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원성현 박사가 로앤처치(http://lawnchurch.com/)에 기고한 글이다. 원 박사는 연세대를 전과목 만점으로 수석 졸업했으며, 부산장신대, 장로회 신학원, 연세대 철학과를 거쳐 연세대 교회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편집자 주
서구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판별의 역사와 향후 전망(1)
-프로파간다(Propaganda), 솔리다리티(Solidarity), 똘레랑스(Tolerance), 디스꾸르(Discourse) 차원에서
1. 들어가는 말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있어 비정통 이단신앙과 운동의 선두주자는 에비온파를 포함한 유대주의 기독교 이단이었고, 현행 포스트모던 시대를 관통해 달리는 주자는 신종교문화운동인 뉴에이지운동과 현대 신혼합주의 종교인 신종교운동으로 대변된다. 물론 전자는 후자에 예속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선두 및 현행 주자들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이단종파 운동들이 생성, 소멸,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정통 기독교(원시 초대교회, 중세 로마가톨릭교회, 근세 종교개혁파, 근대 정통파 등)의 한결같은 그들에 관한 태도는 철저한 응징이었다. 파문이나 사형으로 일관한 것이다. 물론 초대교회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는 이단문제로 죽음에까지 내몰지는 않았다. 그 속에서 때로는 시기나 사안별로 관용을 베풀었던 적도 있었고, 그리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분파들은 세계 오지로 나가 선교(프로파간다)에 힘쓰기도 했다. 특히 네스토리우스파나 단성론자들 같은 교리적 이단분파들은 중앙아시아 등지로 내몰렸지만, 선교의 첨단 역할을 하기도 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중국 당나라 시대에 경교라 불리며 중국 일부를 기독교화하기도 했다.
초대교회 때 신론 문제로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중심의 동방교회(그리스정교회 곧 비잔틴교회)와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로마가톨릭교회)가 서로를 정죄했고, 둘은 결국 분리되고 말았다. 소위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되며, 본질에 있어서도 성부와 다르다는 주장―과 ‘삼위일체론’의 대립으로 지금까지 두 교회는 갈라져 왔다. 서방교회의 탄핵에 맞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외치며 완전히 분리 독립해 나갔고 서로를 파문했다.
루터(독일), 쯔빙글리(쮜리히), 깔뱅(제네바) 등이 대표하는 종교개혁교회는 동서방 교회 모두가 초대교회 전통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신의 정통성을 예수운동, 사도운동 등과 연계하여 찾았다. 게다가 초대교회 이단운동파들, 중세 이후 이단 및 신비주의 운동, 종교개혁기 급진파인 재세례파운동, 근대 이후 신흥종교적 이단운동들 등이 합세하여 지금 세계는 일약 종교 분파들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다. 여기다 세계 종교인 불교와 이슬람, 힌두교 등 여타 종교들로부터 파생한 새로운 신종교운동파들이 가세하여 현행 세계 종교계와 특히 기독교계의 혼란과 난맥상은 가히 역사상 최고조에 달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빚어낸 양극화현상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문화현상에 기인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종교와 문화들이 혼합되어 있는 포스트모던 리얼리티 하에서, 현대 기독교와 교회는 이제 타자에 대해 어떤 자세를 지녀야만 할 것인가 하는 이슈와 아젠다가 큰 숙제로 떠오르고 있다. 기존 신학계는 종류에 관계없이 비기독교적인 타자들을 일률적으로 이단, 사이비, 신종교 등으로 정죄해 왔다. 특히 중세 로마가톨릭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대의 개혁파는 모든 타자적 운동들을 파문하고 정죄하고 있다. 심지어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를 이단시하는 극단적인 개혁파도 있다.
