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었던 저는 가슴속 깊은 곳에 파묻혀 있었던 상처, 약점, 가시로인한아픔을 쉽게 공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보다 저를 더 온전히 아시는 치료자 하나님을 만난 후 전 제 약점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약점을 기회있을 때마다 드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도리어 자랑게 생각합니다.

제가 어릴적 부친은 6.25 전쟁 상이용사로 신체장애가 많으셨습니다. 한쪽 눈이 실명되어 늘 안대를 하고 다니셨고, 가끔씩 씻어 내는 가제 손수건에는 피고름이 혼곤히 배어 나오곤 했습니다. 어깨와 무릎에 차마 빼지 못한 여러 조각의 파편은 절룩거리며 걷게 하였고, 심각한 전쟁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가운데 보내야 했습니다.

뒤틀려진 육체만큼 그의 영혼도 큰 상처를 입었는지 늘 술과 담배에 쩔어 사셨습니다. 술을 탐하는 정도에서 심각한 알코올중독자로 바뀌면서 점점 제 부친은 포악스럽게 변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아내와 2남2녀의 자녀들은 험악한 악담을 일방적으로 듣는 푸념의 대상으로, 때론 우울한 기분을 푸는 샌드백으로 갖은 가정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야 했습니다.

그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역할대신 술에 취해 인사불성되는 횟수에 비례하여 가정은 점점 더 피폐해졌고 가족 구성원들은 더 많은 아픔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커가며 단 것이 너무 먹고 싶어서 어머니 쫓아 마실 간 이웃집에서 난생 처음 보았던 불소치약이 신기해서 살짝 맛을 보았더랬습니다. 톡 쏘는 불소탓에 매운감이 들었지만 달큰한 맛에 손가락 길이 만큼 눌러짜서 어금니 깊숙히 넣어 치약을 빨아 먹던 어린시절을 기억 합니다.

신체장애 때문에 변변한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던 부친이 간신히 운영했던 콩나물 가게. 펌푸 물을 오래도록 길어 올려 검은 천으로 덮은 붉은 화분에 흠뻑 주는 일은 제 차지였습니다. 소복히 자란 노란머리의 콩나물을 통째 날라 배달하던 것도 팔목이 새다리같이 가느다랗던 열두살난 어린 제 일이 었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상한 눈에서 피고름이 심하게 나자 부친은 저를 데리고 안과에 다녀왔습니다. 의사는 상한 안구를 빼내고 주변 실핏줄을 인두로 지져 피고름을 멈추게 하고, 상처를 소독한 다음 덩그란히 큰 공간에 의안을 넣어 주셨던 것 같습니다.

한없이 서러우셨던지 돌아오는 길에 소주를 몇병이고 비워내신 후 측은히 바라보던 어린 저를 기절할 정도로 심하게 두들겨 팬적도 있었습니다. 군대에서도 그런매를 다시 경험하지 못할 정도로….끔찍한 추억들이 어린 저의 영혼에 어지러운 군상으로 하나하나 굵은 상채기로 남아 있었습니다.

올망졸망한 자녀들이 아버지를 필요로 할 때 그는 간암으로 짧은 인생을 접어야 했습니다. 원망과 회한을 뒤로 한채, 호구지책이 막연한 다섯식구를 남겨두고 바람처럼 홀로 떠나가셨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마냥 울고 있었던 저희 가족은 안양에서도 가장 가난한 피란민촌 달동네에 살았습니다.

1977년 여름 때마침 안양에 쏟아 부었던 집중호우로 산자락 밑에 둥지를 튼 게딱지 같은 빈자들의 집이 산에서 쏟아져 내린 토사로 함몰되었을 때 저희집도 매몰 되어습니다.

거대한 천둥번개가 연거퍼 산중턱을 치는듯 싶더니 아차하는 순간에 산사태가 덮친 것입니다. 날렵하게 피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대학입시를 앞두고 한참 수험준비하던 교과서며 세간살이 하나 건지지 못한채 홈리스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좌우 양옆에 살던 사십여명의 이웃들의 시신이 진흙더미 아래서 한구한구 복구되어 장례를 치룰 때 저희 가족은 구세군교회 교육관에서 6개월을 교우들의 보살핌 속에서 홈리스로 살아야 했습니다. 고마우면서도 얼마나 불편하고 창피했던지 유약한 성품이 더 움츠러들었던 때였습니다.

