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리폼드신학대학·대학원(학장 유상열 목사) 초대학장인 조국환 박사가 동성애는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명백한 죄이자 치유가 가능한 병이라고 강조했다. 16일 기독교실천윤리학 첫 강의를 전한 조국환 박사는 동성애에 대한 성경에 기초한 바른 가치관을 전하는 한편,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전했다.
조국환 박사는 “오늘날 학자들은 동성애의 원인으로 타고난 기질과 더불어 잘못된 성장 과정을 들고 있는데 타고난 것이라 해도 용인되거나 방치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또 원인이 자신의 책임이 아닌 기질과 양육상의 잘 못이라 할지라도 동성애적 행동에 따르는 피해나 책임으로부터 면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도벽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해서 절도 행위의 책임으로부터 면책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동성애는 잘못임을 분명히 했다.
동성애의 치유와 관련해서도 조국환 박사는 “치유가 어렵기는 하지만 당사자가 고치려는 결의를 가지고 치유에 임하는 경우 치유될 수 있다는 의학적 사례들이 있다”며 “마치 정결을 위해 금욕하는 것과 같이 동성애 치유도 노력에 좌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조국환 박사는 “반드시 동성애는 통제돼야 하며 그렇게 되도록 주변 사람들이 도와줘야 한다”며 “그러나 최근 급진적 서구 교회들의 경우 동성애를 하나의 성적 기호의 차이로 가볍게 생각하고 용인하는 분위기에 동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이 입장은 서구 여러 국가들에서 동성애자들이 인권을 앞세워 자신의 성적 성향을 사회적으로 공인받고자 하는 운동과 맞물려 적지 않은 논란을 빚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조국환 박사는 “동성애를 대하는 올바른 방법은 사람을 남녀로 지어 서로 돕는 베필이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비춰 정반대되는 죄임을 분명히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바른 규범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비록 고침의 가능성이 적을 지라다.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정 돕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국환 박사는 “모든 동성애자들은 자신이 동성애의 기질을 가졌다는 점을 알게 될 때 많은 번민과 갈등을 겪는다”며 “이 땡에 그들이 책임을 면하도록 그 성향을 정상으로 정당화 하거나 다양한 성적 취향의 하나로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종의 무책임한 지적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전했다.
“기독교윤리의 핵심가치는 산상수훈”
조국환 박사는 이날 기독교윤리에 대한 장시간 강의를 이어갔다. 특히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강의명을 ‘기독교실천윤리학’이라고 명명했다. 조국환 박사는 “세상이 세속화 되면서 성적문란 특히 동성애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며 “성도들이 도덕적인 고민거리가 많이 생기는 시기인데 교역자들이 그 고민을 상담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기초해 권면을 해야 한다. 그 권면의 기초가 있어야 하는데 기독교윤리학이 아닌 실천윤리학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조국환 박사는 실천윤리 측면에 있어서 예수님이 전한 ‘산상수훈’은 기독교윤리의 핵심가치임을 강조했다. 조국환 박사는 이를 기초로 결혼, 부부관계, 자녀교육, 낙태, 인간복제 등 기독교인으로서 접하는 다양한 영역에서의 기독교윤리적 가치를 제시했다. 다음은 조국환 박사가 전한 기독교윤리와 산상수훈에 관한 내용이다.
윤리문제는 도덕적 원리 문제만을 이야기해서는 의미가 없다. 실제 생활 가운데서 실천돼야 한다. 한국에서 출판되고 있는 기독교윤리와 관련한 책들 중에서 실천적인 면들을 뽑아서 강의를 준비했다.
