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러싱제일교회(담임 장동일 목사)가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제1차 영적대각성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후러싱제일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50일운동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개최한 이번 집회는 늦은시간인 밤12시까지 열리고 있지만 성도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은혜를 체험하고 있다.
28일 수요예배 시간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 김용의 선교사는 성회를 통해 복음의 중간지대가 없음을 강조하면서 신앙적 결단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께 삶을 의탁하는 진정한 신앙인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의 선교사는 특히 기복적 신앙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예수님 시대 당시에 예수님이 처음부터 배척받은 것이 아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다고 했고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 때는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까지 환산하면 1만3천 명의 군중이 예수님을 보고자 했다”며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는 헌신할 것인가 아닌가가 분명히 갈린다. 예수님의 최후 죽음까지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에 김용의 선교사는 “예수님을 따르던 그들 안에 수많은 동기와 목적이 있는데 결국 그들은 예수님 자신이 아닌 예수님 손에서 나오는 기적, 예수님 손에서 나오는 능력, 축복에만 관심이 있었다”며 “복음이 명확하게 제시되면 내면의 본성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 사랑의 완전한 초대에 응답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김용의 선교사는 “세계의 중심인 뉴욕에 정말 대 각성운동이 일어나기 바란다”며 “특히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고 오랫동안 인도해 오신 이 후러싱제일교회를 통해 뉴욕의 21세기 영적 각성의 불길이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김용의 선교사 초청 후러싱제일교회가 신년들어 추진하고 있는 ‘목적이 이끄는 50일’의 일환으로 후러싱제일교회는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라는 주제로 예배, 교제, 훈련, 사역, 전도 5개의 영역에 있어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은 김용의 선교사 성회 메시지 내용.
누구를 따라가고 누구를 믿는가 이 선택이 정말 중요하다. 내 영원한 인생 길을, 내 영혼을 맡길만한 이에게 맡겨야 한다.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니라 확신이 들 때까지 부딪혀야 한다.
예수님에게로 나온 사람들 가운데에도 둘로 갈라진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 가는 사람과 도중에 달라지는 사람 두 경우를 본다.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대강 사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예배당에 정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예수님 시대 때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나왔다고 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이후에 하루에 5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 이런 역사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다. 오병이어 기적이 있었던 곳은 남자 숫자만 5천명이었다. 환산하면 1만3천명의 군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이 다 주님을 따를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떤 이는 병고침, 어떤이는 종교적 위안, 혹은 호기심, 혹은 초월적 능력, 인생의 답을 얻고자 왔다. 수많은 동기와 목적이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것은 문제가 안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결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예수님 그 자신이 아닌 예수님 손에서 나오는 기적, 예수님 손에서 나오는 능력, 축복에만 관심이 있었다.
만일 정략결혼한 사람이 남편에게는 관심이 없고 남편의 지위와 재산에 관심이 있다면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끼겠는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내게 있는 그 무엇에 관심이 있다면 진정한 인간관계가 맺어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자리에 있지만 다른 꿈을 서로 꾼다. 이것은 동행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게 주여 주여 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진정한 존경은 눈꼽만큼도 없고 다른 것에 관심이 다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하신다. 제사, 예물보다 귀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와서 주옥과 같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지만 정작 목숨을 걸고 나선 사람은 없었다. 왜 따르려고 하지만 따르지 못하는 것인가. 신기한 것은 주님이 진짜 복음을 이야기하면 화를 낸다. 오병이어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 3년으로 볼 때 기점을 그을 수 있는데 그 전까지는 상승세였다.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을 터트리고 나니까 그 상승세가 내려간다. 이후 에수님께서 훈계하시기를 생명의 양식, 예수님 자신이 너희에게 필요하다고 하신다. 이 때부터 논쟁이 되기 시작해서 작고 큰 일들이 엮여지면서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저주하고 떠나가는 슬픈 장면으로 바뀐다. 이 사람들이 다 예수님에 열광하고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십자가의 복음 앞에 서면 내면을 숨길 수 없다. 딱 갈라지게 돼 있다. 십자가의 도가 누구에게나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멸망받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복음이 명확하게 제시되면 내면의 본성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악을 쓰는 모습이 되던지 전적으로 자신을 내놓던지 그 둘 중 하나다. 십자가의 복음은 오래 믿었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다. 오래됐다고 저절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가족 중에 누가 믿었다고 또 열리는 것이 아니다.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라고 했다. 이방인은 지식적인 것 합리적인 것을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야 말로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으로의 초대가 바로 십자가 복음으로의 초대다. 완전한 행복으로의 초대다.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이것은 엄청난 초대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엄청난 초대를 거부하고 따를 수 없는 것인가를 생각해볼 때 첫째는 무관심 한 것이고, 도 하나는 인간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길과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복음의 능력과 축복이 모두 임하게 돼 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 분이 우리에게 자취를 남겨서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천국가서 따르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부터 따르는 것이다. 그 분의 영광, 기쁨, 천국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주님의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한다. 양다리를 걸쳐서는 안된다. 예수님과 세상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을 수는 없다. 세상은 49% 예수님은 51% 사랑한다는 사람이 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둘 다 주인이라는 것은 말장난이다.
