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교회가 구원받은 백성들을 돌보고, 은혜받고 축복받아 살도록 설교하고 관리하는 일에 목회적 관심이 집중되어왔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이해와 성경에 대한 깊이가 그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행동한다고 하였다. 지난날에는 그 정도의 수준에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을 빌어주는 수준의 교회의 기본적인 사역과 역할에 만족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신학적 지식의 넓이가 커짐에 따라 이해의 폭이 확장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가 단순한 자기 백성들의 보호와 은혜의 요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교회는 존재 그 자체로 세상과 지역과 사회에 복이 된다. 그 사회의 등불이고 희망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역할에 따라 그렇게 될 수 있다. 교회가 자기들의 종교적인 안식처로 머문다면 소금이 맛을 잃은 것처럼 교회의 역할도 무능하여 존재 의미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다음과 같은 일에 교회가 더욱 더 분명하게 방향을 잡으면 더욱 존재감이 견고해질 것이라 생각하여 몇 가지 고민을 나눈다.
1. 현대교회는 책임 있는 설교를 통하여 인생들에게 삶의 비전을 제시하여야 한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세상 사람들에 의하여 난도질당하고 있는 것을 본다. 한편으로 매우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목회자의 관점이지만, 세상의 요구는 매우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원하고 있음을 동시에 보게 된다.
목사의 설교가, 수백 수천의 대중을 향하여 외치는 내용이, 편협하고 너무나 종교적이고 세상이 이해 못할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큰 착각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들의 설교 속에 인종차별을 이야기한다고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 어떤 설교는 반공주의 설교를 통하여 편협한 의식을 주입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 성향의 설교들이다.
어떤 설교는 주절거리는 것으로 매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주제도 없고 내용도 부족하고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핵심도 없는 경우라든가, 성경이 말하는 내용도 모른 채 본문만 읽고 다른 곳에 가서 놀다 끝나는 경우라든가, 지극히 사실(fact)만 말하다가 역사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여 오늘의 나와는 거리가 먼 종교적인 이야기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니, 본질을 망각한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말은 많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용이 없어 잔소리에 불과한 것들이 많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하여 생명력을 전달하여야 한다.
2. 오늘의 교회는 한국사회의 좌표를 설정하고 제시하여야 한다.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역사 속에 무속과 불교와 유교가 한국 민족의 정신세계를 수천 년간 지배하여왔다. 오늘 한국 개신교 120년의 역사 속에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탁월한 성장을 이룬 것은 교회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을 부정할 지식인은 없을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하여야 하는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목회자의 비전이다. 혼란한 사회일수록 교회를 향한 이러한 요구는 더욱 더 강해진다.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책임을 망각하고 그 힘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책임 있는 사역과 의식을 가지고 내게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할 이유는 무너진 역사를 바로세워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삶의 비전과 물질주의 타파, 바른 가치관, 생명에 대한 존중, 가족 공동체 이해, 기독교적 세계관, 국가관, 바른 정치관, 문화에 대한 이해 등 등 거대한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바르게 지도할 것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3. 오늘의 한국교회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야 생명 있는 삶을 살듯이, 우물 안의 교회를 벗어나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부유한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제왕적인 삶을 산다는 이야기는 세간의 뉴스가 되어 있다. 사회가 민주화되다 보니 이러한 사실들이 베일에서 벗겨지고 있는데, 이것이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 되고 있다.