도덕이 무엇이고 윤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아랑야 한다. 도덕은 인간의 행위 혹은 성품이 올바르거나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미하고 윤리학 내에서 일차적인 개념이 된다. 윤리는 도덕성을 이론적으로 반성하는 내용으로 이차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덕을 덕이 되는 성품이나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윤리는 그러한 성품에 관한 이론적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학에 대해서 윤리학을 설명한 방법을 그대로 적용해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 덕이 되는 성품, 행위 혹은 삶의 방식에 관한 이론적 신학적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윤리의 기본 원리는 좀 더 구체적인 의미에서 신본주의 윤리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바를 따르는 윤리다. 우리는 그의 계시에 의존해야 비로소 악이 무엇이며 선과 진리와 의는 무엇인지 바로 알게 된다고 믿는다. 기독교 윤리는 위대한 사상가의 이론이나 전통에 매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다. 본래 세상의 윤리에서도 철학이 들어가 있다.
개혁주의 윤리에 대해 명신홍 박사는 “기독교 윤리학이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비춰 참으로 선한 생활의 성질과 조건을 결정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신학적 과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결국 개혁주의적 기독교 윤리의 특성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규범에 입각해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된 의무 생활의 근거와 표준을 따라 사는 것을 생활의 근본 이상으로 삼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학윤리의 핵심은 십계명이다. 과연 십계명을 우리가 다 지켜야 하느냐 안 지켜야 하는 것도 있느냐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당연히 다 지켜야 한다. 십계명의 완전성과 항구성으로 볼 때 오늘날 신약 시대의 성도들도 이 계명을 엄숙히 지켜야 한다(마5:17, 롬3:31). 그러나 십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에 도달하거나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종하는 신앙의 표현으로써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십계명을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 22:35~40). 이 처럼 사랑을 통해서 십계명은 완성되었고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충족됐다.
신학윤리를 볼 때는 산상수훈을 봐야 한다. 이 설교가 너무나 가치 있는 가르침이란 의미에서 산상보훈으로도 불리우고 기독교 도덕의 근본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의 대헌장이라고도 불리워진다. 마태복음 5대 교훈집이 있는데 산상수훈(5-7), 제자 전도파송의 교훈(10), 천국 비유 교훈(13), 겸손과 용서에 대한 교훈(18), 최후의 교훈(바리새인 규탄 23, 감란산 교훈 24-·25) 등이다. 그 중에 산상보훈이 가장 윤리적인 면에 있어 훌륭하게 정리돼 있다.
산상수훈에 천국시민이 지킬 율법이 나오는데 천국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자격을 논하면서 이를 구약의 율법적 생활과 대조함으로 그 성격을 더욱 선명히 한다. 그러나 이는 율법적 생활과의 대립이 아니고 완성인데 주지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려고 오셨다. 즉, 율법은 천지가 폐하기까지 폐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같은 해를 비취게 하시며 의인과 불의자에게 같은 비를 내리신다. 그런고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세리와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따라야 한다.
천국시민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상 중요한 일들은 구제와 기도, 금식문제들이었고 외식의 경계문제 등이어서 천국 시민의 생활을 모범적으로 교수하셨다. 천국시민의 8가지 특권은 △심령이 가난한 자 천국을 얻음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음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함 △의를 사모하자는 배부름을 받음 △긍휼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음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봄 △화평자는 하나님의 아들 △의를 위한 핍박을 받으면 천국을 얻음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려고 오셨다. 즉 율법은 천지가 폐하기까지 폐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을 보고 율법을 파괴한다고 생각해 예수님을 핍박했다. 그러나 예수님이야말로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 율법은 구원의 필요성을 깨우쳐 주고 선지자는 구원의 요구의 충족을 가르쳐 주고, 예수님은 오셔서 이런 율법과 선지자의 요구와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가 없어지는 것 같은 중대 사건이 생기기 전에는 일점 일획이라도 폐지하거나 고치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
산상수훈은 5장에 천국시민의 기본 자격에 대해, 6장에서는 구체적인 생활 내용에 대해, 7장에서는 천국 시민의 사명이 제시된다. 위대한 산상보훈을 듣고 실행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놀라운 차이가 생긴다. 말씀을 준행하는 자들은 말씀을 듣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고,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 자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미련한 자들이다. 그 결과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힐 대 나타난다. 반석 위의 집은 견고하니 그대로 있고 모래 위의 집은 크게 무너져버린다. 결론적으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감탄하고 경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조국환 박사는 “오늘날 학자들은 동성애의 원인으로 타고난 기질과 더불어 잘못된 성장 과정을 들고 있는데 타고난 것이라 해도 용인되거나 방치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또 원인이 자신의 책임이 아닌 기질과 양육상의 잘 못이라 할지라도 동성애적 행동에 따르는 피해나 책임으로부터 면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도벽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해서 절도 행위의 책임으로부터 면책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동성애는 잘못임을 분명히 했다.
