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성장의 중심에는 한국교회의 뜨거운 신앙을 상징하는 새벽기도가 있었다. 이민교회에서도 이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 전통을 이어받아 간절한 기도로 미국의 아침을 깨우는 이민교회들이 있다.

뉴욕동양제일교회(담임 빈상석 목사)는 새벽기도 때도 매일 성가대가 선다. 새벽기도 참석인원이 주일예배 출석인원의 1/3에 이르는데다.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새벽기도를 주일예배와 동일하게 거룩하게 드리기 원하는 열망이 있어서다.

담임 빈상석 목사는 동양제일교회를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예배에 거룩하게 임하는 교회라고 설명했다. 간혹 특별새벽기도 때 성가대가 찬송을 부르는 교회가 있다. 그러나 매일 새벽 기도회에 나와 성가대를 서는 교회는 뉴욕지역을 넘어 전미 지역에서도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빈상석 목사는 지금도 성도들의 예배에 대한 열정에 스스로도 놀라고 성도들에게 오히려 목회를 배운다고 말했다. 실제로 동양제일교회 장로들은 특별한 일이 생길 때를 제외하고 전원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있다. 매일 새벽기도에서 특별 감사헌금, 일천번제 십일조 등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동양제일교회는 새벽기도가 ‘주일예배화’ 돼 있다.

이런 성도들의 열망에 빈상석 목사 또한 새벽기도를 목회의 가장 우선순위로 둘 수 밖에 없었다. 부임 후 지금까지 한 차례도 새벽기도에 지각하지 않고 나온 성도들도 많이 있어 더욱 빈상석 목사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때문에 성도들보다 더 긴장한 마음으로 매일 매일 다음날의 새벽기도를 준비했고 이제는 새벽기도 후 바로 다음날 새벽기도 설교를 준비하지 않으면 다른 일을 못할 정도가 됐다. 때로는 오전 시간을 모두 새벽기도 설교준비로 보낼 때도 있다.

빈상석 목사는 새벽기도 설교를 25분에서 30분 가량 전하고 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아는 범위 내에서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할 수 없어 목회자는 설교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빈상석 목사는 오히려 이런 과정이 자신에게 훈련이 되고 신명기와 같이 반복되는 내용도 볼 때 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빈상석 목사는 새벽기도 설교를 창세기부터 사무엘상하, 로마서를 제외하고 순차적으로 전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역대상을 본문으로 설교를 전하고 있다. 빈상석 목사는 특별히 수요예배 이후에는 사무엘상하, 금요기도회 이후에는 로마서를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했다.

빈상석 목사는 “매일 새벽 교회를 찾는 성도들에게 오히려 신앙을 배우고 있다”며 “또 오전에 갖고 있는 다음날 새벽기도 설교준비가 하나님의 은혜를 늘 잊지 않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고 말했다.

동양제일교회 성도들의 특징은 새벽기도 시간보다 더 일찍 교회에 도착해 기도를 하고 간다는 점이다. 보통 오전 5시30분에 새벽기도가 시작되지만 성도들은 5시에 나와 미리 기도를 하고 5시30분 예배를 드리고 가는 경우가 많다. 보다 일찍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성도들의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동양제일교회 주소는 50-43 97th Place, Flushing, NY 11368-3028이며, 전화번호는 (718) 760-5346이다. 다음은 10월5일 새벽기도에서 전한 빈상석 목사의 설교 전문.


