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뉴욕지구한인목사회(회장 김용익 목사) 주최로 11일 실로암장로교회(담임 김종덕 목사)에서 열린 목회자세미나에서 강사로 참석한 권준 목사(시애틀형제교회)가 이민교회가 안고 있는 과제 중 하나로 이민자들의 ‘노예 정체성’을 버리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준 목사가 지적한 노예 정체성이란 ‘남이 가지면 반드시 자기도 가져야 한다’는 이민사회 내부의 시기와 경쟁의식에 대한 것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꿈만을 갖고 더 큰 선교적 사명을 잃어가는 모습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이다.
1강과 2강으로 나눠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 권준 목사는 2강을 통해 부흥의 3대 요소에 대해 본격적으로 제시했다. 권준 목사가 제시한 이 요소는 예배, 친교, 전도다. 특히 권준 목사는 이민사회에서 예배의 회복이 너무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치고 바쁜 일상 가운데 이민자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준 목사는 일주일 중 한 차례의 예배라도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쏟았다고 밝혔다. 교민수가 적은 시애틀 지역에서 현재 3천여 명의 성도들이 시애틀형제교회를 찾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권 준 목사는 예배가 회복되면 친교가 활성화되고 자연스럽게 세상을 향해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권준 목사 2강 부흥의 3대 요소 강의 내용.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 있는 줄 알고 몰려오는 것 그것이 전도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전도하는데 최고의 전도는 그 사랑으로 공급받고 사랑의 공동체로 말미암아 사랑이 고갈된 사람들이 소망없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다. 그것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역사다. 당신은 왜 그 교회 가느냐고 할 때 뭐라고 듣고 싶은가. 진정한 사랑이 고갈된 시대에 사랑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것이 전도다.
예배 친교 전도 이 세 가지가 핵심이다. 하나님을 향해, 서로를 향해,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교회가 돼야 한다. 하나님을 향해 열린 교회가 예배가 살아있다. 교회의 심장이 예배다. 예배가 살지 않으면 다 죽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업의 실패는 예배의 거룩함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터치를 경험하는 현장이고 내 모습 이대로 안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사건이다. 기성교회 전통교회의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점차 메마르고 형식화 습관화 되어가는 것이다. 왜 예배를 드리는지 왜 순서를 하는지도 모르고 드라이해졌다. 북미주에 몇 개 교회가 문을 닫고 있느냐면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2700개에서 3000개 교회에 이르고 있다. 메마르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가득해야 한다. 우리가 모여서 기도할 때마다 함께 예배하는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하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
예배는 시간이 제한돼 있다. 우리교회는 5부로 나눠서 예배를 드리는데 주차시간과 통행문제로 인해 1시간15분 안에 예배를 마쳐야 한다. 감동이 있어서 더 기도하고 싶지만 그냥 끝내는 경우가 많다. 예배시간이 넉넉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일 수 있다. 우리가 성도들에게 심어줘야 할 것은 예배시간은 짧지만 하나님을 오늘 만나지 못하면 돌아갈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예배시간에 습관적으로 늦는 사람이 있다. 어떤 분은 너무 습관적이어서 결단을 했다. 예배시간이 어느정도 지나면 문을 닫는다. 1부 늦으면 2부, 2부 늦으면 3부로 가시라고 공지를 했다. 그랬더니 정말 일찍 오더라. 10분, 20분 일찍 가는게 대수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오기만 한 것으로 뭔가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이민교회 예배 가운데 안타까운 것은 일주일 내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그것이 느껴진다. 시달리다 온다. 건강보험마저도 파기할 정도로 힘든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이 일요일와서 하나님이 주시는 치료의 능력을 체험하고 가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월요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을 볼 때 너무도 안타깝다. 왔던 모습 그대로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 와서 노래 부르고 섬기기도 했는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한 주간을 또 맞이할 성도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이 예배는 한 시간 동안이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예배가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다.