이렇듯 역기능 가정에서 보냈던 청소년 시절의 제 모습은 많이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수줍음 많고 표현력이 부족했으며, 상처로 인해 쉽게 변덕스럽고, 화도 잘내고 신경질적인 성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안에서 자란 저를 오랫동안 옭조였던 낮은 자존감은 저를 모든면에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굳히는 듯 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런 저에게 여호와 라파로 다가오시며 나지막히 부르셨습니다.

교회 학생회장으로 여름 성경학교를 이끌고 마무리하던 마지막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서원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부르셨습니다. 상처와 약점과 가시 많은 저를 주의 일에 목사와 선교사로 부르심을 확인하고 주의 종이 되길 약속하는 특별한 서원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남미 선교지에서 도시빈민들과 헌신짝처럼 버려진 인디오를 적지않은 세월동안 섬길 수 있었습니다.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일이라면 피곤한 줄 모르고 뛰어 다녔습니다.

파라과이 짜꼬에선 거지로 전락한 마까 아메리카 인디오를 보살펴드렸습니다. 거치른 광야에 짐승처럼 방치되어 있던 불쌍한 인디오들이 가여워 거름더미 차를 얻어 타고 다니며 돌아보았습니다.

때로 예배와 치유사역이 늦어져 얻어탈 차도 끊어졌던 심야엔 반딧불이 호위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얼기설기 야자수 잎으로 엮은 울타리 지붕아래 맨땅에서 피골이 상접한 채 폐결핵을 앓는 인디오들이 가여워 바나나를 심어주다 대상포진에 걸려 심한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굿스푼의 지난 3년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기간이었습니다.

3년전 거리에서 아주 작게 시작했던 거리 예배와 급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분들만이 아니라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분들도 모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드리는 분들이 상전인냥 착각하며 교만하지 않고, 도움을 받는 분들도 도움을 받는다는 이유로 위축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서로 나누는 굿스푼에는 존경과 사랑만이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힘입어 굿스푼은 안과 밖이 같은 단체, 가까운 곳으로부터 인정받는 단체, 세상의 상식을 지키는 단체가 되기 위해 애써 왔습니다.

우리만이 특별한 일을 한다는 교만을 경계하는 가운데, 주변으로부터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며, 선교와 구제, 교육 분야의 전문가들을 세워 일하고 있습니다.

라티노 형제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먹으며 축구하며 우정을 다졌으며, 진정으로 타민족 종업원을 사랑하여 섬기는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한인업체를 선하여 ‘굿스푼 어워드’를 시상하고 있습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약속을 지켜 행한 거리급식을 통해 2006년에만 해도 15,450인분 이상의 식사가 무료로 제공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굿스푼이 모시고 가는 빈민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신 많은 한인의사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정도 많은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굿스푼을 통해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굿스푼은 큰 일을 단기간에 하고자 애쓰지 않겠습니다. 작은일이라도 신중히 준비하여 꾸준히 추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굿스푼을 아껴주신 후원자, 중보기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귀한 동역자된 김정수 총무, 조영길 선교사, 페어팩스 한인교회 양광호 목사, 이사장 김후남장로를 비롯한 8명의 이사, 김영조 권사, 최정선 집사 부부, 김종택 집사, 김학영장로 부부, 이동철집사 부부, 장석란 권사 부부, 정정호 집사 부부, 김철민 변호사, 홍윤성 자매, 매년 600명이상 자원봉사자들이 방문하여 물심양면으로 돕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귀한 동역자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문재가 없어 글쓸때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3년간 매주 한차례씩 선교현장에서 있었던 따뜻한 얘기들을 화려하지 않지만 솔직담백하게 담은 글들을 모아 책으로 발행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감히 책으로 엮을 지혜와 힘이 제겐 없었지만 굿스푼의 보물 같은 동역자 김정수형제, 허 왕형제, 안성신자매, 최윤덕장로, 홍윤성자매 등의 사랑어린 협조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글 김재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