본문: 역대상 10: 1-19

오늘도 순서에 따라 역대기 10장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솔로몬 왕이 죽고 그 아들 르로호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히야의 예언으로 성급하게 왕이 되려다가 애굽으로 피신한 여로보암이 돌아옵니다. 많은 백성들이 여로보암을 불러 솔로몬 왕 때에 자기들에에 부과된 많은 무거운 짐들 (세금 및 노역)을 들어 달라고 르호보암에게 가서 요구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이 백성들을 대신해서 솔로몬 왕이 백성에게 부과한 멍에를 풀어 달라고 요청하자 르호보암을 삼 일간 결정한 기간을 달라고 해서 돌려 보냅니다. 이 삼일 동안에 르호보암은 먼저 솔로몬 왕을 보좌했던 노인 신하들에게 상의하자 그 노인들은 백성들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만일 이 백성을 후대하여 기쁘게 하고 선한 말을 하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7절) 그 다음 르호보암과 함께 자랐던 젊은이들과 상의했는데 그들은 백성들의 말을 듣지말고 오히혀 백성들의 짐을 더 무겁게 하라고 합니다. 이 대답을 들은 열 지파의 백성들은 여로보암을 앞세워 따로 분립하고 르호보암은 겨우 두 지파 (유다와 베냐민)의 왕이 됩니다. 나라가 분리 된 것입니다.

1. 왜 나라가 분리되는 아픔이 생깁니까? 본문 15절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과 16절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은 분명하게 르호보암이 듣든데 실패 했다고 증거 합니다. 르호보암이 지혜로운 노인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철이 들든 젊은이들의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들의 말은 옳고 젊은이들의 말은 틀렸으니 노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르로호암이 잘못 들었다는 것입니다. 듣는 데 실패한 것 입니다. 열왕기상 3장을 살펴 볼 때에, 솔로몬이 일천 번제로 드리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 주겠다고 했을 때 솔로몬은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의 원 뜻이 ‘듣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아들 르호보암은 바로 그 솔로몬이 구한 “듣는 마음”이 없어서 나라가 갈라지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르호보암도 노인들의 교도를 무시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듣고 싶은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신 자기가 듣고 싶은 철 없는 젊은이들의 말에 귀 기울였습니다. 듣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언은 귀에 그슬린다고 했는데. 충언을 들을 줄 알아야 하는데 실패 한 것입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에서는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성도들이 하는 소리를 잘 분별하여 들어야 합니다. 듣는데 실패 하면 이스라엘이 분리되는 것처럼 교회도 분리 될 위험이 있습니다. 대신, 잘 듣는다면 께어진 것 조차도 다시 회복 될 수 있습니다. 아라비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듣고 있으면 내가 이득을 얻고, 말하고 있으면 남이 이득을 얻는다.”

2. 그러면 우리는 지혜로운 노인들의 말을 한 번 들어 봅시다. 7절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은 먼저 “백성을 후대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후대하라’는 것은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권력과 권위의 정점에 있는 왕에게 백성을 섬기라는 말이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열왕기상 12: 7에는 왕이 백성의 종이 되어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왕에게 종이 될 것을 권면하는 이 노인들도 참 용기 있습니다. 어쩌면 그 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멍에가 너무 무거워 왕이 종이 되어 그들의 멍에를 풀어주라는 것 인데, 르호보암이 그 말을 듣지 못해 백성들을 섬기지 못하고 여전히 군림하는 왕으로 남습니다. 결과는 자기만 손해입니다. 나라가 왕창 갈라져 나가는 험한 일을 겪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섬김이었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르호보암의 백성들 보다 더 못한 나와 같은 죄인 중에 괴수를 섬기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건데, 르호보암이 백성의 종이 되어 백성을 섬기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들을 섬기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진짜 왕은 섬깁니다. 왕 같은 제사장직을 받은 우리가 교회를 섬기며 성도를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됩시다.