동성애의 치유와 관련해서도 조국환 박사는 “치유가 어렵기는 하지만 당사자가 고치려는 결의를 가지고 치유에 임하는 경우 치유될 수 있다는 의학적 사례들이 있다”며 “마치 정결을 위해 금욕하는 것과 같이 동성애 치유도 노력에 좌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조국환 박사는 “반드시 동성애는 통제돼야 하며 그렇게 되도록 주변 사람들이 도와줘야 한다”며 “그러나 최근 급진적 서구 교회들의 경우 동성애를 하나의 성적 기호의 차이로 가볍게 생각하고 용인하는 분위기에 동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이 입장은 서구 여러 국가들에서 동성애자들이 인권을 앞세워 자신의 성적 성향을 사회적으로 공인받고자 하는 운동과 맞물려 적지 않은 논란을 빚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조국환 박사는 “동성애를 대하는 올바른 방법은 사람을 남녀로 지어 서로 돕는 베필이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비춰 정반대되는 죄임을 분명히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바른 규범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비록 고침의 가능성이 적을 지라다.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정 돕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국환 박사는 “모든 동성애자들은 자신이 동성애의 기질을 가졌다는 점을 알게 될 때 많은 번민과 갈등을 겪는다”며 “이 땡에 그들이 책임을 면하도록 그 성향을 정상으로 정당화 하거나 다양한 성적 취향의 하나로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종의 무책임한 지적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전했다.
“기독교윤리의 핵심가치는 산상수훈”
조국환 박사는 이날 기독교윤리에 대한 장시간 강의를 이어갔다. 특히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강의명을 ‘기독교실천윤리학’이라고 명명했다. 조국환 박사는 “세상이 세속화 되면서 성적문란 특히 동성애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며 “성도들이 도덕적인 고민거리가 많이 생기는 시기인데 교역자들이 그 고민을 상담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기초해 권면을 해야 한다. 그 권면의 기초가 있어야 하는데 기독교윤리학이 아닌 실천윤리학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조국환 박사는 실천윤리 측면에 있어서 예수님이 전한 ‘산상수훈’은 기독교윤리의 핵심가치임을 강조했다. 조국환 박사는 이를 기초로 결혼, 부부관계, 자녀교육, 낙태, 인간복제 등 기독교인으로서 접하는 다양한 영역에서의 기독교윤리적 가치를 제시했다. 다음은 조국환 박사가 전한 기독교윤리와 산상수훈에 관한 내용이다.
윤리문제는 도덕적 원리 문제만을 이야기해서는 의미가 없다. 실제 생활 가운데서 실천돼야 한다. 한국에서 출판되고 있는 기독교윤리와 관련한 책들 중에서 실천적인 면들을 뽑아서 강의를 준비했다.
도덕이 무엇이고 윤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아랑야 한다. 도덕은 인간의 행위 혹은 성품이 올바르거나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미하고 윤리학 내에서 일차적인 개념이 된다. 윤리는 도덕성을 이론적으로 반성하는 내용으로 이차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덕을 덕이 되는 성품이나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윤리는 그러한 성품에 관한 이론적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학에 대해서 윤리학을 설명한 방법을 그대로 적용해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 덕이 되는 성품, 행위 혹은 삶의 방식에 관한 이론적 신학적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윤리의 기본 원리는 좀 더 구체적인 의미에서 신본주의 윤리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바를 따르는 윤리다. 우리는 그의 계시에 의존해야 비로소 악이 무엇이며 선과 진리와 의는 무엇인지 바로 알게 된다고 믿는다. 기독교 윤리는 위대한 사상가의 이론이나 전통에 매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다. 본래 세상의 윤리에서도 철학이 들어가 있다.