사실 오늘의 교회들이 너무나 배불렀다는 생각이 든다. 다 그런 것이 아니지만, 자기 살 지우기에 급급하고 지나치게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 있다. 교회 생활이 이제는 상향평준화되어 있다. 우리가 축복을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끼니 걱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주변의 이야기인데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교회가 한국 사회봉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알지만 소극적이고 의무적이 아닌가? 그러니까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고령화 사회, 겨울로 접어들면서 독거노인의 삶을 한 구역이나 목장에서 책임지는 것은 어떤가? 이러한 방법으로, 오늘의 교회가 더욱 더 근검절약을 이야기 하고 낭비를 줄이는 운동을 벌여나가 세상을 감싸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비싼 지역에 한 주간 내내 교회 문 닫아 놓고 낭비하고 있는 공간도 세상을 위해 활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통일 한국과 세상을 향하여 기도하며 준비하는 것은, 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는가 고민한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모스크바 선교사)
Lee7095@gmail.com
오늘의 교회는 신학적 지식의 넓이가 커짐에 따라 이해의 폭이 확장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가 단순한 자기 백성들의 보호와 은혜의 요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교회는 존재 그 자체로 세상과 지역과 사회에 복이 된다. 그 사회의 등불이고 희망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역할에 따라 그렇게 될 수 있다. 교회가 자기들의 종교적인 안식처로 머문다면 소금이 맛을 잃은 것처럼 교회의 역할도 무능하여 존재 의미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다음과 같은 일에 교회가 더욱 더 분명하게 방향을 잡으면 더욱 존재감이 견고해질 것이라 생각하여 몇 가지 고민을 나눈다.
1. 현대교회는 책임 있는 설교를 통하여 인생들에게 삶의 비전을 제시하여야 한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세상 사람들에 의하여 난도질당하고 있는 것을 본다. 한편으로 매우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목회자의 관점이지만, 세상의 요구는 매우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원하고 있음을 동시에 보게 된다.
목사의 설교가, 수백 수천의 대중을 향하여 외치는 내용이, 편협하고 너무나 종교적이고 세상이 이해 못할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큰 착각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들의 설교 속에 인종차별을 이야기한다고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 어떤 설교는 반공주의 설교를 통하여 편협한 의식을 주입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 성향의 설교들이다.
어떤 설교는 주절거리는 것으로 매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주제도 없고 내용도 부족하고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핵심도 없는 경우라든가, 성경이 말하는 내용도 모른 채 본문만 읽고 다른 곳에 가서 놀다 끝나는 경우라든가, 지극히 사실(fact)만 말하다가 역사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여 오늘의 나와는 거리가 먼 종교적인 이야기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니, 본질을 망각한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말은 많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용이 없어 잔소리에 불과한 것들이 많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하여 생명력을 전달하여야 한다.
2. 오늘의 교회는 한국사회의 좌표를 설정하고 제시하여야 한다.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역사 속에 무속과 불교와 유교가 한국 민족의 정신세계를 수천 년간 지배하여왔다. 오늘 한국 개신교 120년의 역사 속에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탁월한 성장을 이룬 것은 교회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을 부정할 지식인은 없을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하여야 하는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목회자의 비전이다. 혼란한 사회일수록 교회를 향한 이러한 요구는 더욱 더 강해진다.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책임을 망각하고 그 힘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책임 있는 사역과 의식을 가지고 내게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할 이유는 무너진 역사를 바로세워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삶의 비전과 물질주의 타파, 바른 가치관, 생명에 대한 존중, 가족 공동체 이해, 기독교적 세계관, 국가관, 바른 정치관, 문화에 대한 이해 등 등 거대한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바르게 지도할 것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3. 오늘의 한국교회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야 생명 있는 삶을 살듯이, 우물 안의 교회를 벗어나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부유한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제왕적인 삶을 산다는 이야기는 세간의 뉴스가 되어 있다. 사회가 민주화되다 보니 이러한 사실들이 베일에서 벗겨지고 있는데, 이것이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 되고 있다.
사실 오늘의 교회들이 너무나 배불렀다는 생각이 든다. 다 그런 것이 아니지만, 자기 살 지우기에 급급하고 지나치게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 있다. 교회 생활이 이제는 상향평준화되어 있다. 우리가 축복을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끼니 걱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주변의 이야기인데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교회가 한국 사회봉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알지만 소극적이고 의무적이 아닌가? 그러니까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고령화 사회, 겨울로 접어들면서 독거노인의 삶을 한 구역이나 목장에서 책임지는 것은 어떤가? 이러한 방법으로, 오늘의 교회가 더욱 더 근검절약을 이야기 하고 낭비를 줄이는 운동을 벌여나가 세상을 감싸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비싼 지역에 한 주간 내내 교회 문 닫아 놓고 낭비하고 있는 공간도 세상을 위해 활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통일 한국과 세상을 향하여 기도하며 준비하는 것은, 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는가 고민한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모스크바 선교사)
Lee7095@gmail.com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