이 세상 짤막한 재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 사람들이 있다. 다른 것은 그렇게 관심이 많은데 정작 정말 중요한 복음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다. 어떤 사람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자다가 일어나도 거실에서 골프를 연습하고 교회에 가도 성도들의 머리가 골프공으로 보일 정도다. 이것이 평생 목숨을 걸 일인가. 술 담배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이 그 시간만큼마이라도 인생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복음을 생각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드라마에 중독되는 것만큼만 성경을 읽어봤는가. 성경읽어볼 시간이 없다는 권사도 있다. 세상이 어떤 상황이고 교회가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데 이 중요한 때에 성경은 보지 않고 드라마는 꼬박꼬박 챙겨보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고작 지어낸 이야기는 드라마보다 등한시하는 사람이 있다. 오죽하셨으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는지 깊이 알아야 한다.
아들을 주신 것이면 다 주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런 은혜를 주시는지 생각해보라. 전능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들까지 주시고 어마어마한 복음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데 우리가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잔치에 초대를 받았지만 시집장가 가야한다고 또 소를 테스트해야 한다고 빠진다. 예수님께서 피를 토하시면서 너무도 안타까워서 전하신 말씀이다. 소경들, 절름발이를 데려다가 이 자리를 채우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바로 그 때 성경을 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초대를 우리가 거부한다는 것은 저주를 받아서 눈이 가리워졌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세상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신령한 복과 자유,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 이런 것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 덜렁덜렁 교회 다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두려운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침묵할 수 없는 분이다. 우리를 이 진노에서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 진노에서 건짐을 받는 길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데 오히려 주님이 우리에게 매달리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생이라는 것은 우리 존재의 전부가 걸린 것이다. 이것을 알아 듣는 사람은 모든 것보다 복음에 우선순위를 둘 것이다. 나이아가라폭포에 하늘의 왕자 독수리가 빠져죽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매년 봄이면 벌어진다. 봄철에 녹은 얼음 속에 냉동된 동물의 사체가 있고 그것을 먹다가 발톱이 동물의 살 속에서 다시 언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폭포에 그대로 휩쓸려 죽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의 삶을 격동적으로 복음의 십자가에 뛰어들어서 이 뉴욕이 정말 대 각성운동이 일어나기 바란다. 세계의 중심인 뉴욕이다. 이 삶을 뒤흔드는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해야겠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고 오랫동안 인도해 오신 이 후러싱제일교회를 통해 뉴욕의 21세기 영적 각성의 불길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28일 수요예배 시간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 김용의 선교사는 성회를 통해 복음의 중간지대가 없음을 강조하면서 신앙적 결단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께 삶을 의탁하는 진정한 신앙인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의 선교사는 특히 기복적 신앙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예수님 시대 당시에 예수님이 처음부터 배척받은 것이 아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다고 했고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 때는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까지 환산하면 1만3천 명의 군중이 예수님을 보고자 했다”며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는 헌신할 것인가 아닌가가 분명히 갈린다. 예수님의 최후 죽음까지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에 김용의 선교사는 “예수님을 따르던 그들 안에 수많은 동기와 목적이 있는데 결국 그들은 예수님 자신이 아닌 예수님 손에서 나오는 기적, 예수님 손에서 나오는 능력, 축복에만 관심이 있었다”며 “복음이 명확하게 제시되면 내면의 본성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 사랑의 완전한 초대에 응답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김용의 선교사는 “세계의 중심인 뉴욕에 정말 대 각성운동이 일어나기 바란다”며 “특히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고 오랫동안 인도해 오신 이 후러싱제일교회를 통해 뉴욕의 21세기 영적 각성의 불길이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김용의 선교사 초청 후러싱제일교회가 신년들어 추진하고 있는 ‘목적이 이끄는 50일’의 일환으로 후러싱제일교회는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라는 주제로 예배, 교제, 훈련, 사역, 전도 5개의 영역에 있어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은 김용의 선교사 성회 메시지 내용.
누구를 따라가고 누구를 믿는가 이 선택이 정말 중요하다. 내 영원한 인생 길을, 내 영혼을 맡길만한 이에게 맡겨야 한다.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니라 확신이 들 때까지 부딪혀야 한다.
예수님에게로 나온 사람들 가운데에도 둘로 갈라진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 가는 사람과 도중에 달라지는 사람 두 경우를 본다.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대강 사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예배당에 정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예수님 시대 때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나왔다고 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이후에 하루에 5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 이런 역사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다. 오병이어 기적이 있었던 곳은 남자 숫자만 5천명이었다. 환산하면 1만3천명의 군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이 다 주님을 따를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떤 이는 병고침, 어떤이는 종교적 위안, 혹은 호기심, 혹은 초월적 능력, 인생의 답을 얻고자 왔다. 수많은 동기와 목적이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것은 문제가 안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결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예수님 그 자신이 아닌 예수님 손에서 나오는 기적, 예수님 손에서 나오는 능력, 축복에만 관심이 있었다.
