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돈 로빈슨 교수. | |
디딤돌 아카데미 주최 ‘들어야 할 말씀·들려지는 말씀(Word to hear, Word to be heard')’이라는 제목으로 설교 컨퍼런스를 2월 28일과 3월 1일 양일에 걸쳐 필그림교회(담임 양춘길 목사)에서 진행했다. 이번 컨퍼런스에는 강해설교의 최고의 권위자로 평가받는 해돈 로빈슨 교수와 이야기 설교학의 저자이며 현 한국 장로회신학교 객원교수인 이연길 목사가 강사로 나섰다.
첫째 날에는 해돈 로빈슨 교수의 설교로 시작해 강해설교와 이야기 설교의 이론을 다루는 세 번의 강의가 진행됐다. 둘째 날에는 이연길 목사의 설교로 시작해 전날 강의를 실제 적용하여 설교하는 실전시간 등이 진행됐다. 또 둘째 날에는 강사와 청중 간의 질의 응답시간이 마련됐다.
해돈 로빈슨 교수는 질의응답 시간에 "설교는 현재 그 사람(설교 대상자)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해돈 로빈슨 교수는 "20대 청년이 부모와 같이 살고 있다면 그런 생활은 어떤 생활일 것인가 생각합니다. 일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 연상합니다. 한 30대의 젊은이가 뉴욕 다운타운에서 일하며 날마다 긴 시간 출퇴근하며 지낸다면 그것도 염두에 둡니다. 그렇게 함으로 내가 전하는 설교가 이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이 사람 삶 속에 적용이 될 수 있겠는가 생각합니다"고 전했다.
또한 해돈 로빈슨 교수는 "설교할 때 사람이 가진 필요를 무시할 수 없다. 배고프다 하는 사람에게 당신 배고픈 거 아니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정말 필요한 것을 일깨워줄 수 있다. 회중이 있는 시점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해돈 로빈슨 교수는 "그리고 제 상상 속에 만들어진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삶도 시간에 지남에 따라 변합니다. 그래서 변화를 민감하게 염두에 두고 설교를 준비합니다"라며 "제가 원하는 것은 아무도 관심이 없는 질문을 가지고 답을 주는 설교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가진 문제와 의문점에 답을 줄 수 있는 설교입니다"고 덧붙였다.
해돈 로빈슨 교수는 프리칭(Preaching)지에서 지난 25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25명의 설교가의 한 사람으로 지명되었고, 크리스처니티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서는 지난 50년간의 10대 설교가로 선정되었다.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달라스 신학교, University of Illinois(Ph.D)를 졸업했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19년간 설교학을 가르쳤고, 덴번 신학교에서 12년간 총장으로, 그리고 1991년부터 현재까지 고든 콘웰 신학교의 설교학 석좌교수로 있다. 설교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강해설교의 최고의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강해설교','탁월한 설교에는 무언가 있다'외 다수가 있다.
다음은 해돈 로빈슨 교수와 참석자 간의 질의응답 내용이다.
-설교 준비 할 때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20대 청년이 부모와 같이 살고 있다면 그 생활은 어떤 생활일 것이다 생각한다. 아마 일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일 것이라 연상된다. 한 30대의 젊은이가 뉴욕 다운타운에서 일한다면 날마다 긴 시간 출퇴근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 내가 전하는 설교가 이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떻게 이 사람 삶 속에 적용이 될 수 있겠는가 염두에 둔다.
요즘 시대에 직장에서 일하는 20-30대 젊은이들은 성경을 읽을 시간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젊은이를 염두에 두어 두고 설교를 준비할 때는 선택한 본문에 대해서 배경을 충분히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나에게는 익숙하지만 젊은이에게는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물론 제 상상 속에 만들어진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삶은 시간에 지남에 따라 변한다. 변화를 민감하게 염두에 두고 설교를 준비하게 된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아무도 관심이 없는 질문을 가지고 답을 주는 설교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가진 문제와 의문점에 답을 줄 수 있는 설교이다.