담론의 질서와 타자철학을 최우선시하는 이러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과연 그러한 배타주의적 경향을 취하는 자세가 옳은 태도인가? 또 어떤 현대의 급진적 개혁파는 타종교와 다른 집단에 너무나도 개방적인 상대주의적 다원주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 정통 개혁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를 피력하고 제시하기 위해 이 글은 초대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단 판별 역사를 탐구하고, 거기서 취득한 장단점으로 향후 취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이는 기독교 절대 절명의 지상 최후명령인 선교(프로파간다)와 연대적 형제사랑(솔리다리티),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정신(망딸리떼)인 관용의 정신(똘레랑스)과 다른 점을 확인하는 담론의 형성(디스꾸르) 등을 모두 함축하는 대안이 될 것이다. 돌파구 찾기를 거부하고 시대의 망딸리떼를 따르지 않는 종교는 세상으로부터 똘레랑스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초대교회 시대: 파문과 선교(Propaganda; missio)
(1) 초대교회 전기의 교회이단
유대주의 이단이었던 에비온파는 유대교 사상에 입각해 마태복음을 제외한 모든 신약성서를 부정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를 예언자 중 1인으로 여겼다. 유대파 기독교는 바울 중심의 헬라파 기독교와 다투면서 율법과 할례준수를 구원의 관건으로 삼기도 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를 강력히 성토했다.
초대교회 대표적 대형 이단이었던 영지주의 기독교는 헬라철학, 유대교, 기독교 등을 혼합한 전통적 혼합주의 종교였다. 그들은 구원의 열쇠인 비밀지식(gnosis)을 가져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영지주의의 대표격인 도마복음은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연원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영적 혼인합일의 길을 아는 지식을 ‘깨닫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최초로 기독교에 자력종교, 각성종교라는 다른 길을 제시했다. 물론 영지주의 기독교는 선한 하나님 사상에 기인하여 악한 물질을 창조한 창조주 구약신앙을 배격했다. 구원의 비밀지식(비의), 믿음과 행위의 합작 등으로 받는 구원은 신비적 영적 체험과 여행을 통해 가능하며, 오직 구원비의의 전승을 배타독점적으로 전수받아 이를 깨달은 자만이 신인합일의 신비적 혼인체험(bridal chamber)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계급구원설이었으며, 이는 향후 제도화된 로마가톨릭의 성속구별설에 큰 영향을 준다.
마르시온주의 역시 초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이단들 중의 하나였다. 이단 대부였던 시몬 마구스의 제자 케르돈은 마르시온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케르돈은 시리아의 영지주의자였으므로 마르시온에게는 영지주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었다. 케르돈은 선신과 악신 등 이원론적 두 신을 주장했고, 신구약의 통일성을 거부하면서 가현설을 주창했다. 마르시온은 이를 그대로 수용하여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과 몸의 실재를 부인했다. 그는 누가복음을 제외한 모든 복음서를 거부했고, 바울서신만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나름의 마르시온 정경을 창출했던 것이다. 그 역시 완전인과 보통인으로 사람들을 나누어, 전자만이 극단적인 금욕을 통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5세기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전수시켰다.
몬타누스주의는 성령의 새로운 시대를 주창한 초대교회의 대표적 이단이었다. 그들은 영적 황홀감(엑스터시)을 체험하는 것을 성령의 계시라 여겼다. 금욕(결혼금지), 급박한 종말론과 종말의 날 예언, 환상주의 신앙 등에 빠진 이들의 신앙은 5세기까지 아프리카 등지에 존속했고, 소아시아 프리기아에서는 더 오래 존속했으나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이와 같은 유대주의,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 등 초대교회 4대 이단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정상적 구원론을 배격했고, 구원을 받을 자들을 배타적으로 독점하여 정통교회에서 너무 멀리 이탈했다. 따라서 정통 초대교회는 저들과의 똘레랑스와 솔리다리티를 할 여지가 너무나도 희박해졌다.