만일 정략결혼한 사람이 남편에게는 관심이 없고 남편의 지위와 재산에 관심이 있다면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끼겠는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내게 있는 그 무엇에 관심이 있다면 진정한 인간관계가 맺어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자리에 있지만 다른 꿈을 서로 꾼다. 이것은 동행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게 주여 주여 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진정한 존경은 눈꼽만큼도 없고 다른 것에 관심이 다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하신다. 제사, 예물보다 귀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와서 주옥과 같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지만 정작 목숨을 걸고 나선 사람은 없었다. 왜 따르려고 하지만 따르지 못하는 것인가. 신기한 것은 주님이 진짜 복음을 이야기하면 화를 낸다. 오병이어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 3년으로 볼 때 기점을 그을 수 있는데 그 전까지는 상승세였다.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을 터트리고 나니까 그 상승세가 내려간다. 이후 에수님께서 훈계하시기를 생명의 양식, 예수님 자신이 너희에게 필요하다고 하신다. 이 때부터 논쟁이 되기 시작해서 작고 큰 일들이 엮여지면서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저주하고 떠나가는 슬픈 장면으로 바뀐다. 이 사람들이 다 예수님에 열광하고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십자가의 복음 앞에 서면 내면을 숨길 수 없다. 딱 갈라지게 돼 있다. 십자가의 도가 누구에게나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멸망받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복음이 명확하게 제시되면 내면의 본성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악을 쓰는 모습이 되던지 전적으로 자신을 내놓던지 그 둘 중 하나다. 십자가의 복음은 오래 믿었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다. 오래됐다고 저절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가족 중에 누가 믿었다고 또 열리는 것이 아니다.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라고 했다. 이방인은 지식적인 것 합리적인 것을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야 말로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으로의 초대가 바로 십자가 복음으로의 초대다. 완전한 행복으로의 초대다.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이것은 엄청난 초대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엄청난 초대를 거부하고 따를 수 없는 것인가를 생각해볼 때 첫째는 무관심 한 것이고, 도 하나는 인간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길과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복음의 능력과 축복이 모두 임하게 돼 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 분이 우리에게 자취를 남겨서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천국가서 따르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부터 따르는 것이다. 그 분의 영광, 기쁨, 천국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주님의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한다. 양다리를 걸쳐서는 안된다. 예수님과 세상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을 수는 없다. 세상은 49% 예수님은 51% 사랑한다는 사람이 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둘 다 주인이라는 것은 말장난이다.
이 세상 짤막한 재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 사람들이 있다. 다른 것은 그렇게 관심이 많은데 정작 정말 중요한 복음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다. 어떤 사람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자다가 일어나도 거실에서 골프를 연습하고 교회에 가도 성도들의 머리가 골프공으로 보일 정도다. 이것이 평생 목숨을 걸 일인가. 술 담배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이 그 시간만큼마이라도 인생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복음을 생각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드라마에 중독되는 것만큼만 성경을 읽어봤는가. 성경읽어볼 시간이 없다는 권사도 있다. 세상이 어떤 상황이고 교회가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데 이 중요한 때에 성경은 보지 않고 드라마는 꼬박꼬박 챙겨보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고작 지어낸 이야기는 드라마보다 등한시하는 사람이 있다. 오죽하셨으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는지 깊이 알아야 한다.
아들을 주신 것이면 다 주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런 은혜를 주시는지 생각해보라. 전능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들까지 주시고 어마어마한 복음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데 우리가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잔치에 초대를 받았지만 시집장가 가야한다고 또 소를 테스트해야 한다고 빠진다. 예수님께서 피를 토하시면서 너무도 안타까워서 전하신 말씀이다. 소경들, 절름발이를 데려다가 이 자리를 채우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바로 그 때 성경을 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초대를 우리가 거부한다는 것은 저주를 받아서 눈이 가리워졌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세상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신령한 복과 자유,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 이런 것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 덜렁덜렁 교회 다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두려운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침묵할 수 없는 분이다. 우리를 이 진노에서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 진노에서 건짐을 받는 길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데 오히려 주님이 우리에게 매달리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생이라는 것은 우리 존재의 전부가 걸린 것이다. 이것을 알아 듣는 사람은 모든 것보다 복음에 우선순위를 둘 것이다. 나이아가라폭포에 하늘의 왕자 독수리가 빠져죽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매년 봄이면 벌어진다. 봄철에 녹은 얼음 속에 냉동된 동물의 사체가 있고 그것을 먹다가 발톱이 동물의 살 속에서 다시 언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폭포에 그대로 휩쓸려 죽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의 삶을 격동적으로 복음의 십자가에 뛰어들어서 이 뉴욕이 정말 대 각성운동이 일어나기 바란다. 세계의 중심인 뉴욕이다. 이 삶을 뒤흔드는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해야겠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고 오랫동안 인도해 오신 이 후러싱제일교회를 통해 뉴욕의 21세기 영적 각성의 불길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