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마땅히 구해야 할 것(미주한인여성목회자협의회 뉴저지중보기도모임 1회)
본문: 마 5:1-12
설교자: 김에스더목사(개신교수도원수도회 디렉터)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복이라고 하면 재물, 명예, 건강, 장수, 자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희 조상들과 부모님들은 물질, 명예, 건강, 장수, 자녀 잘 되는 것을 구해 왔습니다.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한국 전통문화의 영향으로 여전히 동일하게 물질이나, 명예, 건강, 자녀 잘 되는 것을 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요. 우리에게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시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5:1-12절까지를 8복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복이 무엇인지 복의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복은 희랍어로 makarios인데 4가지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makarios는 신의 존재나 속성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즉 복은 하나님자신이며, 하나님 속성을 닮는 것이 복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을 소유하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이라는 뜻입니다. 2) 앵글로 색슨어에서 복은 본래 피의 제사라는 의미의 말에서 blessing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성별해서 드리는 것이 복이라는 말입니다. 3) makarios란 말에는 남의 생애에 기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라틴어로 benedicere복이란 남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해준다(speak well of).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간에 그에 대해 좋게 얘기하며 그의 생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4)복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이나 명예나 환경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자기 안에 샘솟듯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복은 예수님을 소유하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 되는 것,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릴 수 있는 것, 남에게 은인이 되며 남을 칭찬할 줄 아는 것, 내 안에 솟구치는 행복의 절대요인을 소유하는 것이 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을 우리들이 마땅히 구해야 할 복이라면 우리의 삶에 필요한 물질이나, 명예나, 건강, 자녀라는 현실을 무시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 33).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먼저 간구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간절히 구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8복을 살펴보겠습니다.

8복을 원어대로 읽는다면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러 이러한 사람이 복이 있으니 이러한 사람이 되라는 뜻인 줄 압니다.

첫째로 복이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심령이 가난 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우리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으로 곧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나 자신을 보면 자연히 나는 너무나 허물 많고 죄 많고 실수투성이인 부족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낮아 질 수밖에 없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인 것 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신문에서 David Kim이라는 사업가에 대해 읽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CBS TV의 언더카버보스라는 프로그람에 성공한 사업가라고 소개된 Korean-American입니다. 그는 13세 때 노점에서 팽이를 팔던 소년인데 이제 42세가 된 그는 바하 프레시라는 멕시칸 restaurant의 CEO로서 전국에 500개의 chain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젊은 나이에 이처럼 사업적으로 성공하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motive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외교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학벌, 배경, 자존심 다 내려놓고 가족을 위해서 노점상을 하는 것을 보고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외교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위해서 노점상을 할 수 있는 겸손, 이것이 바로 오늘날 아들을 재계의 큰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어떤 목사님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29년 전의 얘기입니다. 그의 교회는 Jersey City에 있었고 성도는 50명쯤 모일 때였습니다. 그의 성도 중 에 남의 집에 입주하여 가사 도우미로 사시던 할머니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딸과 살림을 합하게 되자 Trenton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그곳에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시고 목사님은 어린 세 아들과 아내를 차에 태우고 2년 동안 그 할머니를 왕복 4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다니면서 pick up 했습니다. 젊은 집사들은 목사님을 비웃고 그 무식하고 늙은 할머니 한 사람 교회 데려온다고 교회가 부흥하겠느냐고 비꼬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이 일을 하찮은 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기쁨으로 pick up했습니다. 결국 그 할머니는 타주로 이사 가게 되어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그저 자리 한 자리 채워주는 것뿐이었을지 모릅니다. 목사가 주일예배를 더 은혜스럽게 하는데 그 4시간을 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간의 효율성 면이나 교회성장에 유익을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은 일일 수 있습니다. 꼭 목사가 주일에 그래야 되는가 하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목회는 사람의 계산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아주 좋은 분을 교회에 보내 주셨습니다. 남가주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직장을 얻어 뉴저지로 이사 오신 그 분이 왕복 세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에서 아내와 세 아들을 에어컨도 없는 작은 차에 태우고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는 유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상담하고 심방하여 작은 목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가 포항공대에 박사과정담당 교수로 한국에 나갈 때까지 6년간을 그 교회와 목사님을 겸손과 온유로 섬겼습니다.

이 교회는 그 후로 점차 부흥하여 장년과 어린아이 합해 주일에 2,00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고 그가 목회했던 30년 10개월 동안 한 번도 갈라지거나 눈에 띄는 다툼이 없었던 평화로운 교회로 이름을 얻게 되어 여러 신학교에서 연구대상으로 방문한 적도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사님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지극히 낮아져서 한 영혼을 섬기는 겸손을 보시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목회는 하나님이 친히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붙여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며 목회의 길을 인도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목사가 충성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는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중심에 진실로 겸손한 자, 겸손한 목사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 위해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어거스틴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덕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이 대답합니다. “겸손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도 겸손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요?” “세 번째로 중요한 것도 겸손입니다.”

