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성장의 중심에는 한국교회의 뜨거운 신앙을 상징하는 새벽기도가 있었다. 이민교회에서도 이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 전통을 이어받아 간절한 기도로 미국의 아침을 깨우는 이민교회들이 있다.

플러싱 샌포드 에비뉴에 위치한 뉴욕예본교회에서는 날마다 정감있는 설교가 흘러나온다. 새벽기도 참석하는 성도는 10명 내외로 전형적인 아담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2009년부터 성요한 루터교회(St. John's Lutheran Church)로 이전해 예배를 드리고 있는 뉴욕예본교회는 미국 루터교회의 새벽을 기도로 채우고 있다.

담임을 맡고 있는 정상철 목사는 10명 내외의 성도들 앞에서도 성경의 깊은 메시지를 최대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창세기부터 순서대로 새벽기도 설교를 전해왔던 정 목사는 기자가 새벽기도를 찾은 당시 한창 사무엘하를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말씀은 해당 구절의 핵심적인 묵상주제를 뽑아 함께 나누는 식이었다.

정상철 목사는 ‘바르실래와 같은 성도’(삼하19:31~39)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신실함을 강조했다. 정 목사는 “바르실래는 많은 재물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 앞에서 겸손과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며 “우리 역시 바르실래와 같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름다운 생각과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다

정 목사는 “우리가 왜 단잠을 깨우고 이 새벽에 달려 나왔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며 “내가 잘 되든지 못 되든지, 기도의 응답이 있든지 없든지, 때로는 말씀에 은혜가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이미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삶이며 이 시대에 바르실래와 같은 삶을 사는 자”라고 말했다.

또 정 목사는 “성숙한 성도는 내가 해야 할 당연 한 일에 대해서 결코 생색을 내지 않는다”며 “그런 욕심과 바람과 교만은 그저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맡기며 사는 바르실래와 같은 신실하고 성숙한 성도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효신장로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정 목사는 2008년 노던 159가에 위치한 KCS 뉴욕한인봉사센터에서 뉴욕예본교회를 개척했다가 2년 전 지금의 미국 루터교회 예배당을 빌려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예본교회는 ‘예수님을 본받는 교회’라는 뜻이다. 누군가를 존경하거나 사랑하게 되면 본받고 싶어지고 닮게 돼있 듯이 삶 속에서 예수님의 모든 모습을 본받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목회철학이다.

이에 따라 △1인 1명 이상 전도, 100명의 사역자 양성 △사랑방 참여 및 활성화, 성경 1독 이상 △전교인 선교 참여 및 지원 △전교인 공예배 참여, 중보기도 활성화 등 4가지에 중점을 두고 성도들을 양육하고 있다.

정 목사는 교회가 크진 않지만 늘 목회자를 위해 조력해주고 있는 장로와 성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특히 이억채 장로와 박대양 장로는 자주 새벽기도에 나와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교회의 중요한 일들을 위해 정 목사와 회의를 갖기도 한다.

정 목사는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고, 예수님의 인내를 배우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 예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예본교회 주소는 147-46 Sanford Ave, Flushing, NY 11355이며, 전화번호는 917-392-7063이다. 다음은 정 목사 설교 전문.

바르실래와 같은 성도(삼하19:31~39)

