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매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후손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가운데 하나지만 강하기로는 큰 나라를 포함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강국이다. 시련이 없었던 민족이 없지만 이스라엘 만큼 많은 시련을 겪은 나라도 드물다. 이스라엘은 정예군대와 아울러 마법과 같은 과학 기술이 접목된 막강한 방위산업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작은 나라가 고유한 군산업 복합체를 갖는 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이 고도로 발전된 군산업 복합체를 갖게 된 것은 한 동맹국으로부터 하룻밤 사이에 당한 배신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경제발전의 분수령이 되었던 순간은 과거 미국인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던 하나의 역사적인 충격을 통해 잘 이해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호황을 누리며 한껏 높았던 국제적 지위는 구소련이 쏘아올린 최초의 우주 위성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로 갑자기 상처를 입었다. 구소련이 우주 경쟁에서 미국보다 한발 앞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이 충격이 오히려 훗날 미국 우주과학과 경제 발전에 큰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혁신경제학자 존 카오는 “스푸니크는 미국을 깨우는 모닝콜이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스푸트니크 쇼크 10년 후 이스라엘 또한 충격적인 순간을 맞았다. 1967년 6일 전쟁의 전야에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자립하지 못하는 나라가 치러야만 하는 혹독한 대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이스라엘에게 안겨 주었다. 프랑스 제5공화국 창시자인 드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군대와 정부의 요직을 맡았고, 1959년에서 1969년 까지 프랑스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이스라엘 독립 후 드골은 이스라엘과의 동맹을 추진했고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깊은 우정을 쌓아갔다. 프랑스-이스라엘 동맹은 프랑스의 중요 군사 장비와 전투기의 공급 및 심지어는 핵무기 개발의 협력에 대한 비밀 계약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작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엄청난 자원을 동원해 스스로 거대한 군사 무기 시스팀을 생산해 내는 것보다는 다른 나라로부터 구입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1950년 5월 미국. 영국. 프랑스는 공동으로 중동지역에 무기판매를 제한하는 ‘3자 선언’을 발표했다.

해외로부터 공급은 끊어졌지만, 이스라엘은 이미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총과 총탄 공장을 기반으로 하는 무기 산업을 시작했다. 어느 공장은 말 그대로 키브츠 세탁소 지하에 설치된 숨겨진 공장이었다. 이곳에서는 지하의 소음을 위장하기 위해 지상의 세탁기계들을 계속 돌려댔다. 이 공장은 전쟁에서 남겨진 장비들을 미국에서 몰래 밀반출하여 세워졌는데, 1948년 까지 매일 수백정의 기관총을 생산했다.

전 세계에 걸쳐 마구잡이로 밀반입된 총기들은 임시공장들의 부족한 생산량을 보충해 주고 있었다. 벤 구리온은 1930년대부터 무기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해외로 내보냈다. 예를 들어 1936년 예후다 아락시는 소총을 증기 보일러에 숨겨 폴란드에서 하이파 항구로 운송했으며, 1948년에는 니카라과로부터 5대의 프랑스산 중고 자동화기의 구매협상을 위한 대표 역할을 수행했다. 소련이 3자 선언을 무시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이집트에 2억5천만달러 어치의 대규모 무기 판매를 한 사건이 있었던 1955년경까지 이스라엘은 외국에서 산발적으로 무기 구매를 해왔다.

소련의 도발에 대한 대응 으로, 드골은 1956년 4월 대규모의 현대식 무기를 이스라엘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1956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후에 프랑스와 이스라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이스라엘의 IDF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프랑스를 도왔고, 프랑스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더 많은 무기를 제공하며 두 나라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그러나 1967년 6월2일,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시리아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하기 3일전 드골은 두말없이 이스라엘을 내쳤다. 그는 내각에 “프랑스는 먼저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드골의 결정은 단지 중동 전쟁을 막기위한 노력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정세에 따라 오래고도 힘겨웠던 북아프리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중동의 아랍국가들과의 친선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프랑스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드골의 후계자인 조루즈 퐁피두는 1969년 선거 승리 후 에도 이 새로운 정책을 고수했다.약속했던 2백대의 탱크는 리비아로, 이미 대금을 지불한 50대의 미라지 전투기도 시리아로 넘어갔다.

이스라엘은 신속하게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이스라엘 처지를 공감하는 스위스의 엔지니어를 통해 미라지 전투기의 설계도를 얻어내 전투기 생산에 돌입하고, 이스라엘인들이 만든 함포선 5대를 프랑스에서 무려 3천마일의 바닷 길을 20피트의 파도와 싸우며 이스라엘로 옮겨왔다.1970년 <타임>지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비스마르크 이후 그와 같은 바다 수색은 없었다. 프랑스정찰기, 몰타로부터 날아온 영국 공군기, 소련의 유조선, 미국 제6함대의 레이더망, 텔레비전 카메라맨, 심지어는 이탈리아의 어선까지 이스라엘 선박을 추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장 필요로 하는 무기 및 항공기를 제공해 줄 국가를 잃어버린 결정적 순간에 중동 지역의 무기 경쟁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은 믿고 싶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1967년 프랑스의 금수 조치는 이스라엘을 매우 취약한 위치로 밀어 넣은 것이었다. 1967년 6일 전쟁에 앞서 미국은 이스라엘에 무기 시스템을 팔기 시작했다. 이후로 미국은 이스라엘의 주요 군수공급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배신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외국을 의존할 수 없음을 철저히 자각하게 했다. 작은 나라가 군수산업을 성공 시킨 예가 없지만 이스라엘은 주요 무기 시스템을 자국의 힘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기 시스템 개발에서 축적된 첨단 기술은민간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가장 작은 나라이면서도 가장 강한 국가로 존재하게 된 배경에는 배신이라는 쓰디쓴 시련이 있었다.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존하게 하신다. 국가적으로 생사를 걸고 하나님만을 절대의지하는 나라는 이스라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