(2) 초대교회 후기의 교리이단
영지주의는 비기독교 종교철학이었고, 마르시온주의와 몬타누스주의는 초기 기독교에서 떨어져나간 분파적 이단운동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교회이단들로서 정통교회 밖으로 뛰쳐나간 집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논하는 후기의 교리이단은 정통교회가 정죄하여 파문한 이단파였기 때문에 그들 역시 후대의 교회사가들에 의해 기독교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단일신론이나 단성론을 추종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 노력했던 점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물론 이는 이성과 이해의 측면에서 그러했고, 신앙과는 무관했다. 그들은 영지주의나 마르시온주의가 주창했던 이원론적 신관(선신과 악신)을 극복하려던 동기에서 단일군주신론을 전개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언급했다. “어디에서도 유래되지 않은 온전한 신성은 오직 유일하게 ‘신성의 원천’인 성부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신적이고, 비록 유래된 것이긴 하지만 신성의 모든 특징들을 소유하고 있다. 피조물들의 세계와는 구별되는 그들은 성부와 협동하고 성부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적인 생명을 전달해준다.” 이는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을 가장 미약하게 주장한 말로, 결국 그는 종속론의 대부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대부였던 오리게네스의 이러한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은, 그보다 더 강력한 형태인 사모사타의 바울이 주장한 ‘양자론적 단일군주신론’과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단일군주신론’ 혹은 ‘양식론적 단일군주신론’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양자론적 단일군주신론(adoptionism)은 역동적 단일군주신론(dynamic monarchism)으로도 부른다. 로마의 테오도투스는 “예수는 세례시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았던 ‘단순한 인간(psilos anthropos)’”이라고 선포했다. 하르낙은 그를 ‘이단자로 규정된 최초의 기독교인’이라 언급했다.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은 이적을 거부하는 합리주의 계열의 양자론을 적극 인정했고, 주후 2-3세기의 양자론자들이야말로 참된 비평가라고 주장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완전한 참 하나님과 완전한 참 인간’이라는 두 슬로건을 주창한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양자론을 당대의 역사 무대에서 끌어내려 버렸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었다” 라는 양자론의 현대 추종자들이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들이었다. 19세기 초, 알브레흐트 리츨은 예수를 가장 완벽한 임무를 자각한 인물로 보았고, 슐라이에르마허는 예수를 가장 고상한 하나님의 의식을 지닌 인간으로 여겼다. 20세기 초 존 로빈슨은 예수를 하나님에게 완벽하게 정직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으로 보았다.
초기의 원시 양자론적 견해는 3세기 말 사모사타의 바울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전개돼 다시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했다. 그는 예수가 단순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본 초기 양자론자들과는 달리 예수를 하나님이라 불렀고, 예수의 도덕적 완전성과 수세시 받은 이적적 능력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으로 268년 안디옥 지역 노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됐다. 그는 안디옥의 루키안과 그의 제자 아리우스 같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후기 교회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양자론은 5세기가 지나자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근대 자유주의 신학에서 다시 꽃피우게 되었다.
성부·성자·성령 등 삼위를, 한 하나님의 다른 양식으로 봤던 양태론
양태론적 단일군주신론(modalistic monarchism)은 성부, 성자, 성령 등 삼위를 한 하나님의 다른 양태 혹은 양식으로 보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풀려고 했다. 그들에게는 성자가 비록 하나님의 신성과는 다르며 어떤 신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양자론자들에게 있어 성자는 실제적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양자로 입양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양태론’, 곧 ‘양식론(modalism)’은 당시 정통이라 자처했던 자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지녔던 신학적 오류였다. 이는 하나님의 한 분이심을 유지하면서 삼위일체에 대해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양자론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희생시키면서 신성을 지닌 성부의 신격성의 단일성을 보존했지만, 양태론은 성자와 성령의 위격을 포기하면서 신격의 단일성을 보존하려 했다.
양태론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주장했지만, 그 둘을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으로는 보지 않았다. 양태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다른 시대에 다른 양태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곧 창조 시에는 성부, 율법을 줄 때는 성자, 그리고 성자의 승천 후에는 성령 등 다른 모양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이는 성자와 성령의 두 위격을 포기하는 전형적인 합리주의적 설명 형태였다. 이를 따르면 성자는 가현적으로 인간의 몸을 지니며(성자의 위격이 없기 때문, 즉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위격이 없기 때문에 신성과 인성을 겸비할 수 없음), 성부수난설에 직면하게 된다(성부의 위격만 있고 성자, 성령의 위격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는 바로 성부 그 자신이라는 귀결).
