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골로새서 3:1-4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교회에 오면 행복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신경쓰고 열받고 행복하지 못하고 예배하고 가면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행복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행복을 드릴테니 뉴욕 동포들이 생활 속에서 감사, 축복, 은혜와 함께하기 바랍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것으로 받아들이는 오늘이 되기 바랍니다.

아멘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개념의 최고의 의사소통, 교통되는 언어입니다. 또 자기와의 최고의 긍정 언어가 아멘입니다. 아멘이 얼마나 귀한 말인지 모릅니다.)

생각이 아름다우면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는 나병환자였던 나아만 장군의 병이 낫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사가 병을 낫게 해주고 아무 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하인인 게하시가 돌아가는 나아만을 뒤쫓아가 거짓말을 해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고 자기집 뜰에 숨겨놓고 엘리사의 뜰로 찾아갑니다. 이 때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네가 어디서 오느냐"고 묻습니다.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을 속여서 이 일을 했는데, 엘리사는 어떻게 게하시가 한 일들을 거울 들여다보듯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 엘리사가 게하시의 행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와 함께하는 하나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사무엘하12장에는 무명의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서 다윗의 범죄사건을 지적합니다. 다윗이 두 손들고 "내가 여호와 앞에 자복한다"고 합니다.쥐도새도 모르게 저질렀던, 다윗의 측근 몇몇만 아는 나쁜 행위를 어떻게 나단이 아느냐는 겁니다. 나단이 아는게 아닙니다. 나단과 함께하는 하나님이 아신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 판 값 얼마를 집에 감추고 나머지를 갖고 베드로 앞에 갑니다. 베드로가 "왜 성령을 속이느냐"고 합니다. 이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영혼이 떠나갔습니다. 땅 판 값을 떼어놓은 것을 베드로가 어떻게 아느냐는 겁니다. 역시 그것도 하나님아 아신다는 겁니다.

저는 뉴욕을 잘 모릅니다. 많이 왔다갔지만 개교회 부흥회를 하러 단편적으로 왔다갔지 연합집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세 번 나갈 때 기절초풍할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저 강사가 내 사정을 어떻게 속속들이 알고있지' 생각하실 겁니다. 그건 제가 아는게 아니라 주의 종과 함께하는 하나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상처입은 자, 사업이 어려운 자, 건강이 안좋은 자 하나님이 알아서 풀어주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말썽을 부려도 하나님이 열어주실 것입니다. 3일간 생각을 비우고 빈 마음, 빈 생각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생각이 앞서서 말씀을 받으면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길도, 슬픔도, 고통도, 질고도 가난과 사업의 어려움도 안다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열리고 풀릴 것으로 믿습니다.

생각이 좋으면 말도 좋게 나갑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얼굴 표정이 좋습니다. 생각의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 말입니다. 말의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 행동이에요. 생각이 건강해야 삶이 건강합니다. 생각을 비워두고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차기 바랍니다. 전선을 통해 전기가 흘러 전등이 들어옵니다. 전화선을 통해 우리가 상대방과 여기서도 통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축복과 은혜, 우리가 모르는 비밀한 일들이 어떻게 땅에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줄을 통해서 됩니다. 잔머리, 사람의 지식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에게 오는 줄로 믿습니다. 아픔을 안고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성령줄을 통해서 은혜주시는 것을 받기 바랍니다.

생각을 비우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잘 말해도 잘못들으면 안됩니다. 제가 망하라, 저주받으라 망하라 설교하겠습니까. 사업 잘 되고 자녀 잘 되고 만사 형통하라고, 말씀을 통해 축복할 것 아닙니까. 아무리 축복을 부어도 잘 들어야 합니다. 말을 잘 해야 합니다. 잘 말하고 잘 들어야 합니다.

잘들어야 합니다. 목사님들이 안되라고 설교하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다 성도들 잘되라고, 눈물을 쏟아가면서 주의 백성을 위해 목숨 건 사역을 하는데, 어쩌다가 말 잘못하는거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 행복과 불행도 생각에서 결정됩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하루종일 생각하는 자체라고 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그 사람이 됩니다. 술, 화투, 춤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각이 나면 갑니다. 그러나 말씀이 생각나면 예배당으로 옵니다. 생각의 방향을 돌리는 저녁이 되기 바랍니다.