어떨 때는 목회자도 드리기 힘든 예배를 성도들이 참고 드리는 모습을 볼 때 너무도 안타까웠다. 아무런 감동과 변화가 없는 예배는 거부한다. 예배는 축제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신 그 십자가의 보혈 앞에 회개의 눈물이 있고 감격의 눈물이 있는 것이 축제다. 그런데 보면 예배전통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 교회들이 많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일 뿐이다. 어떤 형태로 드리던, 경배와 찬양을 하던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다. 눈은 사람을 보지만 성가대를 보지만 설교자를 보지만 하나님을 진정 볼 수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LA에 있을 때 어떤 교회가 갈라지게 됐다. 그 원인이 설교를 헌금 전에 할 것이냐 후에 할 것이냐 싸운 것에 있다. 그것은 비본질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그런 비본질인 전통문화에 너무 목숨을 건다. 우리가 그 순서의 의미를 보고 진정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 된다. 예전에 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는 것보다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의식화된 예배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예배의 부흥 없이는 다른 변화가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성령의 터치가 있는 그런 예배에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좋은 예배의 기준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예배가 돼야 한다. 내 마음대로 드려서 예배가 좋은게 아니다. 다윗은 자기 방식대로 법궤를 움직였다.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다윗의 방식이 맞지만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야 한다. 우상숭배는 내가 신을 만들어서 내가 원하는대로 해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신을 움직이는, 자기가 주인을 움직이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예배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해야 한다. 악기를 튜닝하듯이 성도들 또한 어떤 때가 됐을 때 예배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교회에 정말 감사한 것은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팀이 있다는 것이다. 1부 예배팀, 2부, 3부 등등 예배 순서마다 중보기도팀이 있다. 그 중보기도자들을 생각하면서 설교단상에 오를 때마다 힘이 난다. 비록 나는 부족하지만 중보기도팀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것이 힘이 되고 굉장히 중요하다.
두 번째 서로를 향해 열린 공동체, 이것은 친교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은 하나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이들도 하나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떤 장로님이 뜬금없이 감사하다고 해서 왜 감사하냐고 했더니 부목사님과 잘 지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더라. 저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성도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정말 힘써 지킨다. 금식도 하고 그런 노력을 한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가 안좋을 때가 많다.
뉴욕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심장부가 하나 됨을 위해 힘써야 할 것 같다. 이런 이야기는 목회자들끼리 있으면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공동체의 능력은 하나되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왜 고난이 없었겠는가.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이 여기까지 오면서 뭐가 고난인지 그게 생각나지 않는 것이 참 감사하다.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 때문에 늘 울고불고 찡그렸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겠다.
제가 부임하고 있는 형제교회는 전임 목사님이 14년 목회를 하고 은퇴하셨다. 그 훨씬 전에 교회가 여러개로 갈라졌을 때 부임한 분인데 그동안 그 상처를 봉합하느라 힘쓰셨다. 그런데 그 분이 은퇴목사보다 원로목사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당회에서 은퇴목사로, 공동의회도 은퇴목사로 보고됐다. 조금의 섭섭함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영적인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 원로목사로 모시고 싶었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원로목사로 모시는 것이 당회와 공동의회에 같이 통과됐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기업이 성공하는데 있어서 그 내면을 보면 성공원인이 훌륭한 제품만이 아니다. 우리가 스티븐잡스, 애플을 보면서 물건 상품을 이야기하는데 그 뿐만이 아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프로그램만이 아니다. 신학교 다니는 친구가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있는 하나됨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제품, 프로그램이 아니고 어떤 것도 해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협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뭔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야 한다. 어디 가든 와보라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줘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되는 능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교회의 영향력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려있다.
조직이 크면 비효율적이라는 것도 옛말이다. 능력있는 그 사람 뒤에는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지지 않는 다른 사람의 능력이 있고, 그것이 하나되기 때문에 시너지효과로 인해 그 공동체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교회는 기적 공동체인데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기적을 이뤄야 한다. 하나됨을 이뤄서 세상이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내는 공동체, 그러므로 하나됨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고 희생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CEO이신 성도가 계신데 회사는 결과물을 보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능력미달이 되는 사람을 해고해야 되는지 고민이라고 했다. 그리고 저에게 능력없는 이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냐고 물었다. 사실 우리교회의 한 교역자가 속을 썩였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말해야겠다고 사무실에 불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앉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부족한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면서 정말 이번에는 잘해보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결국 잘해보라고 기도하면서 보냈다. 그 이야기를 듣더니 그 CEO성도분은 앞으로 목사님은 계속 그렇게 사시라고 하더라. 제가 그 말을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들었다. 이런 일 만나면 무엇해야 할지 판단이 안 될 때가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하나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어떻게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예배를 체험하도록 하면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도 열리게 된다. 바로 전도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꿈은 교회성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목표와 목적이 다른다. 그런데 목표와 목적을 바꾸게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의사가 되라 변호사가 되라 그런 것은 다 목표다. 그런데 목적은 인류를 보다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정말 가난한 자를 위해서 억울한 자를 위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나는 변호사가 되도록 기도해줘야 할텐데 우리가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다. 목표를 그렇게 정한 의미는 넌 좀 편안하게 살라는 것이다. 부모는 이렇게 힘들게 살지만 너 하나는 편하게 살라는 것인데 우리는 다음세대에 목표가 아닌 목적을 심어줘야 한다. 아메리칸 드림은 목적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자각이 없으니까 아버지가 없으니까 고아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천부께서 아신다고 했다. 삶의 방식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도록 해야 한다. 복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복의 근원이 되어 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토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안주하면 안 된다. 정체돼 있으면 퇴보하게 돼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우리가 교회의 사이즈 그 크기를 물어보는데, 나무나 건물이 다 커야 멋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어떻게 사역하는가가 중요하다. 시애틀형제교회도 지금보다 더 커지면 당연히 좋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가 되고 싶지 않다. 오직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다. 그래서 빛과 소금으로 살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의 꿈을 갖고 살고 그것을 얼마나 실현하는가가 중요하다.