유대인들은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첫째는 병과 같아서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한 사람 잘못 만나서 망가진 사람 많습니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사람입니다.
둘째는 약과 같아서 이따금 필요한 사람입니다.
셋째는 밥과 같아서 항상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밥과 같아서 항상 필요하고 만나고 싶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밥과 같은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병과 같아서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주변을 보면 밥과 같은 자가 되어야 하는데 병과 같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입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사람을 평안하게 해주는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를 만난다는 것이 여간 기쁜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가 삶의 질고를 곧 경험한 나이 많은 노인이라면 그 감격을 더더욱 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바라라보는 것만으로도 격려가 되고, 깊이 골이진 주름 하나하나에서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는 신선한 충격을 경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러한 노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바르실래라는 여든 살 먹은 노인입니다. 실상 그에 대한 묘사는 짧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겸손의 최고봉에 있는 사람이며 주위 사람들에게 빛과 행복을 선사하는 노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겸손하며 결코 모남이 없는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 바르실래, 진정 그는 항상 필요한자의 삶을 사는 노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는 도중 시므이와 시바, 므비보셋에 이어 이제 마지막으로 바르실래를 만나 배웅 받는 장면입니다. 내용상 세 문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요단 강까지 다윗 왕을 배웅하는 바르실래입니다.(31,32절)
2.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자는 다윗 왕의 제의를 사양하고 대신 아들 김함을 맡긴 바르실래의 모습입니다.(33~37절)
3. 다윗왕과 바르실래의 아쉬운 석별을 나누는 장면입니다.(38,39절)

바르실래는 길르앗 지방의 대부호로서 다윗의 어려움을 알고 다윗을 공궤한 적이 있습니다. (17:27~29) 먼 길을 떠나는 다윗 왕에게 베푼 친절은 무엇을 바라거나 요구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세로 친절을 베푼 것이었습니다.

이런 바르실래가 오늘 다윗을 전송하려고 나옵니다. 마하나임에서 다윗을 도왔던 바르실래의 그 정성을 기억한 다윗이 역시 바르실래를 보자마자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청합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있어서는 은인입니다.

아무도 다윗을 따르지 않으려고 했던 때에 오히려 더 다윗을 챙기고 도왔던 사람이 바로 바르실래입니다. 한마디로 다윗에게 있어서 바르실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겁니다.

나이 여든 살의 노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그가 노구의 몸을 이끌고 다윗 왕을 배웅하는 장면은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르실래의 행동은 너무나도 순수하고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실제로 어려웠던 시절에 함께 해준 사람에 대한 기억은 참 오래 가는 법입니다. 다윗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오늘 다윗이 바르실래에게 요청하는 이야기가 단순히 입바른 접대용멘트가 아닙니다. 의례적으로 한 번 해보는 인사치례가 아닙니다. 왕의 자리를 회복하고 돌아가는 다윗은 마음을 다해서 최대한 정중하고 진실 되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도와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아는 다윗의 겸손한 마음씨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더 감사하고 귀한 것은 다윗 왕의 그런 정중한 요청에 바르실래 역시 정중하게 거절을 합니다.

또한 바르실래는 부자들에게 흔히 빠지기 쉬운 교만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르실래는 많은 재물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 앞에서 겸손과 진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세요. 권세자와 권력자를 등에 업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세를 부리고 세도를 얻고 누리려고 목을 매고 있습니까? 같은 고향이라고, 같은 학교를 나왔다고, 같은 지역에 살았다고 해서 이런저런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그것을 마땅한 것으로 알고 사는 어리석은 모습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나이만 젊었더라면 바르실래도 충분히 다윗을 따라가서 권세와 세도를 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바르실래는 이미 세상의 권세에 유혹당하지 않는 삶의 경륜을 가지고 살았던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는 다윗을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르실래는 자기가 잘 되고 못 되고는 아무런 이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바르실래에게는 다윗은 언제나 자신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반역자 압살롬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압살롬에게 쫓기거나 이기거나 여부에 관계없이 이미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하나밖에 없는 왕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바르실래와 같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름다운 생각과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고 본받으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우리 범사가 잘되자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단잠을 깨우고 이 새벽에 달려 나왔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되든지 못 되든지, 기도의 응답이 있든지 없든지, 때로는 말씀에 은혜가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이미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삶이며 이 시대에 바르실래와 같은 삶을 사는 자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내가 해야 할 당연 한 일에 대해서 결코 생색을 내지 않습니다. 아직 신앙의 성숙이 없으니까 내가 행한 것에 대한 자랑과 교만이 나타나고, 또 내가 행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발동하여 당연히 받으려고 하는 욕심도 있는 겁니다. 그런 욕심과 바람과 교만은 그저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맡기며 사는 바르실래와 같은 신실하고 성숙한 성도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