제가 만일 내일 낮에 양복을 입고 춤을 추면서 거리를 다닌다고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보면 '어젯밤에 어떻게 됐나보네'하고 생각합니다. 양복을 입고 다니면 점잖아집니니다. 그런데 저도 예비군복 입혀놓으면 전봇대 앞에서 오줌쌉니다. '내가 이 옷을 입었구나, 조심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통제합니다. 그런데 예비군복 입으면 아무데나 주저앉고 아무데나 오줌쌉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세마포를 입혀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뉴욕 거리를 비틀거리고 다녔다면 예수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건강한 생각하시길 축복합니다.

제가 포항중앙교회에 1994년 부임해서 올해로 18년째 들어섰습니다. 교회 처음 왔을 때 항상 오른쪽 통로 중간쯤에 뿔테안경을 끼고 있는 40대 중후반, 50대 초반쯤된 분이 늘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예배 자세는 독특합니다. 예배 시간에 팔짱을 낍니다. 팔짱 끼는게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습관된 사람도 있어서 괜찮습니다. 그런데 꼭 5도 옆으로 돌아앉아서 3도 뒤로 기대 앉습니다. 7도 고개를 숙입니다. 이대로 가만 계시면 좋겠는데, 꼭 설교 시간이 되면 2-3번 묘한 행동을 합니다. 설교가 불꽃처럼 진행되고 있는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듭니다. 환장합니다. 여러분, 여기 올라와봐요. 다 보여요. 휙 돌아보면 다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행동을 하는 분에게 눈이 가니까 설교가 헷갈려요. 저는 20살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40살에 목사됐습니다. 단 한번도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남의 말을 나쁘게 한 적도, 원망의 말을 한 일도 없습니다. 축복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저주와 병듦과 가난 가운데 살던 내가 '이 길이 복받는 길이구나'알고난 후 출발이 입을 조심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버지가 데라, 우상장사입니다. 아브라함을 보니 저와 똑같습니다. 아버지가 증산도 태을주 수행을 합니다. 저도 경을 17개 다 외웁니다. 아버지 문화 가운데 자랐습니다. 데라와 아브라함, 아버지와 저를 비교하니까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이 되기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아들인 나를 보니, 나는 병들고 가난하고 못난거야. 왜 나는 다른가? 창 12:3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고 하십니다. 제가 그 은혜받은 것을 2인칭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1인칭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축복하는 사람을 복주고, 저주하는 사람을 내가 저주하겠다"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의 입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20살짜리가 '복받는 길이 여기 있구나' 깨닫습니다. 말하는대로 됩니다. 알고난 후에는 시궁창 안에서도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합니다. 아는 분은 아실겁니다. 제가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여러분도 그럴줄로 믿습니다. 말하는대로 됩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왜 남의 말을 나쁘게 하고 저주합니까. 왜 남의 말을 정죄하고 심판합니까. 심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입을 열면 감사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믿음생활 하면서 할 때는 인지하지 못하다가 말년에 허허벌판에 선 것 같이 되면 얼마나 을씨년스럽겠습니까. 병들어서 건강하지 못할지라도 "내게 복음이 있어 언젠가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믿을 때 행복한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 18세기 의식을 갖고 살 것입니까. 어려워도 축복하고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이 생각을 전환합니다. 또 이삭을 번제할 때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니 아들도 살리고 복을 받았습니다. 평민이었던 아모스가 생각의 전환을 통해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를 것이라 선포한 선지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기드온이 타작하다가 생각을 전환해 3백용사 역사의 주역이 됐습니다. 엘리야가 3년반 기도할 때, 하늘문이 열려 비가 오게 한 주인공이 됐습니다.