이민교회는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폐쇄적이다. 내가 하나라도 더 가져야 하고 시기와 경쟁의 마음들이 강하다.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하지만 내 뜻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것은 한마디로 노예로 찌든 삶이라고 볼 수 있다. 노예이기 때문에 일한만큼은 악착같이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노예의 삶과 정체성을 하나님께 없애는 작업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셨다.
이민목회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치유와회복 그리고 비전이다. 모두 상처투성이다. 삶의 뿌리를 뽑아서 온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언어도 안 되고 문화도 다르다. 그래서 치유가 중요하다. 그런데 치유만 해서는 안 된다. 감싸주고 좋은말 하고 위로하니까 좋아한다. 그런데 비전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고통이 없는 내가 안타깝다. 진정 하나님 앞에 기도가 있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의 유연성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저 문화 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증거할까 고민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토착화가 탁월했다. 여러모양으로 전도하는 것이 한 사람이라도 더 얻고자 함이라고 했다. 토착화의 원리는 바울의 원리인가 아니다. 성육신의 방법이다. 바울이 끊임없이 고백하는 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노라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배설물처럼 버렸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다.
이제는 모두가 다 접속시대가 돼서 모든 것이 통한다. 그런데 정말 교회가 세상과 접속이 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구원의 역사를 이뤄야 하는데 점점 고립돼 가고 있다. 세상은 우리교회가 교만해서 교회가 하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한다. 독선적인 태도가 싫다고 한다. 우리의 확신을 가진 태도가 감사가 아니라 교만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겸손히 다가가야 한다.
정말 하늘, 사람, 세상을 향해 문이 열린 교회의 모형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교회를 만들고 하나님을 춤추게 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 결단과 열정이 필요하다.
권준 목사가 지적한 노예 정체성이란 ‘남이 가지면 반드시 자기도 가져야 한다’는 이민사회 내부의 시기와 경쟁의식에 대한 것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꿈만을 갖고 더 큰 선교적 사명을 잃어가는 모습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이다.
1강과 2강으로 나눠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 권준 목사는 2강을 통해 부흥의 3대 요소에 대해 본격적으로 제시했다. 권준 목사가 제시한 이 요소는 예배, 친교, 전도다. 특히 권준 목사는 이민사회에서 예배의 회복이 너무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치고 바쁜 일상 가운데 이민자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준 목사는 일주일 중 한 차례의 예배라도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쏟았다고 밝혔다. 교민수가 적은 시애틀 지역에서 현재 3천여 명의 성도들이 시애틀형제교회를 찾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권 준 목사는 예배가 회복되면 친교가 활성화되고 자연스럽게 세상을 향해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권준 목사 2강 부흥의 3대 요소 강의 내용.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 있는 줄 알고 몰려오는 것 그것이 전도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전도하는데 최고의 전도는 그 사랑으로 공급받고 사랑의 공동체로 말미암아 사랑이 고갈된 사람들이 소망없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다. 그것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역사다. 당신은 왜 그 교회 가느냐고 할 때 뭐라고 듣고 싶은가. 진정한 사랑이 고갈된 시대에 사랑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것이 전도다.
