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창출하시고 주관하시는 절대자가 계시는데 그 절대자의 계획에 따르는 앞날에 있을 일들을 미리 알게 해 주신 것이 예언입니다. 예언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이 우주와 만물을 주관하시며 그 가운데 속한 ‘나’라는 존재까지도 하나님이 영원한 신적 작정이라고 하는 역사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져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고 기대가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역사하시는 절대주권을 인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 역사 속에 태어나서 살아온 오늘의 내가 앞으로 겪게 되는 것들도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계획하시고 엮어 가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식언(한번 입 밖에 낸 말을 도로 입 속에 넣는다는 뜻으로, 약속한 말대로 지키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이 내게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살펴봐야겠고 앞으로 어떻게 주변역사가 엮어져 갈 것인가 하는 것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훗날 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언 성취의 과정에서 영생복락이라는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겠기 때문에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예언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사실을 다시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벧전3:16)”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와 지구역사, 우리나라와 우리들의 형편을 어떻게 엮어 가실지에 대해 살피고, 그 뜻을 알아차리고 대비하면서 살아가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택하시고 불러주시고 진리와 성령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소망을 기대할 수 있게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극진히 사랑하시던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살고 있는 베다니 동네에서 있었던 기적을 두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나누는 말들입니다.
본문 전의 내용은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셨는데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으니 마리아와 마르다가 걱정이 되어 예수님께 자기 오빠를 고쳐달라고 기별하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을 그곳에 더 머무신 후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불만스레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어 있으니 깨우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잠들어 있으면 깨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다시금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신다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심성이 약하셔서 만일 베다니에 계시고 나사로가 앓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실 것 같으면 예수님이 죽지 못하도록 고쳐 살리실 마음이 예수님 자신에게도 그럴 소지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그가 죽음으로 부활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예시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생각은 제자들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뜻을 조금 알듯 하면서도 여전히 분명하게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사로가 죽었고 그를 살려내기 위해 베다니로 가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약간 빈정대는 말투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우리가 가다가 돌에 맞아 죽더라도 우리도 예수님이 살려주실 것이 아니냐는 뜻에서 하는 말투였습니다.
예수님이 며칠이 걸려 베다니로 오셨는데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 가서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말은 진작에 오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텐데 왜 이제사 오셨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라도 마르다가 바로 알고 진짜로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빠가 살아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르다의 믿음으로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아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했습니다. 구원 얻은 영혼이 반드시 생명의 부활을 할 줄 믿는다는 마르다의 말에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은 마지막 때가 아니고 바로 지금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훗날로 포인트를 맞추고 현실의 부활을 부인하고 있는 마르다가 안타까워 요한복음 11:25-26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마르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했습니다. 훗날로 맞추었던 신앙이 바로 현실의 가능성 있는 부활믿음으로 예수님이 조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러 오셨다는 믿음으로 부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원망과 불평으로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부활생기가 믿어지는 믿음으로 그 심령을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의 생기를 힘입은 것 같은 마음으로 산등성이 집으로 올라가서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예수님께로 가서 언니 마르다와 똑같은 식의 원망을 했습니다.
그들 자매의 신앙의 한계는 죽기 전에는 어떤 병이든지 치유할 수 있는 예수님이지만 죽은 후에는 예수님도 속수무책인 것으로 그 능력을 제한하는 잘못된 신앙관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와 그를 따라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우는 것은 예수님이 시간을 맞춰 오셨다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이고 또 다른 시각에서는 죽음 자체가 슬프고 절망적인 것이라 울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은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하고 또 한 사람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고 하는 말들을 예수님이 들으시고 다시금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은 그토록 싫어하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는 죽을 일만 재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사로가 있는 그곳에 가셔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하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시니 삼베로 수족을 동인 채로 나사로가 나오니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로 그 집은 엄청난 복을 받은 것이며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했던 많은 친구들과 예수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이 일로 인해 분개하며 이를 가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세칭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 바리새인, 대제사장들,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권이 실추되면 육신의 생계가 위태로움을 느끼게 되면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늘어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마태복음 11:21에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베푸시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어져서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종교지도자들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고 따르려는 자들을 막고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적그리스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무리들이 예수님의 복음 확장의 역사를 시기 질투하여 훼방하려고 모의를 했습니다. 이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고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였는데 핑계거리로 내세운 주장이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했습니다.
