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 봤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고, 아파 봤기 때문에 아픈 사람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로 살고 싶다는 곽형일 집사. 그는 최근 10년 간 공을 들인 어휘책 ‘FUNCABULARY’를 발간하면서 수익금 전액을 사회 소외된 이웃이나 선교, 차세대 교육에 기부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화제가 되고 있다.
어린 시절 막연히 “(엄마를 때리는)폭력과 술주정뱅이가 없는 세상”을 꿈꾸던 소년, 약자가 늘 손해보는 사회 부조리를 개혁하기 위해 “공산주의”만이 답이라고 생각하던 대학생이, 이제는 “죄를 사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가진 것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어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따뜻한 간증 스토리 하나쯤은 모두 가지고 있지만, 신앙을 삶으로 실천해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사회 환원을 위해 수익금 전액을 기부하기로 한 곽형일 씨의 신앙 스토리는 더욱 주목된다.
어린 시절, “증오를 품다”
전남 진도 시골 어촌에서 태어나 자란 그. 아버지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국가보안법에 의해 끌려가 감옥살이를 했고 풀려난 후 알코올중독으로 생을 일찍 마감했다. 홀로 아들 둘을 키워내야 했던 어머니는 공산품, 식료품부터 술, 담배까지 파는 구멍 가게를 운영했지만, 불행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어머니는 가게를 찾는 술주정뱅이들에게 구타 당하기 일수였다. 어떨 때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엄마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있는 모습을 보곤 했다.
술에 흥건히 취한 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공부해야 하던 청소년기를 보내며, 그는 “폭력도 술주정뱅이도 없는 세상”을 꿈꿨다.
약자에 대한 사회의 부조리에 강한 증오와 분노를 느꼈던 사춘기를 보내는 소년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있다면 마을 구석에 위치한 조그만 교회당이었다.
어느날 주일, 교회에서 찬양을 부르고 있던 그는 어머니를 자주 구타하던 사람이 옆에 앉아 찬양을 부르는 모습을 발견한다. ‘저 사람과 함께 가는 천국이라면 가지 않겠다’라며, 이후에는 교회에도 발길을 끊었다.
청년 “이념을 좇다”
신앙을 잃고, 그는 대학에 들어갔다. ‘약자에 대한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던 그는 모든 계층이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 이론’이 해답인양 푹 빠져든다.
“그러던 와중에 기독교인들이 전도를 하러 저를 많이 찾아왔어요. 그들이 사회 운동에 가장 큰 방해가 되더군요.”
기독교인들이 전도를 하러 오면 그는 백이면 백 이렇게 말했다. “100%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세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100%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댈 수 없다’는 결론에 늘 도달하곤 했다.
“나도 100%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어요. 신념과 이념으로 살고 있긴 하지만, ‘만약 내가 죽었는데 그들의 말이 진짜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이 있으면, 믿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쪽박 차는 거고, 믿는 사람들은 대박 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생각이 이렇게까지 이르자 그는 “통계적으로도 믿지 않는 게 더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를 만나다”
박사 학위를 위해 미국 유학을 오면서 그는 한가지를 결심했다. 인생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40일 새벽기도를 해보기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먼지 같은 나 같은 사람 하나 자신을 만나게 하실 수 없겠는가”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기도. 그는 “40일 동안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시지 않으면 저는 평생 당신을 찾지 않겠고, 알려주시면 당신을 위해 내 인생을 바치겠다”며 다소 래디컬한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한 지 20일 정도 되었을 때, 박사과정 첫 시험에서 문제를 잘못 읽어 60점을 통째로 날리는 일이 발생했다.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이어가야 하는 그에게 한 과목 C학점은 곧 한국행을 의미했다. 장학금을 받으려면 나머지 시험에서 월등히 잘해야만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은 안계시다고 단정지었다. 기독교인이던 아내에게 와 하소연 하면서 그는 말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는 자신이 잘못한 실수를 하나님 탓, 아내 탓을 했었다고 고백했다. 아내는 눈물만 주룩 주룩 흘리며 금식 기도를 시작했고, 그런 아내에게 미안해 그도 나머지 20일을 마저 기도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을 맛보게 된다.
“나머지 20일 동안 하나님께서 저에게 포토 메모리 능력을 주셨었어요. 보는 것은 모조리 다 기억을 하는 거죠. 그 다음부터 상위권 몇 %안에 들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돼 계속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포토 메모리의 능력은 그 기간이 지난 후 그의 머리에서 사라졌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가슴에 남았다.
어느날은 기도를 하던 중에 환상을 보게 됐다. 더럽고 죄된 모습, 증오에 가득찬 자신의 삶이 영상으로 보여지는 순간, 그는 마음 속으로 수없는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기 시작한다. 그 때, 정수리 위로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 환상 중에 위를 올려다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흘리신 뜨거운 사람, 보혈의 피를 보게 된 그는 “나의 더러운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내 인생을 드리겠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는 말씀과 기도도 중요하지만 영혼육의 균형을 이루는 선교도 중요하다고 믿는다며, 이번에 출판된 어휘책이 조금이나마 재정적(육적) 필요를 채워주길 기대한다고 말한다.