개혁주의 윤리에 대해 명신홍 박사는 “기독교 윤리학이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비춰 참으로 선한 생활의 성질과 조건을 결정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신학적 과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결국 개혁주의적 기독교 윤리의 특성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규범에 입각해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된 의무 생활의 근거와 표준을 따라 사는 것을 생활의 근본 이상으로 삼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학윤리의 핵심은 십계명이다. 과연 십계명을 우리가 다 지켜야 하느냐 안 지켜야 하는 것도 있느냐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당연히 다 지켜야 한다. 십계명의 완전성과 항구성으로 볼 때 오늘날 신약 시대의 성도들도 이 계명을 엄숙히 지켜야 한다(마5:17, 롬3:31). 그러나 십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에 도달하거나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종하는 신앙의 표현으로써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십계명을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 22:35~40). 이 처럼 사랑을 통해서 십계명은 완성되었고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충족됐다.
신학윤리를 볼 때는 산상수훈을 봐야 한다. 이 설교가 너무나 가치 있는 가르침이란 의미에서 산상보훈으로도 불리우고 기독교 도덕의 근본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의 대헌장이라고도 불리워진다. 마태복음 5대 교훈집이 있는데 산상수훈(5-7), 제자 전도파송의 교훈(10), 천국 비유 교훈(13), 겸손과 용서에 대한 교훈(18), 최후의 교훈(바리새인 규탄 23, 감란산 교훈 24-·25) 등이다. 그 중에 산상보훈이 가장 윤리적인 면에 있어 훌륭하게 정리돼 있다.
산상수훈에 천국시민이 지킬 율법이 나오는데 천국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자격을 논하면서 이를 구약의 율법적 생활과 대조함으로 그 성격을 더욱 선명히 한다. 그러나 이는 율법적 생활과의 대립이 아니고 완성인데 주지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려고 오셨다. 즉, 율법은 천지가 폐하기까지 폐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같은 해를 비취게 하시며 의인과 불의자에게 같은 비를 내리신다. 그런고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세리와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따라야 한다.
천국시민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상 중요한 일들은 구제와 기도, 금식문제들이었고 외식의 경계문제 등이어서 천국 시민의 생활을 모범적으로 교수하셨다. 천국시민의 8가지 특권은 △심령이 가난한 자 천국을 얻음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음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함 △의를 사모하자는 배부름을 받음 △긍휼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음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봄 △화평자는 하나님의 아들 △의를 위한 핍박을 받으면 천국을 얻음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려고 오셨다. 즉 율법은 천지가 폐하기까지 폐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을 보고 율법을 파괴한다고 생각해 예수님을 핍박했다. 그러나 예수님이야말로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 율법은 구원의 필요성을 깨우쳐 주고 선지자는 구원의 요구의 충족을 가르쳐 주고, 예수님은 오셔서 이런 율법과 선지자의 요구와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가 없어지는 것 같은 중대 사건이 생기기 전에는 일점 일획이라도 폐지하거나 고치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
산상수훈은 5장에 천국시민의 기본 자격에 대해, 6장에서는 구체적인 생활 내용에 대해, 7장에서는 천국 시민의 사명이 제시된다. 위대한 산상보훈을 듣고 실행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놀라운 차이가 생긴다. 말씀을 준행하는 자들은 말씀을 듣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고,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 자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미련한 자들이다. 그 결과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힐 대 나타난다. 반석 위의 집은 견고하니 그대로 있고 모래 위의 집은 크게 무너져버린다. 결론적으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감탄하고 경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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