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크냐?”로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 실소하지만, 정작 우리 크리스천들 안에도 키재기의 유치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이야기한다 해도 키재기에는 영적 유치함이 담겨 있다.

그 유치한 키재기는 거짓말과 과장, 혹은 남을 깍아 내리면서 자기의 키를 상대적으로 돋우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다. 언론의 자유를 운운하며 무책임한 비판을 술취한 사람의 토악질처럼 쏟아내지만 정작 자기가 한 말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추측성 기사를 써 놓고, 사실과 무관하다며 그 파장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기자들이나, 묻지마 살인극 같이 사람을 죽이는 댓글들을 쓰는 무기명의 비겁자들은 말세의 극명한 현상이다.
복음증거는 그런 의미에서 말세증후군을 치료하는 길이요, 증인들은 거짓을 밝히는 심판자들이다.

과장과 거짓, 그리고 책임없이 돌아다니는 말, 말, 말. 이러한 세상에 소망이 있다면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 뿐이리라. 진리를 믿고, 또 그 진리를 책임있게 전할 수 있는 증인들만이 거짓으로 오염되어 있는 세상을 정화할 수 있는 유일한 제어 장치이다.

진리를 전하지 못하는 자는 ‘책임있는 발언’을 할 수 없다. 본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기 때문에 증인이 될 수 없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증인이 될 수 없는 자들의 증거이다. 즉 ‘무책임한 비판’과 ‘비겁한 익명성’이다. 오직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책임감을 느끼는 증인들만이 진실이 상실된 세상에 진리의 소망을 던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