최초의 양태론자는 헌신적인 신자였던 소아시아 출신의 프락세아스였다. 그는 박해자 앞에서 신앙을 고백한 용감한 신자(confessor)였다. 그는 새로운 계시를 주창한 몬타누스주의자들을 반대했다.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는 당시, 성부는 세상 모든 것보다 너무나 높이 계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알 수 없으며 형언할 수도 없다고 가르쳤다(불가지론). 그리스도를 하찮은 ‘에온’이라 말하는 영지주의나 단순히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양자론에 반하여, 프락세아스는 성자 스스로가 성부였다고 가르쳐 영지주의와 양자론을 일거에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락세아스가 성자가 성부였다, 그 성부가 시간 속에 태어났다는 주장 등을 시도하자 테르툴리아누스의 <프락세아스 반박>은 이를 강력히 응징 대처했다. 영지주의의 신 불가지론, 양자론의 예수 신성 부인 등은 정통설에 의해 기각되었으나, 그러한 설들과 가장 반대의 극단에 서 있었던 성자 예수 신성의 긍정설이었던 양태론은 성부와 성자 일체론, 즉 성부와 성자의 각 위격을 부인함으로써 정통설을 역공한 것이다.
로마에서 프락세아스를 이은 노에투스는 성부 자신이 고통을 받아 죽었으며, 스스로 부활했다고 가르쳤다. 노에투스는 양자론의 회의적 견해에 대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하려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이들을 이어받은 로마의 사벨리우스는 신격의 엄중한 단일성을 강조했다. 곧 ‘한 위격, 세 이름들’이라 가르쳤다. 세 이름들은 단지 계시의 다른 형태들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그는 성자의 존재를 지상적 사역으로 제한했다.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삼위의 위격을 구별하지 못했으나,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여 후기 정통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 곧 아리우스주의는 성자의 입양됨을 통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부의 신성만을 드러내었던 사모사타의 바울의 양자론, 성자의 신성을 인정했으나 성부의 신성 속에 그것을 함몰시켰던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등을 공박했다. 아리우스주의는 영원히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비록 성부보다는 하위이나 초자연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갈망했다. 즉 그들은 비록 신성에 있어 성부보다는 열등하지만, 양자론 및 양태론과는 달리 성자의 독립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곧 그들은 성자의 열등한 신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성부 하위에 둔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을 주창했다. 이는 성자의 신성 자체를 부인한 양자론과 신성을 지닌 성자를 성부 속에 함몰시켰던 양태론을 극복하는 길이었지만, 역시 열등한 신성의 성자를 만들어 그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곧 성자는 세계의 창조 이전 창조된 피조물로서 시간적 기원을 지녔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반신적(semi-divine) 존재에 불과했다. 이러한 아리우스파의 사상은 16세기에 세르베투스에 의해 되살아나기도 했다.
4세기 말에 이르러 성부, 성자, 성령 등 삼위는 각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한 분이심이 완전히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더 이상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신적 성자이신 두 번째 위격이 역사적 인간 존재, 곧 나사렛 인간 예수와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태초에 계셨던 로고스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성육신 역시 삼위일체와 같이 신비로운 문제였기에, 다양한 주장들이 속출했다.
이에 대한 답변이었던 451년의 칼케돈 신조는 영지주의파나 아리우스파와는 달리, 정통교회 내에 머물러 있던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성자의 육체성을 거부했던 영지주의적 가현설과의 옹골찬 투쟁은 예수가 외형적 인간이 아니라 실제적 인간, 곧 완전한 참 인간(vere homo)임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성자의 신성이 한 위격이신 성자 내에서 어떻게 인성과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었다. 영원하며 선재하신 성자 그리스도와 역사적이며 개인적인 인간 예수가 연합되는 것이 바로 정통교리였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4세기 말 그리스도 신성의 의미를 최초로 부각시켰는데, 곧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다. 그 이후 500여년 이상 이에 관한 보다 세밀한 수정작업이 네스토리우스주의, 유티케스주의, 단성론, 모네르기즘, 단의론(단일의지론) 등의 이름으로 수행됐다. 알렉산드리아학파는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되신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등을 상술하려고 했다. 이는 다시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공식으로 변개됐다. 완전한 하나님으로 선재하시는 성자가 예수의 인성으로 변모했고, 그 인성이 신성화j됐다는 것이다. 성육신 때 로고스가 인성을 취했고, 그것이 신성으로 격상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인성은 사라지게 됐다. 안디옥학파는 그에 반대하여 역사적 예수의 인성을 고수하게 되었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388년 추방당할 때까지 동방교회에서 계속 꽃을 피우고 있었다 <계속>.