예배 친교 전도 이 세 가지가 핵심이다. 하나님을 향해, 서로를 향해,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교회가 돼야 한다. 하나님을 향해 열린 교회가 예배가 살아있다. 교회의 심장이 예배다. 예배가 살지 않으면 다 죽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업의 실패는 예배의 거룩함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터치를 경험하는 현장이고 내 모습 이대로 안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사건이다. 기성교회 전통교회의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점차 메마르고 형식화 습관화 되어가는 것이다. 왜 예배를 드리는지 왜 순서를 하는지도 모르고 드라이해졌다. 북미주에 몇 개 교회가 문을 닫고 있느냐면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2700개에서 3000개 교회에 이르고 있다. 메마르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가득해야 한다. 우리가 모여서 기도할 때마다 함께 예배하는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하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
예배는 시간이 제한돼 있다. 우리교회는 5부로 나눠서 예배를 드리는데 주차시간과 통행문제로 인해 1시간15분 안에 예배를 마쳐야 한다. 감동이 있어서 더 기도하고 싶지만 그냥 끝내는 경우가 많다. 예배시간이 넉넉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일 수 있다. 우리가 성도들에게 심어줘야 할 것은 예배시간은 짧지만 하나님을 오늘 만나지 못하면 돌아갈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예배시간에 습관적으로 늦는 사람이 있다. 어떤 분은 너무 습관적이어서 결단을 했다. 예배시간이 어느정도 지나면 문을 닫는다. 1부 늦으면 2부, 2부 늦으면 3부로 가시라고 공지를 했다. 그랬더니 정말 일찍 오더라. 10분, 20분 일찍 가는게 대수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오기만 한 것으로 뭔가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이민교회 예배 가운데 안타까운 것은 일주일 내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그것이 느껴진다. 시달리다 온다. 건강보험마저도 파기할 정도로 힘든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이 일요일와서 하나님이 주시는 치료의 능력을 체험하고 가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월요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을 볼 때 너무도 안타깝다. 왔던 모습 그대로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 와서 노래 부르고 섬기기도 했는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한 주간을 또 맞이할 성도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이 예배는 한 시간 동안이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예배가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다.
어떨 때는 목회자도 드리기 힘든 예배를 성도들이 참고 드리는 모습을 볼 때 너무도 안타까웠다. 아무런 감동과 변화가 없는 예배는 거부한다. 예배는 축제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신 그 십자가의 보혈 앞에 회개의 눈물이 있고 감격의 눈물이 있는 것이 축제다. 그런데 보면 예배전통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 교회들이 많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일 뿐이다. 어떤 형태로 드리던, 경배와 찬양을 하던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다. 눈은 사람을 보지만 성가대를 보지만 설교자를 보지만 하나님을 진정 볼 수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LA에 있을 때 어떤 교회가 갈라지게 됐다. 그 원인이 설교를 헌금 전에 할 것이냐 후에 할 것이냐 싸운 것에 있다. 그것은 비본질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그런 비본질인 전통문화에 너무 목숨을 건다. 우리가 그 순서의 의미를 보고 진정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 된다. 예전에 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는 것보다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의식화된 예배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예배의 부흥 없이는 다른 변화가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성령의 터치가 있는 그런 예배에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좋은 예배의 기준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예배가 돼야 한다. 내 마음대로 드려서 예배가 좋은게 아니다. 다윗은 자기 방식대로 법궤를 움직였다.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다윗의 방식이 맞지만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야 한다. 우상숭배는 내가 신을 만들어서 내가 원하는대로 해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신을 움직이는, 자기가 주인을 움직이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예배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해야 한다. 악기를 튜닝하듯이 성도들 또한 어떤 때가 됐을 때 예배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교회에 정말 감사한 것은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팀이 있다는 것이다. 1부 예배팀, 2부, 3부 등등 예배 순서마다 중보기도팀이 있다. 그 중보기도자들을 생각하면서 설교단상에 오를 때마다 힘이 난다. 비록 나는 부족하지만 중보기도팀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것이 힘이 되고 굉장히 중요하다.
두 번째 서로를 향해 열린 공동체, 이것은 친교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은 하나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이들도 하나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떤 장로님이 뜬금없이 감사하다고 해서 왜 감사하냐고 했더니 부목사님과 잘 지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더라. 저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성도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정말 힘써 지킨다. 금식도 하고 그런 노력을 한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가 안좋을 때가 많다.
뉴욕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심장부가 하나 됨을 위해 힘써야 할 것 같다. 이런 이야기는 목회자들끼리 있으면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공동체의 능력은 하나되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왜 고난이 없었겠는가.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이 여기까지 오면서 뭐가 고난인지 그게 생각나지 않는 것이 참 감사하다.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 때문에 늘 울고불고 찡그렸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겠다.
제가 부임하고 있는 형제교회는 전임 목사님이 14년 목회를 하고 은퇴하셨다. 그 훨씬 전에 교회가 여러개로 갈라졌을 때 부임한 분인데 그동안 그 상처를 봉합하느라 힘쓰셨다. 그런데 그 분이 은퇴목사보다 원로목사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당회에서 은퇴목사로, 공동의회도 은퇴목사로 보고됐다. 조금의 섭섭함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영적인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 원로목사로 모시고 싶었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원로목사로 모시는 것이 당회와 공동의회에 같이 통과됐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기업이 성공하는데 있어서 그 내면을 보면 성공원인이 훌륭한 제품만이 아니다. 우리가 스티븐잡스, 애플을 보면서 물건 상품을 이야기하는데 그 뿐만이 아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프로그램만이 아니다. 신학교 다니는 친구가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있는 하나됨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제품, 프로그램이 아니고 어떤 것도 해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협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뭔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야 한다. 어디 가든 와보라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줘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되는 능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교회의 영향력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려있다.