행 22. 사도바울의 고백을 잘 아시잖아요.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완벽한 바리새파 사람,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진 사울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다메섹 기독교인을 잡아죽이려고 쫓아갑니다. 중간에 주님을 만납니다. 세상 눈이 감기고 영안이 열리면서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으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를 이방을 위해 내 종으로 쓰겠노라" 바울이 뭐라 합니까? "나는 주를 박해한 사람, 하나님의 교회를 훼파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죽였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쓰겠노라" 사도 바울이 생각을 돌렸습니다. 이제까지 귀하게 여긴 것을 분토처럼 버리고, 그날부터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고, 3번 퇴장을 당하고, 1번 돌로 맞고, 죽을 때까지 고난가운데 살았으나 곳곳마다 흐르는 바울 사도의 메세지는 '기뻐하라 감사하라' 였습니다. 내가 기쁘고 감사하지 않은데 감히 누구에게 기쁘고 감사하라고 말합니까. 바울 안에는 기쁨과 감사가 넘쳤던 것이지요. 세상 모든 것을 가졌던 사울은 살기등등했으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최고의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는 것,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나는 사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입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바울과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모이신 분들만이라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시편 51편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고백처럼, 주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실 때 내가 살아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남들 고기 먹을 때 자장면 먹으면 어떻습니까. 좋은 반지 없으면 어떻습니까. 좋은 옷 안입어도 내 안에 예수 있으면 족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 동포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자존심만은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밤에 성령이 함께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이슬처럼 내릴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공의와 사랑이 함께 합니다. 매질하고 용납하고 사랑하고 품어주시는 아버지의 마음. 이 구약의 단어들이 헬라어로 번역될 때 70인 학자들은 '카리스'라는 말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번역하지만 이 말에는 단순한 은혜보다는 심오한 뜻이 담겨있습니다.은혜란 내 일생동안 나에게 필요한 좋은 모든 것. 하늘에서, 빛되신 주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오늘 밤에 모인 우리들이, 카리스라는 말 안에는 감사, 축복, 평안, 나에게 필요한 좋은 것의 의미를 담은 용어가 카리스입니다. 보통 단어가 아닙니다. 필요한 좋은 모든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옵니다. 다 구하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잘 듣지 않습니다. 약간 모자란 사람들은 하라는대로 합니다. 순종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들이 일생에 필요한 좋은 것을 한꺼번에 줄테니 받아라 합니다. 받았습니다. 섞었습니다. 오븐에 굽습니다. 기가막힌 빵 하나가 됐습니다. 나쁜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내가 필요할 때 빵을 뜯어먹으면 됩니다. 이게 카리스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은혜입니다. 내 일생 사는 좋은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이 역사합니다. 오늘 방에서 주무시는 것 보다는 말씀듣다가 주님을 만나고 뚫릴 것 뚫리고 풀릴 것 풀려야 합니다.

옛날 찬송가 94장, 개역개정 96장을 봅시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 없는 자의 풍성, 천한 자의 높음, 잡힌 자의 놓임, 우리 기쁨, 약한 자의 감함, 눈먼 자의 및, 병든 자의 고침, 죽은 자의 부활, 우리 생명, 추한 자의 정함, 죽을 자의 생명, 죄인들의 중보, 멸망자의 구원, 우리 평화, 온 교회의 머리, 온 세상의 구주, 모든 왕의 왕, 심판하실 주님, 우리 영광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내가 사는 동안 필요한 좋은 모든 것이 있습니다. 이 좋은 예수님을 왜 안믿습니까. 왜 수박 겉핥기식으로 믿습니까.

위의 것을 찾으십시오,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찾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와 목적이 다 있습니다. 자기가 체득한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보낸 것이 성경이 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예수를 찾아라, 생각하라는 것 아닙니까. 생각의 방향을 전환하기 바랍니다.

9월 10일이 자살예방의 날입니다. 한국은 하루에 43명이 자살합니다. 잘사는 세계 12대, 13대 강국에서 왜 자살을 많이합니까. 한 나라의 국부가 괴롭다고 힘들다고 자살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참 가슴아픈게, 목사님 중의 하나는 부엉이 바위의 피를 십자가 보혈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어떻습니까. 목사 입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길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그렇게 폄하하느냐는 말입니다.

한국 떠나고부터 안철수씨 바람이 붑니다. 신드롬이랄까, 뭐라고 정확하게 표현해야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대한민국 정치가 한 과학자, 교수에 의해 저렇게 맥을 못추고 휘청거리고 있는가. 가슴이 아픕니다. 거기다가 총선을 대비해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당을 만든다고 야단법석입니다. 옳다, 나쁘다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어디 있느냐. 생각이 어디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추구해야 성령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도 모두 다 이끌어가십니다. 교회는 시대의 지도자가 됩니다. 생각이 옷을 입고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귀한것인지 모릅니다. 세계 제1의 도시 뉴욕에서 할렐루야대회가 열립니다. 축복합니다. 대회를 마귀는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선배들이 눈물과 땀과 피를 쏟아 이 땅을 복음화 해보겠다고, 동포들 살맛나게 해보겠다고, 도덕도, 경제도 아니요, 살릴 것은 말씀이라고 믿었기에 시작돼 여기까지 왔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이어온 것 감사합니다. 이번 대회가 세계 경제 제1의 도시를 뛰어넘어서 하나님 복음의 사역 제1도시로 되는 분기점이 되었으면 좋습니다.