그런데 그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갑자기 하는 말이 자신은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는 듯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하면서 책망하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가야바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자기들을 따르고 섬기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리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죽여야 한다는 입장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가야바가 생각할 때 예수님의 무리가 늘어나서 온 국민이 대동단결하게 되면 로마가 반란을 일으키는 무리로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엄청난 백성의 희생이 따를 것을 우려한다는 식으로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하나만 잡아 죽이면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흩어질 것이고, 로마인들이 자기들을 죽이러 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 말이었는데, 반대로 성령이 시켜서 한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똑같은 말이었지만 그 말의 영적 입장으로의 해석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말은 가야바가 한 것이지만 그 말을 하게 하신 것은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서 진리로 선언한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택해 놓으신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 얻게 될 숫자가 많아지는데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에 흩어진 무리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게 될 희생의 속죄양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성령은 가야바의 입술을 통하여 그렇게 말하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성령의 하게 하신 말인 줄 모르고 예수님을 믿어 살지 못했듯 우리가 말씀은 전하기 쉬워도 전하는 말처럼 믿어 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교인입니다. 그러나 늘 교인인 채로 살아가면 안 되고 회개하여 성령을 받아 성도(그리스도인=예수님의 사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식언(한번 입 밖에 낸 말을 도로 입 속에 넣는다는 뜻으로, 약속한 말대로 지키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이 내게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살펴봐야겠고 앞으로 어떻게 주변역사가 엮어져 갈 것인가 하는 것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훗날 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언 성취의 과정에서 영생복락이라는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겠기 때문에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예언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사실을 다시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벧전3:16)”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와 지구역사, 우리나라와 우리들의 형편을 어떻게 엮어 가실지에 대해 살피고, 그 뜻을 알아차리고 대비하면서 살아가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택하시고 불러주시고 진리와 성령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소망을 기대할 수 있게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극진히 사랑하시던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살고 있는 베다니 동네에서 있었던 기적을 두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나누는 말들입니다.
본문 전의 내용은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셨는데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으니 마리아와 마르다가 걱정이 되어 예수님께 자기 오빠를 고쳐달라고 기별하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을 그곳에 더 머무신 후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불만스레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어 있으니 깨우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잠들어 있으면 깨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다시금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신다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심성이 약하셔서 만일 베다니에 계시고 나사로가 앓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실 것 같으면 예수님이 죽지 못하도록 고쳐 살리실 마음이 예수님 자신에게도 그럴 소지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그가 죽음으로 부활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예시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생각은 제자들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뜻을 조금 알듯 하면서도 여전히 분명하게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사로가 죽었고 그를 살려내기 위해 베다니로 가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약간 빈정대는 말투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우리가 가다가 돌에 맞아 죽더라도 우리도 예수님이 살려주실 것이 아니냐는 뜻에서 하는 말투였습니다.
예수님이 며칠이 걸려 베다니로 오셨는데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 가서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말은 진작에 오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텐데 왜 이제사 오셨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라도 마르다가 바로 알고 진짜로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빠가 살아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르다의 믿음으로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아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했습니다. 구원 얻은 영혼이 반드시 생명의 부활을 할 줄 믿는다는 마르다의 말에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은 마지막 때가 아니고 바로 지금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훗날로 포인트를 맞추고 현실의 부활을 부인하고 있는 마르다가 안타까워 요한복음 11:25-26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마르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했습니다. 훗날로 맞추었던 신앙이 바로 현실의 가능성 있는 부활믿음으로 예수님이 조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러 오셨다는 믿음으로 부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원망과 불평으로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부활생기가 믿어지는 믿음으로 그 심령을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의 생기를 힘입은 것 같은 마음으로 산등성이 집으로 올라가서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예수님께로 가서 언니 마르다와 똑같은 식의 원망을 했습니다.
그들 자매의 신앙의 한계는 죽기 전에는 어떤 병이든지 치유할 수 있는 예수님이지만 죽은 후에는 예수님도 속수무책인 것으로 그 능력을 제한하는 잘못된 신앙관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와 그를 따라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우는 것은 예수님이 시간을 맞춰 오셨다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이고 또 다른 시각에서는 죽음 자체가 슬프고 절망적인 것이라 울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은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하고 또 한 사람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고 하는 말들을 예수님이 들으시고 다시금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은 그토록 싫어하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는 죽을 일만 재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사로가 있는 그곳에 가셔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하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시니 삼베로 수족을 동인 채로 나사로가 나오니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로 그 집은 엄청난 복을 받은 것이며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했던 많은 친구들과 예수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이 일로 인해 분개하며 이를 가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세칭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 바리새인, 대제사장들,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권이 실추되면 육신의 생계가 위태로움을 느끼게 되면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늘어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마태복음 11:21에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베푸시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어져서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종교지도자들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고 따르려는 자들을 막고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적그리스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무리들이 예수님의 복음 확장의 역사를 시기 질투하여 훼방하려고 모의를 했습니다. 이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고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였는데 핑계거리로 내세운 주장이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했습니다.
그런데 그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갑자기 하는 말이 자신은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는 듯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하면서 책망하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가야바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자기들을 따르고 섬기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리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죽여야 한다는 입장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가야바가 생각할 때 예수님의 무리가 늘어나서 온 국민이 대동단결하게 되면 로마가 반란을 일으키는 무리로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엄청난 백성의 희생이 따를 것을 우려한다는 식으로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하나만 잡아 죽이면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흩어질 것이고, 로마인들이 자기들을 죽이러 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 말이었는데, 반대로 성령이 시켜서 한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똑같은 말이었지만 그 말의 영적 입장으로의 해석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말은 가야바가 한 것이지만 그 말을 하게 하신 것은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서 진리로 선언한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택해 놓으신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 얻게 될 숫자가 많아지는데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에 흩어진 무리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게 될 희생의 속죄양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성령은 가야바의 입술을 통하여 그렇게 말하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성령의 하게 하신 말인 줄 모르고 예수님을 믿어 살지 못했듯 우리가 말씀은 전하기 쉬워도 전하는 말처럼 믿어 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교인입니다. 그러나 늘 교인인 채로 살아가면 안 되고 회개하여 성령을 받아 성도(그리스도인=예수님의 사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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