그 다음은, 선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르호보암은 여로보암과 그 백성들에게 포학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13절).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친절하게 말하는 것과 거칠게 말하는 것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하는 것 역시 그 만큼 중요합니다. 잠언은 지혜의 책입니다.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잠언에서 크게 말하고 있는 지혜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제가 읽은 바로눈 첫째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말을 잘하는 것입니다. 잠언 25: 11 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잠언의 지혜만큼 말을 잘하고 있습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배려하여 최대한 친절한 그리고 선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 처음 왔을 때 아주 영어를 못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못하는 영어 입니다만, 그 때는 더 못했습니다). 미국 처음 와서 꼭 들러야 하는 곳이 DMV (차량국)입니다. 저는 처음 뉴저지 차량국에 갔는데, 그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얼마나 나를 무시하는가를 한 눈에 알아 보았습니다. 영어를 못해서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 말하는 태도와 인상에서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불친절의 덩어리는 금방 알아 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곳에서 일이 잘 처리 될 리가 없습니다. 아무 일도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영어를 못알아 들었다는 좌절감에다가 더 치명적인 것은 그들의 불친절한 말에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차량국을 갔는데 희얀하게 마치 짜놓은 듯이 동일하게 불친절한 말투였습니다. 그 때 안내를 하던 한 남자 흑인이 아주 난처한 나를 보고 다가와 아주 친절한 말로 또박또박 나의 문제점을 물어 왔습니다. 그 남자 흑인의 친절한 말에 며칠 동안 차량국에서 응어리졌던 모든 원한(?)이 다 녹아 버렸습니다. 물론, 그 친절한 흑인 남성의 도움으로 무사히 일을 다 처리 했습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친절한 말의 위력을 느꼈을 때입니다. 우리가 친절하고 선한 말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선하고 친절한 말에는 세금이 붙지도 않습니다. 잠언 24: 26에 이런 말도 있네요.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잠언 18: 21에는 무시무시한 말이 나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생과 사의 문제가 말하는 것에 달렸다고 하는데 르호보암은 백성들에게 폭언을 했으니, 나라가 갈려질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요. 미래입니다. 선하고 친절한 말을 사용합시다.

3. 왜 이렇게 르호보암은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됩니까? 왜 이렇게 영적 무감각 속에 있습니까?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르호보암이 살아 온 배경에 있습니다. 르호보암은 그야말로 전 지구 역사상 가장 부유한 가정 속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솔로몬의 그 엄청남 부유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멍에와 짐을 한 치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인들의 지혜를 들을 수 있는 삶의 배경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온전한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와 같은 것입니다. 마치 망쳐진 (spoiled) 된 망나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르호보암의 배경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 부유함이 편한 삶이 될 수는 있지만, 신앙의 성숙과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많은 위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노인들의 지혜로운 권면과 철 없는 궁중의 젊은이들의 충고를 비교해 본다면 상식적으로도 어느 말이 옳은 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르호보암은 그 상식선 안에도 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 만큼 물질적 부유함에서 자란 르호보암이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우리 이민자의 삶에서 물질이 부족하여서 어려움을 겪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물질의 결핍은 분명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결핍 가운데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물질의 결핍이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신앙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에 더 민감하게 됩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는 르호보암 보다는 결핍 가운데서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고 따라가며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한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이 주님께서 바라는 것입니다.

4. 르호보암의 미성숙한 처신으로 인해 나라가 갈려지는 것이, 사실은 이미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말씀한 것을 이루게 함이라는 것입니다 (15절). 이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누어지는 것이 단순히 르호보암 한 사람의 잘못으로 된 것이 아니라, 넓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열조차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분리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멸망사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리,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역시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회복도 하나님의 섭리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회복 역시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역대기 저술의 중요 목적을 짚어 봐야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어떻게 다시 다윗의 왕조처럼 회복할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남, 북으로 갈려진 이스라엘은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로 인해 회복 될 이라는 믿음입니다. 무너진 것이 여호와의 말씀에 응하게 한 것이라면 회복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응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깨어지고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조롱당하고 오해 당하고 멸시당합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욥의 시련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시련도 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 무너진 우리의 삶도 다시 회복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속에서 반드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 속에서 오늘의 넘어짐은 내일의 일어섬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슬픔은 내일의 웃음입니다. 오늘의 아픔은 내일의 기쁨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