이번에 출판된 ‘FUNCABULARY’외 추가로 다른 책들을 발간할 예정인 그는 앞으로 출판비 제외 수익금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상처입은 치유자”로 살고 싶습니다. 아픔이 많기에 그들의 눈으로 함께 아파하고 보살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처입은 치유자로 살고 싶다는 곽형일 집사. 그는 최근 10년 간 공을 들인 어휘책 ‘FUNCABULARY’를 발간하면서 수익금 전액을 사회 소외된 이웃이나 선교, 차세대 교육에 기부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화제가 되고 있다.
어린 시절 막연히 “(엄마를 때리는)폭력과 술주정뱅이가 없는 세상”을 꿈꾸던 소년, 약자가 늘 손해보는 사회 부조리를 개혁하기 위해 “공산주의”만이 답이라고 생각하던 대학생이, 이제는 “죄를 사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가진 것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어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따뜻한 간증 스토리 하나쯤은 모두 가지고 있지만, 신앙을 삶으로 실천해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사회 환원을 위해 수익금 전액을 기부하기로 한 곽형일 씨의 신앙 스토리는 더욱 주목된다.
어린 시절, “증오를 품다”
전남 진도 시골 어촌에서 태어나 자란 그. 아버지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국가보안법에 의해 끌려가 감옥살이를 했고 풀려난 후 알코올중독으로 생을 일찍 마감했다. 홀로 아들 둘을 키워내야 했던 어머니는 공산품, 식료품부터 술, 담배까지 파는 구멍 가게를 운영했지만, 불행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어머니는 가게를 찾는 술주정뱅이들에게 구타 당하기 일수였다. 어떨 때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엄마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있는 모습을 보곤 했다.
술에 흥건히 취한 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공부해야 하던 청소년기를 보내며, 그는 “폭력도 술주정뱅이도 없는 세상”을 꿈꿨다.
약자에 대한 사회의 부조리에 강한 증오와 분노를 느꼈던 사춘기를 보내는 소년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있다면 마을 구석에 위치한 조그만 교회당이었다.
어느날 주일, 교회에서 찬양을 부르고 있던 그는 어머니를 자주 구타하던 사람이 옆에 앉아 찬양을 부르는 모습을 발견한다. ‘저 사람과 함께 가는 천국이라면 가지 않겠다’라며, 이후에는 교회에도 발길을 끊었다.
청년 “이념을 좇다”
신앙을 잃고, 그는 대학에 들어갔다. ‘약자에 대한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던 그는 모든 계층이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 이론’이 해답인양 푹 빠져든다.
“그러던 와중에 기독교인들이 전도를 하러 저를 많이 찾아왔어요. 그들이 사회 운동에 가장 큰 방해가 되더군요.”
기독교인들이 전도를 하러 오면 그는 백이면 백 이렇게 말했다. “100%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세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100%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댈 수 없다’는 결론에 늘 도달하곤 했다.
“나도 100%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어요. 신념과 이념으로 살고 있긴 하지만, ‘만약 내가 죽었는데 그들의 말이 진짜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이 있으면, 믿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쪽박 차는 거고, 믿는 사람들은 대박 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생각이 이렇게까지 이르자 그는 “통계적으로도 믿지 않는 게 더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를 만나다”
박사 학위를 위해 미국 유학을 오면서 그는 한가지를 결심했다. 인생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40일 새벽기도를 해보기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먼지 같은 나 같은 사람 하나 자신을 만나게 하실 수 없겠는가”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기도. 그는 “40일 동안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시지 않으면 저는 평생 당신을 찾지 않겠고, 알려주시면 당신을 위해 내 인생을 바치겠다”며 다소 래디컬한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한 지 20일 정도 되었을 때, 박사과정 첫 시험에서 문제를 잘못 읽어 60점을 통째로 날리는 일이 발생했다.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이어가야 하는 그에게 한 과목 C학점은 곧 한국행을 의미했다. 장학금을 받으려면 나머지 시험에서 월등히 잘해야만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은 안계시다고 단정지었다. 기독교인이던 아내에게 와 하소연 하면서 그는 말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는 자신이 잘못한 실수를 하나님 탓, 아내 탓을 했었다고 고백했다. 아내는 눈물만 주룩 주룩 흘리며 금식 기도를 시작했고, 그런 아내에게 미안해 그도 나머지 20일을 마저 기도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을 맛보게 된다.
“나머지 20일 동안 하나님께서 저에게 포토 메모리 능력을 주셨었어요. 보는 것은 모조리 다 기억을 하는 거죠. 그 다음부터 상위권 몇 %안에 들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돼 계속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포토 메모리의 능력은 그 기간이 지난 후 그의 머리에서 사라졌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가슴에 남았다.
어느날은 기도를 하던 중에 환상을 보게 됐다. 더럽고 죄된 모습, 증오에 가득찬 자신의 삶이 영상으로 보여지는 순간, 그는 마음 속으로 수없는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기 시작한다. 그 때, 정수리 위로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 환상 중에 위를 올려다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흘리신 뜨거운 사람, 보혈의 피를 보게 된 그는 “나의 더러운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내 인생을 드리겠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는 말씀과 기도도 중요하지만 영혼육의 균형을 이루는 선교도 중요하다고 믿는다며, 이번에 출판된 어휘책이 조금이나마 재정적(육적) 필요를 채워주길 기대한다고 말한다.
이번에 출판된 ‘FUNCABULARY’외 추가로 다른 책들을 발간할 예정인 그는 앞으로 출판비 제외 수익금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상처입은 치유자”로 살고 싶습니다. 아픔이 많기에 그들의 눈으로 함께 아파하고 보살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