뉴욕 교민이 30만이라고 합니다. 그많은 기독교인들이 다 어디가고 여기에 빈자리가 있습니까. 뉴욕의 모든 교회들은 이 대회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세계제1의 경제, 문화의 도시보다는 복음의 도시라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그 때가 되면 할렐루야대회가 나올껍니다. 이런 대회마저 반대파가 있다고, 예산이 없다고 문닫으면 우리 후손은 어떻게 합니까. 선배들의 노고에 감사는 못할 망정 말입니다. 멋지게 생각의 방향을 전환해서 더 좋은 대회를 만들어가는 은혜가 있기 바랍니다.

세계 제1강국 미국하면, 뉴욕이 떠오릅니다. 여러분, 잘난분들입니다. 세계 제1의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뉴욕 하면 자유의 여신상이 떠오릅니다. 도시 개념을 떠올려도 뉴욕입니다. 전세계 의식 속에 뉴욕은 허드슨 강과 바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도시입니다. 살고 계시니까 잘 모를껍니다. 얼마나 가슴설레는 단어가 있는지. 이곳을 날마다 누비고 다닙니다. 미국 제1의 쇼핑 번화가는 5가입니다. 우리같은 서민들이야 구경하기 바쁘지만, 오늘 다녀왔는데, 눈이 훽 돌아가서 정신을 못차립니다. 이미 가을 것은 없습니다. 문화 세계 제1은 브로드웨이입니다. '해리와 셀리가 만났을 때' 이 영화 한 편으로 전세계 젊은이들은 뉴욕의 사계절을 보고 꿈을 꿉니다. 여러분은 심심하면 밟습니다. '나홀로집에'나오는 맨해튼의 세계에서 제일 큰 트리를 보고, 뉴욕의 겨울이 그렇게 아름다운거 아닌데, 영화에 나온 트리를 보고 온 세계 젊은이들이 가보고 싶어서 돈을 모으고 있다. 그런데 전세계인의 의식속에 뉴욕 하면 경제의 도시. 문화의 도시는 기억나는데, 복음의 도시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주제 요청을 받고 3주간 묵상하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포항 촌사람입니다. 시골뜨기에 내놓을 것도 없습니다. 부흥회를 잘 인도하는 분들은 이런 목소리도 아닙니다. 이 목소리 갖고 하면 재미도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 목소리 5분도 못내요. 제가 철들고 깨달았는데, 하나님 은혜는 말씀따라 옵니다. 어쨌든 촌사람이 왔습니다. 주제를 받을 때 정신이 번쩍들었습니다. '뉴욕이여, 생기로 충만하라' 무슨 주제가 이렇습니까. 성경 말씀에 나오던지 해야지, 매력적인 주제도 아니고. 세 번 연거푸 말씀을 주십니다. 준비한 모든 설교를 포기하고 다시 준비했습니다. 첫날 생각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내일 밤 말씀이 떨어집니다. 그래야 진실로 살아난다고 합니다. 믿음이 살아납니다. 살아나야 합니다. 안그러면 허수아비들만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셔 역사하신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맺힌 것 풀고 막힌 것을 풉니다. 이게 제가 받은 은혜중에 있었습니다. 경제, 문화 제1의 도시 뉴욕이 할렐루야대회를 통해 32년전 무릎꿇고 기도하던 할렐루야대회가 정말 기독교 복음문화를 만들어내는 큰 물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실 줄로 믿습니다. 소망을 잃은 자가 얻게될 줄로 믿습니다. 상처입은자가 위로를 얻습니다. 답답한 자가 힘을 얻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힘을 얻습니다. 얼굴에 핏기 없는 아버지 세대가 혈색을 얻고, 웃음을 잃은 어머니 세대가 파안대소하는 대회가 되기 바랍니다. 노인들의 얼굴에 희망이 보여야 합니다. 생각의 방향을 돌립시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장로님이면 헌금 많이 내고 집사님이면 적게 내야 합니까.

우리가 꼴뚜기처럼 살면 안됩니다. 깊은 수면을 볼 줄 알아야지 꼴뚜기처럼 뛰면 안됩니다. 망하게 하는 사람은 밑을 보지 않습니다. 수면 아래 어떤 것이 있는지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갑시다. 마른 뼈가 살아나게 해봅시다. 이성은 시간과 미래를 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고가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뀐다.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현재는 필연적인 과거의 산물이요, 미래의 원인이 됩니다.

