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 목사소위, '주입식 교육'과 '사지선다형 찍기 시험'으로만 대학까지 진학한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대부분 '사고력 마비'와 '창의력 부족' 그리고 '절대 의존 증후군'이라는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정해진 교과서로 암기 위주의 반복적 학습을 받아 온 우리들이 대학에 가면서 직면해야 했던 가장 큰 문제는 '사고'하고 '판단'하고 '창조'하는 생소한 '학습법'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제까지 이유식을 먹던 아기가 갑자기 딱딱한 누룽지를 먹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내 몰린 것입니다.

기존의 학습방법을 다 뒤집어야 하는 혹독한 혼란기 속에서 가슴앓이를 하던 우리들을 찾아 온 생소한 젊은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르트르', '카프카', '까뮈', '생떽쥐베리', 그리고 '막심고리키' 같은 새로운 가치 창조를 부르짖는 '저항 문학가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만성화된 바이러스에 시달리던 우리들에게 긴급 처방된 '강력 항생제'와도 같았습니다. 그 중에서 저의 가장 큰 우상은 언제나 '프리드리히 니이체'였습니다. 특히, 그의 '낙타 이론'은 '추수 때의 얼음 냉수'와 같은 강한 매력을 주었습니다.

니이체는 "새로운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먼저 뱃속을 비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거의 기억들로 가득 차게 되면, 현재의 역동적인 자유와 기쁨을 맛볼 수 없게 됩니다. 과거 기억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현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 '낯선 것' 그리고 '불편한 것'으로만 경험합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옛 것'만 이야기합니다. 권태스럽습니다!

이들은 '사막'이라는 거대한 인생의 모래밭에서 습관적으로 짐을 나르는 '낙타들' 같습니다. 그들의 얼굴 표정 속에서 다양한 변화를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에게 부과된 '짐'을 운반할 뿐입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전통과 체제가 부여해 준 '과거의 가치관'을 신봉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쉬는 시간에도 그늘에 앉아 이미 먹은 과거의 음식을 되새김질 할 뿐입니다. 낙타에게 변화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니이체는 우리 안에 잠자는 '사자'를 깨우라고 말합니다. '사자'가 되어야만 무거운 짐을 털고 미래를 향해 주체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사나운 사자의 등에 짐을 얹을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사자를 올라 탈 수가 있겠습니까? 자유롭게 활보하면서 마음껏 포효할 수 있어야 인생입니다. 먼저, 내 안에 있는 낙타가 죽어야 사자로서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니이체의 생각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그의 획기적인 생각은 두려운 미래를 향해 과감하게 마음의 빗장을 거둘 수 있는 대단한 용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미국에 처음 올 때, 제일 먼저 해야 했던 일은 '한국에서의 과거'를 잊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낙타가 아니다!' 켄사스 위치타에서 첫 목회를 마치고 로스엔젤레스로 올 때도 다시 한번 내 안의 낙타를 부정해야 했습니다. '나는 미국의 어느 시골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마치려고 태평양을 건넌 시골뜨기 낙타가 아니다!' 이제 우리 LA 연합감리교회를 섬긴지 5년째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저는 다시 한번 내 안에 낙타와 직면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과거에 사로잡혀 사는 낙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를 짊어지고 있는 낙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항상 두 갈래의 선택이 놓여져 있습니다. 과거의 습관과 행동 양식과 전통에 매여 되샘김질만 하는 낙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미래를 향해 힘차게 도전하는 사자가 될 것인지? 힘들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결단해야만 하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빌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