조직이 크면 비효율적이라는 것도 옛말이다. 능력있는 그 사람 뒤에는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지지 않는 다른 사람의 능력이 있고, 그것이 하나되기 때문에 시너지효과로 인해 그 공동체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교회는 기적 공동체인데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기적을 이뤄야 한다. 하나됨을 이뤄서 세상이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내는 공동체, 그러므로 하나됨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고 희생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CEO이신 성도가 계신데 회사는 결과물을 보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능력미달이 되는 사람을 해고해야 되는지 고민이라고 했다. 그리고 저에게 능력없는 이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냐고 물었다. 사실 우리교회의 한 교역자가 속을 썩였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말해야겠다고 사무실에 불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앉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부족한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면서 정말 이번에는 잘해보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결국 잘해보라고 기도하면서 보냈다. 그 이야기를 듣더니 그 CEO성도분은 앞으로 목사님은 계속 그렇게 사시라고 하더라. 제가 그 말을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들었다. 이런 일 만나면 무엇해야 할지 판단이 안 될 때가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하나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어떻게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예배를 체험하도록 하면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도 열리게 된다. 바로 전도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꿈은 교회성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목표와 목적이 다른다. 그런데 목표와 목적을 바꾸게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의사가 되라 변호사가 되라 그런 것은 다 목표다. 그런데 목적은 인류를 보다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정말 가난한 자를 위해서 억울한 자를 위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나는 변호사가 되도록 기도해줘야 할텐데 우리가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다. 목표를 그렇게 정한 의미는 넌 좀 편안하게 살라는 것이다. 부모는 이렇게 힘들게 살지만 너 하나는 편하게 살라는 것인데 우리는 다음세대에 목표가 아닌 목적을 심어줘야 한다. 아메리칸 드림은 목적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자각이 없으니까 아버지가 없으니까 고아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천부께서 아신다고 했다. 삶의 방식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도록 해야 한다. 복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복의 근원이 되어 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토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안주하면 안 된다. 정체돼 있으면 퇴보하게 돼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우리가 교회의 사이즈 그 크기를 물어보는데, 나무나 건물이 다 커야 멋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어떻게 사역하는가가 중요하다. 시애틀형제교회도 지금보다 더 커지면 당연히 좋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가 되고 싶지 않다. 오직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다. 그래서 빛과 소금으로 살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의 꿈을 갖고 살고 그것을 얼마나 실현하는가가 중요하다.
이민교회는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폐쇄적이다. 내가 하나라도 더 가져야 하고 시기와 경쟁의 마음들이 강하다.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하지만 내 뜻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것은 한마디로 노예로 찌든 삶이라고 볼 수 있다. 노예이기 때문에 일한만큼은 악착같이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노예의 삶과 정체성을 하나님께 없애는 작업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셨다.
이민목회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치유와회복 그리고 비전이다. 모두 상처투성이다. 삶의 뿌리를 뽑아서 온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언어도 안 되고 문화도 다르다. 그래서 치유가 중요하다. 그런데 치유만 해서는 안 된다. 감싸주고 좋은말 하고 위로하니까 좋아한다. 그런데 비전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고통이 없는 내가 안타깝다. 진정 하나님 앞에 기도가 있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의 유연성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저 문화 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증거할까 고민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토착화가 탁월했다. 여러모양으로 전도하는 것이 한 사람이라도 더 얻고자 함이라고 했다. 토착화의 원리는 바울의 원리인가 아니다. 성육신의 방법이다. 바울이 끊임없이 고백하는 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노라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배설물처럼 버렸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다.
이제는 모두가 다 접속시대가 돼서 모든 것이 통한다. 그런데 정말 교회가 세상과 접속이 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구원의 역사를 이뤄야 하는데 점점 고립돼 가고 있다. 세상은 우리교회가 교만해서 교회가 하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한다. 독선적인 태도가 싫다고 한다. 우리의 확신을 가진 태도가 감사가 아니라 교만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겸손히 다가가야 한다.
정말 하늘, 사람, 세상을 향해 문이 열린 교회의 모형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교회를 만들고 하나님을 춤추게 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 결단과 열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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