서구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판별의 역사와 향후 전망(1)
-프로파간다(Propaganda), 솔리다리티(Solidarity), 똘레랑스(Tolerance), 디스꾸르(Discourse) 차원에서
1. 들어가는 말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있어 비정통 이단신앙과 운동의 선두주자는 에비온파를 포함한 유대주의 기독교 이단이었고, 현행 포스트모던 시대를 관통해 달리는 주자는 신종교문화운동인 뉴에이지운동과 현대 신혼합주의 종교인 신종교운동으로 대변된다. 물론 전자는 후자에 예속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선두 및 현행 주자들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이단종파 운동들이 생성, 소멸,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정통 기독교(원시 초대교회, 중세 로마가톨릭교회, 근세 종교개혁파, 근대 정통파 등)의 한결같은 그들에 관한 태도는 철저한 응징이었다. 파문이나 사형으로 일관한 것이다. 물론 초대교회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는 이단문제로 죽음에까지 내몰지는 않았다. 그 속에서 때로는 시기나 사안별로 관용을 베풀었던 적도 있었고, 그리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분파들은 세계 오지로 나가 선교(프로파간다)에 힘쓰기도 했다. 특히 네스토리우스파나 단성론자들 같은 교리적 이단분파들은 중앙아시아 등지로 내몰렸지만, 선교의 첨단 역할을 하기도 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중국 당나라 시대에 경교라 불리며 중국 일부를 기독교화하기도 했다.
초대교회 때 신론 문제로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중심의 동방교회(그리스정교회 곧 비잔틴교회)와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로마가톨릭교회)가 서로를 정죄했고, 둘은 결국 분리되고 말았다. 소위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되며, 본질에 있어서도 성부와 다르다는 주장―과 ‘삼위일체론’의 대립으로 지금까지 두 교회는 갈라져 왔다. 서방교회의 탄핵에 맞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외치며 완전히 분리 독립해 나갔고 서로를 파문했다.
루터(독일), 쯔빙글리(쮜리히), 깔뱅(제네바) 등이 대표하는 종교개혁교회는 동서방 교회 모두가 초대교회 전통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신의 정통성을 예수운동, 사도운동 등과 연계하여 찾았다. 게다가 초대교회 이단운동파들, 중세 이후 이단 및 신비주의 운동, 종교개혁기 급진파인 재세례파운동, 근대 이후 신흥종교적 이단운동들 등이 합세하여 지금 세계는 일약 종교 분파들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다. 여기다 세계 종교인 불교와 이슬람, 힌두교 등 여타 종교들로부터 파생한 새로운 신종교운동파들이 가세하여 현행 세계 종교계와 특히 기독교계의 혼란과 난맥상은 가히 역사상 최고조에 달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빚어낸 양극화현상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문화현상에 기인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종교와 문화들이 혼합되어 있는 포스트모던 리얼리티 하에서, 현대 기독교와 교회는 이제 타자에 대해 어떤 자세를 지녀야만 할 것인가 하는 이슈와 아젠다가 큰 숙제로 떠오르고 있다. 기존 신학계는 종류에 관계없이 비기독교적인 타자들을 일률적으로 이단, 사이비, 신종교 등으로 정죄해 왔다. 특히 중세 로마가톨릭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대의 개혁파는 모든 타자적 운동들을 파문하고 정죄하고 있다. 심지어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를 이단시하는 극단적인 개혁파도 있다.
