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영을 깨우고 무딘 심령을 울려주는 교회가 있다.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처럼 활력 넘치는 교회가 있다. 새 소망이다. 볼때, 자유주의 사조에 물든 강단마다 그 교회가 황폐해가며 하나님의 확실한 영감된 말씀에 서서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강조하며 기다리면서 체험하는 말씀 충만의 목회를 하는 교회마다 성장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한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성숙한다. 어떤 인간적인 수단이나 학식이나 철학적 능변을 통하여 부흥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새생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새 성품을 받았으며 성령님의 역사 하심으로 중생한 심령들이 많다. 그들이 신령한 교회를 사모하고 있다. 은혜스러운 교회를 찾고 있다. 그들을 신령한 꼴, 기름진 양식으로 먹여야 한다. 그래야 생명이 유지되고 성장하며 성숙하여져서 나아가 이 세상을 변화 시키지 않겠는가. 목회자는 후회하고 각성하며 반성해야 한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역중 하나는 설교이다.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 목회성공 여부는 우선 설교에 달려있다.
목사는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선배목사가 '나는 설교 준비하다가 다 늙었다' 고 하였다. 스펄전 목사는 '머리로 준비한 설교는 머리로 돌아가고 가슴으로 준비한 설교는 감슴으로 돌아가는데 무릎으로 준비한 설교는 무릎을 꿇게 한다.' 고 하였다. 그런것 같다. 무릎 잘 꿇는 목사가 훌륭히 서는 목사요, 겸손히 무릎을 꿇는 목사가 강하게 서는 목사이며, 가장 오래 무릎을 꿇는 목사가 임지에 가장 오래 서있는 목사이더라.
신학교 다닐 때, 설교학 교수로부터 들은 말이 은퇴한 지금도 잊어지지가 않는다. '목회할 때 다른 비난은 받아도 설교 못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말아라 ... ' 그런데 사실 설교는 잘하고 못하고가 있을 수 없겠다. 다만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니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받아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오래 무릎을 꿇은 후에 응답을 받았다면 이제 가감 없이 '전하느냐 못하느냐' 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말씀은 없고 고루한 교리와 비위에 맞추려는 세상 잡답만 들어 영양 섭취를 못하고 쫄쫄 굶고 오니 그 모양 그 모습으로 어떻게 거친 세상 모진 풍파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이런 기사를 보았다. 워싱톤에 있는 정치인들이 주일이 되면 차를 몰고 시골로 가서 예배를 드리는 수가 많다고 한다. 시골교회 목사는 도시에서 유력한 분들이 왔다고 해서 그들에 맞도록 한다고 유식한 철학적 설교나 시사평론을 하곤 한다. 그러면 도시에서 온 신자들이 '목사님! 우리가 이 시골까지 찾아 온 것은 그런 어설픈 철학강의나 맞지도 않는 시사평론을 듣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워싱톤이나 뉴욕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읍니다. 목사님! 우리가 여기까지 찾아 온 것은 잠자는 영혼을 깨우며 무뎌진 심령을 울려줄 그런 설교를 듣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하며 울먹이고 가더니 다시는 오지를 않터란다.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는 교회가 여기에 그리고 저기에도 더 많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변화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여기 있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며 이사야처럼 나아갈 때, 교희가 이 세상의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 확실하다.
우선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새생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새 성품을 받았으며 성령님의 역사 하심으로 중생한 심령들이 많다. 그들이 신령한 교회를 사모하고 있다. 은혜스러운 교회를 찾고 있다. 그들을 신령한 꼴, 기름진 양식으로 먹여야 한다. 그래야 생명이 유지되고 성장하며 성숙하여져서 나아가 이 세상을 변화 시키지 않겠는가. 목회자는 후회하고 각성하며 반성해야 한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역중 하나는 설교이다.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 목회성공 여부는 우선 설교에 달려있다.
목사는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선배목사가 '나는 설교 준비하다가 다 늙었다' 고 하였다. 스펄전 목사는 '머리로 준비한 설교는 머리로 돌아가고 가슴으로 준비한 설교는 감슴으로 돌아가는데 무릎으로 준비한 설교는 무릎을 꿇게 한다.' 고 하였다. 그런것 같다. 무릎 잘 꿇는 목사가 훌륭히 서는 목사요, 겸손히 무릎을 꿇는 목사가 강하게 서는 목사이며, 가장 오래 무릎을 꿇는 목사가 임지에 가장 오래 서있는 목사이더라.
신학교 다닐 때, 설교학 교수로부터 들은 말이 은퇴한 지금도 잊어지지가 않는다. '목회할 때 다른 비난은 받아도 설교 못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말아라 ... ' 그런데 사실 설교는 잘하고 못하고가 있을 수 없겠다. 다만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니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받아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오래 무릎을 꿇은 후에 응답을 받았다면 이제 가감 없이 '전하느냐 못하느냐' 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말씀은 없고 고루한 교리와 비위에 맞추려는 세상 잡답만 들어 영양 섭취를 못하고 쫄쫄 굶고 오니 그 모양 그 모습으로 어떻게 거친 세상 모진 풍파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이런 기사를 보았다. 워싱톤에 있는 정치인들이 주일이 되면 차를 몰고 시골로 가서 예배를 드리는 수가 많다고 한다. 시골교회 목사는 도시에서 유력한 분들이 왔다고 해서 그들에 맞도록 한다고 유식한 철학적 설교나 시사평론을 하곤 한다. 그러면 도시에서 온 신자들이 '목사님! 우리가 이 시골까지 찾아 온 것은 그런 어설픈 철학강의나 맞지도 않는 시사평론을 듣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워싱톤이나 뉴욕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읍니다. 목사님! 우리가 여기까지 찾아 온 것은 잠자는 영혼을 깨우며 무뎌진 심령을 울려줄 그런 설교를 듣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하며 울먹이고 가더니 다시는 오지를 않터란다.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는 교회가 여기에 그리고 저기에도 더 많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변화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여기 있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며 이사야처럼 나아갈 때, 교희가 이 세상의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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