를 믿는 자라면, 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비록 지금 이 땅에서는 나보다 못해서, 돈도 나보다 없고, 지식도 나보다 못하고, 힘과 권력도 나보다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업신여기고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믿지 않는 자라면 비록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우습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을 위해서 내 삶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고, 눈을 떼지 못하시고, 어떻게 해서든지 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노심초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음을 쏟고 있는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우습게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영성은 –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눈이 뜨여지기만 하면, 더 이상 나를 죽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애를 써서 나를 죽이려고, 저 사람을 업신여기고 우습게 여기려고 하는 그 마음을 죽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만 하면, 그래서 그 세계 즉 하나님의 눈으로 펼쳐지는 그 세계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 이상 나를 죽일 것이 아니요, 내게 주어진 그 세계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옆 사람을 보세요! 남편을 보고, 아내를 보세요!
누구입니까? 아직도 원수입니까?
눈을 뜨고 시선을 십자가에 고정하십시오. 내가 사랑하지 못해서 자꾸 우습게 여기고, 때로는 미워하고, 때로는 죽이고 싶은 저 사람을 향해서 눈물 흘리고 계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서 2:3)
창세기에서 유다가 그랬지요, 나보다 며느리 다말이 낫다고! 나보다 아내가 낫다고, 나보다 남편이 낫다고, 나보다 당신이 낫다고 하는 그 마음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의 자아는 내 손으로는 죽일 수가 없습니다. 내 손으로 죽을 정도의 그런 별볼일 없는 자아라면 애초에 죄가 들어와 유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그렇게 강하고 끈질기고 또한 죄에 물들어 악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공부 좀 했다고 하는 그 지식으로, 내가 도를 좀 터득했다고 하는 그 깨달음으로, 내가 믿기 시작했다고 하는 그 믿음으로, 나의 자아를 죽겠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어찌보면 참 무모한 것입니다.
자아를 죽이기 위해서 공부하고 도를 닦고 하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행동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게해서 약간의 유익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자아는 내 손에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자아를 죽인다는 말을 교회 안에서는 여러가지 말로 표현합니다. 자신을 낮춘다고도 하고요, 자신을 비운다고도 하고요, 자기를 부정한다고도 하고요 – 표현은 다양하지만 결국 자기자신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의 자아를 죽였다고 하는 사람 보셨나요? 혹시라도 자신은 자아를 죽였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만함에 있어서 올림픽 금메달 감이겠지요?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죽일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다 하여도, 그렇게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좀 더 나은 사람(?), 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겠느냐고?
글쎄요!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영성이 그런 영성인가요? 죽지도 않는 자기의 자아를 죽이기 위해서 – 고행도 하고, 수련도 하고?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낮아짐, 성경이 말하는 자기 비움,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정은 – 죽지 않는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아를 죽여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자아를 죽여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아를 죽여서 자신을 비우는데 있어서 남들보다 월등히 앞선 사람들을 보면 –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인간 말종이었는데, 예수 믿고 사람이 참 겸손해졌다고 – 그런 말을 듣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혹시라도 월등한 노력과 훈련으로 자아를 죽여 그런 겸손에 도달한 것이라면, 어느 순간 자신의 힘으로는 자아를 죽일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더 이상 겸손할 수 없는 그래서 자신의 본색을 다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맞이할 것입니다.
정말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인 줄로 알았는데 –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의 감정을 쏟아내는 경우가 있잖아요?
왜 그래요? 눌러 죽이고 또 죽였지만, 우리의 자아가 그런 식으로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겸손함을 성경은 “꾸며낸 겸손” 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2:18)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겸손, 참된 낮아짐, 참된 자기부정, 참된 자기 비움은 – 내 힘으로 나를 죽여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눈을 떠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봄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옆 사람을 보십시오!
혹시 예수를 믿는 자라면, 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비록 지금 이 땅에서는 나보다 못해서, 돈도 나보다 없고, 지식도 나보다 못하고, 힘과 권력도 나보다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업신여기고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믿지 않는 자라면 비록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우습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을 위해서 내 삶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고, 눈을 떼지 못하시고, 어떻게 해서든지 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노심초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음을 쏟고 있는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우습게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영성은 –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눈이 뜨여지기만 하면, 더 이상 나를 죽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애를 써서 나를 죽이려고, 저 사람을 업신여기고 우습게 여기려고 하는 그 마음을 죽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만 하면, 그래서 그 세계 즉 하나님의 눈으로 펼쳐지는 그 세계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 이상 나를 죽일 것이 아니요, 내게 주어진 그 세계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옆 사람을 보세요! 남편을 보고, 아내를 보세요!
누구입니까? 아직도 원수입니까?
눈을 뜨고 시선을 십자가에 고정하십시오. 내가 사랑하지 못해서 자꾸 우습게 여기고, 때로는 미워하고, 때로는 죽이고 싶은 저 사람을 향해서 눈물 흘리고 계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서 2:3)
창세기에서 유다가 그랬지요, 나보다 며느리 다말이 낫다고! 나보다 아내가 낫다고, 나보다 남편이 낫다고, 나보다 당신이 낫다고 하는 그 마음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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