담론의 질서와 타자철학을 최우선시하는 이러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과연 그러한 배타주의적 경향을 취하는 자세가 옳은 태도인가? 또 어떤 현대의 급진적 개혁파는 타종교와 다른 집단에 너무나도 개방적인 상대주의적 다원주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 정통 개혁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를 피력하고 제시하기 위해 이 글은 초대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단 판별 역사를 탐구하고, 거기서 취득한 장단점으로 향후 취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이는 기독교 절대 절명의 지상 최후명령인 선교(프로파간다)와 연대적 형제사랑(솔리다리티),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정신(망딸리떼)인 관용의 정신(똘레랑스)과 다른 점을 확인하는 담론의 형성(디스꾸르) 등을 모두 함축하는 대안이 될 것이다. 돌파구 찾기를 거부하고 시대의 망딸리떼를 따르지 않는 종교는 세상으로부터 똘레랑스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초대교회 시대: 파문과 선교(Propaganda; missio)
(1) 초대교회 전기의 교회이단
유대주의 이단이었던 에비온파는 유대교 사상에 입각해 마태복음을 제외한 모든 신약성서를 부정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를 예언자 중 1인으로 여겼다. 유대파 기독교는 바울 중심의 헬라파 기독교와 다투면서 율법과 할례준수를 구원의 관건으로 삼기도 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를 강력히 성토했다.
초대교회 대표적 대형 이단이었던 영지주의 기독교는 헬라철학, 유대교, 기독교 등을 혼합한 전통적 혼합주의 종교였다. 그들은 구원의 열쇠인 비밀지식(gnosis)을 가져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영지주의의 대표격인 도마복음은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연원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영적 혼인합일의 길을 아는 지식을 ‘깨닫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최초로 기독교에 자력종교, 각성종교라는 다른 길을 제시했다. 물론 영지주의 기독교는 선한 하나님 사상에 기인하여 악한 물질을 창조한 창조주 구약신앙을 배격했다. 구원의 비밀지식(비의), 믿음과 행위의 합작 등으로 받는 구원은 신비적 영적 체험과 여행을 통해 가능하며, 오직 구원비의의 전승을 배타독점적으로 전수받아 이를 깨달은 자만이 신인합일의 신비적 혼인체험(bridal chamber)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계급구원설이었으며, 이는 향후 제도화된 로마가톨릭의 성속구별설에 큰 영향을 준다.
마르시온주의 역시 초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이단들 중의 하나였다. 이단 대부였던 시몬 마구스의 제자 케르돈은 마르시온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케르돈은 시리아의 영지주의자였으므로 마르시온에게는 영지주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었다. 케르돈은 선신과 악신 등 이원론적 두 신을 주장했고, 신구약의 통일성을 거부하면서 가현설을 주창했다. 마르시온은 이를 그대로 수용하여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과 몸의 실재를 부인했다. 그는 누가복음을 제외한 모든 복음서를 거부했고, 바울서신만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나름의 마르시온 정경을 창출했던 것이다. 그 역시 완전인과 보통인으로 사람들을 나누어, 전자만이 극단적인 금욕을 통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5세기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전수시켰다.
몬타누스주의는 성령의 새로운 시대를 주창한 초대교회의 대표적 이단이었다. 그들은 영적 황홀감(엑스터시)을 체험하는 것을 성령의 계시라 여겼다. 금욕(결혼금지), 급박한 종말론과 종말의 날 예언, 환상주의 신앙 등에 빠진 이들의 신앙은 5세기까지 아프리카 등지에 존속했고, 소아시아 프리기아에서는 더 오래 존속했으나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이와 같은 유대주의,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 등 초대교회 4대 이단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정상적 구원론을 배격했고, 구원을 받을 자들을 배타적으로 독점하여 정통교회에서 너무 멀리 이탈했다. 따라서 정통 초대교회는 저들과의 똘레랑스와 솔리다리티를 할 여지가 너무나도 희박해졌다.
