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지친 일꾼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아니오’라고 거절하지 못하고, 남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은 지치기 쉽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면 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닌 것만 같아서 거절하지 못했다고 대답합니다. 결국 어떻게 될까요? 삶의 균형을 잃거나, 맡은 사역을 내려놓고 맙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동기는 곧 바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능력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한계가 있어도 교만한데, 하물며 한계없이 성장한다면 얼마나 교만해지겠습니까? 키가 계속 커진다고 생각해보세요. 100미터를 5초에 달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각 자 1달란트, 5달란트, 10달란트의 재능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나님은 계속 솟아나오는 능력의 샘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깨닫고,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아닐까요? 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그 부분을 맡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제가 축구장에서 축구공을 반대편 골대를 향해 힘껏 차보았지만 그 곳까지 날아간 적이 없습니다.
어디까지 가는지 나의 능력을 알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공부도, 운동도, 사랑도, 인간관계도, 교회 사역도, 한계가 있음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섯 명의 남성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채 10살도 안 된 6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혼자 키웁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잠시라도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이웃들이 하루는 도와줄 수 있지만, 그 다음 날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한계와 바운더리(boundary)를 알고 존중하는 것이 지혜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셨지, 자신의 능력 발휘에 초점을 두지 않았습니다. 돌덩이를 떡덩이로 만들라는 유혹을 받았을 때도 돌덩이는 여전히 돌덩이로 남아있게 하셨습니다.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지만, 종합병원을 세워 전세계 환자들을 다 치료하시겠다고 야심찬 활동계획을 세우지도 않으셨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으셨지만, 성전 계단을 걸어서 내려오셨습니다. 찾아왔다가 다시 떠나가는 사람들을 쫓아가서 붙들지 않으셨습니다(요6:22-71).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모든 이들의 필요를 채우시려고 분주하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요17: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왜 모세처럼, 바울처럼 살지 않았느냐?”고 물으실까요? 남처럼 살지 말고, 나처럼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바울의 고백에서 그가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을 배웁니다.

“우리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선교한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입니다.”
(고후10:13. 표준새번역)

연약함도 감사하며, 이기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