현재가 있기까지는 필연적인 원인이 있었습니다. 선배들이 역사를 이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 후손을 위해 우리는 어떤 원인을 만들 것입니까. 부모인 우리가 10년후 자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까. 현재는 필연적인 과거의 산물이요, 현재는 미래의 원인입니다. 엘리야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이 백성을 살리는 빗줄기 내리심을 보았습니다. 무릎을 꿇어 기도합니다. 징조가 없느냐 사환에게 물어봅니다. 사환은 하늘 끝에 손바닥만한 구름이 있다고 합니다. 또 기도합니다. 빗소리가 들립니다. 적어도 이정도 식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6월의 사과를 보지 말고 9월의 사과를 보라고 합니다. 6월의 사과는 쓸모없습니다. 그러나 3달 지나면 토실토실합니다. 오늘의 우리는 6월의 사과를 보고 결론을 내려고 합니다.

집에 앉아 티비보는 분들보다는 여기 오신 여러분들이 복받았습니다. 살고 죽는 문제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삶의 좌표가 되길 축복합니다. 답이 나오면 걷게 되어있습니다. 회복됩니다. 오늘 전도안하고 놀면 내일이 없습니다. 지금 좋다고 술마시면, 그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내일이 있는 사람이 성공자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 긍정적 사고를 훈련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요13:2에 마귀가 가롯 유대에 생각을 넣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유대가 예수님을 왜 팝니까. 그럴리 없습니다. 마귀가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팝니까. 교인들이 담임목사 미워할 이유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교인이 왜 괴롭힙니까. 마귀가 목사를 대적하라는 생각을 넣었더니 그렇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지 마귀의 도구가 왜 됩니까.

좋은 생각하고, 기뻐하고, 축복할 줄 알고, 칭찬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이렇게 살아봅시다.

하나의 상황이 삶의 여정 가운데 반복됩니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본고사를 앞둔 상태에서 어떤 아이가 펜을 돌리다가 떨어졌습니다. 그 아이는 "이제 난 대학에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대학 입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펜이 떨어졌으니 이게 떨어질 징조라고 합니다. 그런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다른 아이가 다시 펜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펜이 땅에 붙었네" 합니다. 이미 상황은 끝났습니다. 끝난 상황을 한 아이는 떨어진 것으로, 한 아이는 붙은 것으로 봅니다. 떨어졌다고 한 아이는 생활 문화가 의식 가운데 젖어서 행동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징조가 그렇다고 라고 하니까 의식구조가 채색되어 부정적이 됐습니다. 다른 아이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마음으로 사니까 떨어져도 붙었다고 합니다. 두 아이의 장래는 이미 결정됐습니다.

제가 어느날 설교에서 훌륭한 목사님을 꼽아보라고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조용기 목사님, 김삼환 목사님 등 7명이 나왔습니다. 제 이름이 언제 나올까 네 번을 물어봤습니다. 마지막으로 물었을 때 어떤 성도가 '서임중 목사님'을 부릅니다. 성도들의 의식이 그렇습니다. 마냥 큰교회 목사님만 바라보고 담임 목사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주일 본 교회에서 설교를 위해서, 성도를 위해 온갖 기도를 하느라 무릎을 꺾어야 되고, 설교 한 편 나오는게 쉬운 줄 아세요. 그렇게 설교하는 우리 목사님이 귀한줄 알아야 합니다. 내 신앙, 내 문제 있으면 누가 기도해줍니까. 담임 목사님 만나서 기도해주세요 하면, 상황을 절박하게 알고 기도할 자가 담임 목사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모르는 목사한테 가서 기도해달라고 하면 어떤 목사는 봉투 받아먹고 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크다고 자랑할 것 없고 작다고 주눅들 일 없습니다. 작으면 작은대로 내 교회, 주님의 백성을 관리하고 생명을 주는게 사역자라면, 교회 사이즈가 뭐 문제입니까. 여러분의 교회가 최고입니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전을 펴는 보따리 장사가 많습니다. 그런다고 돈 많이 법니까. 한 곳에 전을 편 자는 빌딩을 세웁니다. 쏘다니며 그러지 말고 지금 있는 곳에서 뿌리를 박으세요. 교민 교회를 다녀보면 가장 가슴이 아픕니다. 교회 협의회를 중심에 두고 연합해서 가십시오. 주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가보기 전에는 누가 천국갈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선하게 살아야 한다. 이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배가, 비행기가, 자동차가 그냥 갑니까. 길을 따라 갑니다. 성도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생각의 방향부터 정리하는 것입니다. 오늘밤 여러분들 좋은 생각하시기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의 외로움과 아픔을 다 아십니다. 오늘 아프다고 내일도 아픈거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머리가 예수로 채워져야 합니다. 풀리는 것입니다. 열리고 뚫리는 것입니다.

▲서임중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