(2) 초대교회 후기의 교리이단
영지주의는 비기독교 종교철학이었고, 마르시온주의와 몬타누스주의는 초기 기독교에서 떨어져나간 분파적 이단운동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교회이단들로서 정통교회 밖으로 뛰쳐나간 집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논하는 후기의 교리이단은 정통교회가 정죄하여 파문한 이단파였기 때문에 그들 역시 후대의 교회사가들에 의해 기독교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단일신론이나 단성론을 추종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 노력했던 점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물론 이는 이성과 이해의 측면에서 그러했고, 신앙과는 무관했다. 그들은 영지주의나 마르시온주의가 주창했던 이원론적 신관(선신과 악신)을 극복하려던 동기에서 단일군주신론을 전개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언급했다. “어디에서도 유래되지 않은 온전한 신성은 오직 유일하게 ‘신성의 원천’인 성부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신적이고, 비록 유래된 것이긴 하지만 신성의 모든 특징들을 소유하고 있다. 피조물들의 세계와는 구별되는 그들은 성부와 협동하고 성부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적인 생명을 전달해준다.” 이는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을 가장 미약하게 주장한 말로, 결국 그는 종속론의 대부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대부였던 오리게네스의 이러한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은, 그보다 더 강력한 형태인 사모사타의 바울이 주장한 ‘양자론적 단일군주신론’과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단일군주신론’ 혹은 ‘양식론적 단일군주신론’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양자론적 단일군주신론(adoptionism)은 역동적 단일군주신론(dynamic monarchism)으로도 부른다. 로마의 테오도투스는 “예수는 세례시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았던 ‘단순한 인간(psilos anthropos)’”이라고 선포했다. 하르낙은 그를 ‘이단자로 규정된 최초의 기독교인’이라 언급했다.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은 이적을 거부하는 합리주의 계열의 양자론을 적극 인정했고, 주후 2-3세기의 양자론자들이야말로 참된 비평가라고 주장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완전한 참 하나님과 완전한 참 인간’이라는 두 슬로건을 주창한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양자론을 당대의 역사 무대에서 끌어내려 버렸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었다” 라는 양자론의 현대 추종자들이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들이었다. 19세기 초, 알브레흐트 리츨은 예수를 가장 완벽한 임무를 자각한 인물로 보았고, 슐라이에르마허는 예수를 가장 고상한 하나님의 의식을 지닌 인간으로 여겼다. 20세기 초 존 로빈슨은 예수를 하나님에게 완벽하게 정직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으로 보았다.
초기의 원시 양자론적 견해는 3세기 말 사모사타의 바울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전개돼 다시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했다. 그는 예수가 단순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본 초기 양자론자들과는 달리 예수를 하나님이라 불렀고, 예수의 도덕적 완전성과 수세시 받은 이적적 능력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으로 268년 안디옥 지역 노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됐다. 그는 안디옥의 루키안과 그의 제자 아리우스 같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후기 교회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양자론은 5세기가 지나자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근대 자유주의 신학에서 다시 꽃피우게 되었다.
성부·성자·성령 등 삼위를, 한 하나님의 다른 양식으로 봤던 양태론
양태론적 단일군주신론(modalistic monarchism)은 성부, 성자, 성령 등 삼위를 한 하나님의 다른 양태 혹은 양식으로 보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풀려고 했다. 그들에게는 성자가 비록 하나님의 신성과는 다르며 어떤 신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양자론자들에게 있어 성자는 실제적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양자로 입양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양태론’, 곧 ‘양식론(modalism)’은 당시 정통이라 자처했던 자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지녔던 신학적 오류였다. 이는 하나님의 한 분이심을 유지하면서 삼위일체에 대해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양자론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희생시키면서 신성을 지닌 성부의 신격성의 단일성을 보존했지만, 양태론은 성자와 성령의 위격을 포기하면서 신격의 단일성을 보존하려 했다.
양태론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주장했지만, 그 둘을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으로는 보지 않았다. 양태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다른 시대에 다른 양태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곧 창조 시에는 성부, 율법을 줄 때는 성자, 그리고 성자의 승천 후에는 성령 등 다른 모양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이는 성자와 성령의 두 위격을 포기하는 전형적인 합리주의적 설명 형태였다. 이를 따르면 성자는 가현적으로 인간의 몸을 지니며(성자의 위격이 없기 때문, 즉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위격이 없기 때문에 신성과 인성을 겸비할 수 없음), 성부수난설에 직면하게 된다(성부의 위격만 있고 성자, 성령의 위격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는 바로 성부 그 자신이라는 귀결).