저의 남편 목사님이 31년 전에 copy machine도 없고 낡은 typewriter만 한대가 있는 가난한 교회에 부임하셨습니다. 저는 그 타자기로 주보, 공문서와 주소록을 쳤습니다. 그 후 교회가 부흥하여 비서만 두 명이 되었고 여러 부교역자를 모실 수 있어서 저는 전화 받는 일조차 할 필요가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지난 12월에 은퇴하고 은퇴 후 사역으로 개신교수도원수도회 Protestant Abbey Mission(PAM)을 창설하셨습니다. 저는 director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Director는 부목사지위이지만 아직 비서나 사무직원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제가 30년 전에 했던 것처럼 타이프 치는 것이며 서류 정리하는 일까지 다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 가끔 “박사님한테. 고급인력의 낭비 아니야?”할 때가 있었지만 이 말씀을 공부하고 난 후에는 기쁨으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는 보상은 무엇입니까? 천국이 저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죽어야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합니다. 겸손한 자는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가는 곳곳마다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천국이 따로 없으니 얼마나 복된 삶이 되겠습니까?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애통한다고 해서 무조건 위로와 축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 10).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세상근심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기를 원하는데, 성공하기를 원하는데, 얻지 못하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 이것은 참 애통이 아닙니다. 또한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애통도 참 애통이 아닙니다. 창 4:13절에 보면 아우를 죽인 가인이 하나님이 내린 죄에 대한 징벌에 대해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죄의 결과로 인해 직면해야 하는 현실의 짐이 너무 무거워 애통하는 것은 참 애통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죄 자체에 대해서 아파하면서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야 할 하나님의 덕은 없고, 없어야 할 죄가 있는 것으로 인해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자신이 저지른 죄를 선지자 나단을 통해 지적 받았을 때 자신의 죄를 토설하면서 침상이 젖도록 자신의 죄를 아파하면서 통곡하며 애통해했던 것,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이며 구원에 이루는 애통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나왔을 때 자신의 불의한 모습을 보고 절망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라고 애통했던 바로 그 애통을 말합니다. 웃시야왕이 죽고 난 후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엎드려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6: 5)하며 애통했던 것을 말합니다. 참된 애통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인도하고 진정한 구원이 우리 삶에 이루어집니다. 이 애통은 몇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애통은 현재시제로 되어있어 계속해서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성령께서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해지도록 하셔서 계속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무엇입니까? “애통해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위로를 받는다는 헬라 어는 곁에 라는 전치사와 ‘부르다’라는 동사가 결합된 것입니다. “곁에 누군가가 부름을 받아 서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이 보혜사라는 말이 바로 똑 같은 말입니다. 부름을 받아서 곁에 서 계신 분. 성령님!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은 바로 우리 곁에 서 계신 분입니다. 여기서 위로를 받는다는 말이 이와 똑같은 단어로 씌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참으로 아파하는 심령에게 성령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서 용서를 경험하며, 치유를 경험합니다. 은혜로우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계속적으로 애통해 하는 자에게 인격의 성숙이 있고 성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는 주님의 임재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i. 시간 관계상 2가지 복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매주일 두 군데서 성경반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한군데는 개신교수도원수도회(Protestant Abbey Mission)이라고 해서 PAM성경반을 인도하고, 또 하나는 어느 2세 교회에서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여성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두 class에서 8주간에 걸쳐 8복을 강해하고 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서 끝나지 아니하고 매주 배운 것을 practice하는 숙제를 내주어서 다음 주에 간증을 하게 했습니다. 한 엄마는 이제 7학년된 아들과의 갈등에서 폭발할 지경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배우고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 그대로 실천하는 가운데 사춘기 아들과의 화해를 이루었던 간증을 하였습니다. 또 한 분은 미국에서 좋은 대학교를 나왔고 영어와 컴퓨터에 뛰어난 사람이지만 직장을 잃었습니다. 아내가 힘겹게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오랜 기간 동안. 그런데 부부가 저의 성경반에 와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공부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문제로부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넘게 떠났던 교회에 이번 주부터 다시 출석하겠노라고 또 다음 주 월요일부터 괜찮은 직장에 나가게 되었노라고 메일을 보내 왔습니다.

제가 8복을 강해하면서 배운 것은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교우들에게 필요한 복이구나, 교우들의 삶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건강하게 돕는 것이구나 그런데 과거에 너무 기복적인 것을 구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8복은 결국 성령 안에서 새로 변화된 자들이 받게 될 영성과 인격을 소유한 자들이 누리게 될 복인데 과연 나는 이 마땅히 구해야 할 인격과 영성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투쟁했는지 회개하면서 제 기도생활의 방향을 바꿔 준 말씀을 여러분들과 나누었습니다. 여러 목사님들의 기도생활에도 먼저 마땅히 구해야 할 것들을 먼저 구하며 성도들을 그렇게 지도할 수 있는 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