최초의 양태론자는 헌신적인 신자였던 소아시아 출신의 프락세아스였다. 그는 박해자 앞에서 신앙을 고백한 용감한 신자(confessor)였다. 그는 새로운 계시를 주창한 몬타누스주의자들을 반대했다.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는 당시, 성부는 세상 모든 것보다 너무나 높이 계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알 수 없으며 형언할 수도 없다고 가르쳤다(불가지론). 그리스도를 하찮은 ‘에온’이라 말하는 영지주의나 단순히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양자론에 반하여, 프락세아스는 성자 스스로가 성부였다고 가르쳐 영지주의와 양자론을 일거에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락세아스가 성자가 성부였다, 그 성부가 시간 속에 태어났다는 주장 등을 시도하자 테르툴리아누스의 <프락세아스 반박>은 이를 강력히 응징 대처했다. 영지주의의 신 불가지론, 양자론의 예수 신성 부인 등은 정통설에 의해 기각되었으나, 그러한 설들과 가장 반대의 극단에 서 있었던 성자 예수 신성의 긍정설이었던 양태론은 성부와 성자 일체론, 즉 성부와 성자의 각 위격을 부인함으로써 정통설을 역공한 것이다.
로마에서 프락세아스를 이은 노에투스는 성부 자신이 고통을 받아 죽었으며, 스스로 부활했다고 가르쳤다. 노에투스는 양자론의 회의적 견해에 대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하려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이들을 이어받은 로마의 사벨리우스는 신격의 엄중한 단일성을 강조했다. 곧 ‘한 위격, 세 이름들’이라 가르쳤다. 세 이름들은 단지 계시의 다른 형태들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그는 성자의 존재를 지상적 사역으로 제한했다.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삼위의 위격을 구별하지 못했으나,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여 후기 정통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 곧 아리우스주의는 성자의 입양됨을 통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부의 신성만을 드러내었던 사모사타의 바울의 양자론, 성자의 신성을 인정했으나 성부의 신성 속에 그것을 함몰시켰던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등을 공박했다. 아리우스주의는 영원히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비록 성부보다는 하위이나 초자연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갈망했다. 즉 그들은 비록 신성에 있어 성부보다는 열등하지만, 양자론 및 양태론과는 달리 성자의 독립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곧 그들은 성자의 열등한 신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성부 하위에 둔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을 주창했다. 이는 성자의 신성 자체를 부인한 양자론과 신성을 지닌 성자를 성부 속에 함몰시켰던 양태론을 극복하는 길이었지만, 역시 열등한 신성의 성자를 만들어 그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곧 성자는 세계의 창조 이전 창조된 피조물로서 시간적 기원을 지녔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반신적(semi-divine) 존재에 불과했다. 이러한 아리우스파의 사상은 16세기에 세르베투스에 의해 되살아나기도 했다.
4세기 말에 이르러 성부, 성자, 성령 등 삼위는 각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한 분이심이 완전히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더 이상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신적 성자이신 두 번째 위격이 역사적 인간 존재, 곧 나사렛 인간 예수와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태초에 계셨던 로고스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성육신 역시 삼위일체와 같이 신비로운 문제였기에, 다양한 주장들이 속출했다.
이에 대한 답변이었던 451년의 칼케돈 신조는 영지주의파나 아리우스파와는 달리, 정통교회 내에 머물러 있던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성자의 육체성을 거부했던 영지주의적 가현설과의 옹골찬 투쟁은 예수가 외형적 인간이 아니라 실제적 인간, 곧 완전한 참 인간(vere homo)임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성자의 신성이 한 위격이신 성자 내에서 어떻게 인성과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었다. 영원하며 선재하신 성자 그리스도와 역사적이며 개인적인 인간 예수가 연합되는 것이 바로 정통교리였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4세기 말 그리스도 신성의 의미를 최초로 부각시켰는데, 곧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다. 그 이후 500여년 이상 이에 관한 보다 세밀한 수정작업이 네스토리우스주의, 유티케스주의, 단성론, 모네르기즘, 단의론(단일의지론) 등의 이름으로 수행됐다. 알렉산드리아학파는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되신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등을 상술하려고 했다. 이는 다시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공식으로 변개됐다. 완전한 하나님으로 선재하시는 성자가 예수의 인성으로 변모했고, 그 인성이 신성화j됐다는 것이다. 성육신 때 로고스가 인성을 취했고, 그것이 신성으로 격상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인성은 사라지게 됐다. 안디옥학파는 그에 반대하여 역사적 예수의 인성을 고수하게 되었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388년 추방당할 때까지 동방교회에서 계속 꽃을 피우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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