저는 일터신앙그룹의 이사진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우리가 별도로 웹사이트를 만들어놔서 누구든지 들어와 볼 수 있게 해 놨다. 95%에 해당하는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의 일터에서의 선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회중들, 교인의 대부분은 하루의 많은 시간을 다 일터에서 보내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일터에서의 선교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나누고, 또 다른 세션에서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서 다룬다. 어떤 사람은 비서, 어떤 사람은 배관공이라는 직업을 갖는다.
일터신앙그룹의 구성원은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다. 뉴질랜드, 호주, 남아프카에서 신앙과 일에 대한 관심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
-상담한 내용을 설교에 전하는 것은 어떤가요? 그리고 주일 설교 내용을 급히 바꾸는 것은 괜찮은가요?
나를 찾아와 상담했던 문제를 설교에 노출해 말씀을 전하면 안 된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서 일어난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설교에서 언급해야 하는 필요가 있다. 플러턴에서 척이라는 목사가 목회할 때 한 장로님이 어린 아이를 학대(Abuse)한 일이 있다. 척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그 일을 알게 된 때가 주일 전 목요일이었다. 그 지도자들이 장로를 불러들여서 사실 확인을 한 결과 실제 그랬다는 것을 인정했다. 척 목사는 그 다음 주에 그 일을 설교에서 언급했다.
이러한 일을 덮어두기보다 교회 회중에게 그대로 알리고 교회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즉시 대처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비밀을 보장해야 할 경우가 있지만 범죄일 경우 밝히 드러내야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원래 선택한 본문이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에 직접적인 답을 못 준다면 본문을 바꿔서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주려고 할 것이다.
예를 들어 9.11 테러같이 교인들이 상처 입고 있는 상황일 때는 이에 대한 설교를 할 책임이 있고 언급할 수 있는 설교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9.11 터진 6주 후 강사로 초청 받았는데‘9.11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겠나?’하는 주제였다. 아침 식사하며 가진 모임이었다. 여러분이 일을 가야 해서 그 시간에 제 메시지를 마무리하겠다 했다. 그리고 질문을 받지 않도록 해서 곧장 일을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시간이 돼서 이제는 다 일터로 가야될 상황임에도 한 사람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문제였고 실제적으로 그 그룹에는 당시에 빌딩을 쳤던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의 조종사의 아내가 같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때 그 모임은 9.11 사태 이후 바로 다음 주에 전해야했던 메시지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모임이었다 생각했다.
우리가 이미 준비해놓은 설교라고 하더라도 주일이 오기 전 어떤 실제적인 사건이 터지게 되면 준비했던 설교와 본문을 놓고 사건에 걸맞은 본문을 다시 선택해서 설교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준비했던 설교를 가지고 그대로 그것으로 지금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답을 주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과감하게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단 그 본문을 가지고 본문이 제시하지 않는 답인데 본문에서 나오는 답같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잘못 남용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간하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다.
-강해설교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강해설교의 장점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이연길 교수님의 이야기 설교와 비교해 주셨으면 좋겠다.
우리가 설교하는 것은 유일하게 성경 말씀이다. 우리가 만약 성경을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할 말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정부에 대해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이슈에 대해 강단에서 전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을 말하지 않는다면 강단에서 할 말이 없다.
성경의 대부분은 이야기로 돼있다. 구약성경은 많은 이야기로 구성이 돼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신학적인 이슈들을 이야기로 펼쳐 놨다. 복음서가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야기하실 때도 비유의 이야기를 하셨다. 사도행전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탄생한 초대교회의 이야기이다. 성경의 말씀이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를 강의로 바꾸지 말라. 성경의 저자가 포인트의 목록을 조목조목 나눌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랬다면 그렇게 성경을 기록했을 것이다.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잘못 사용하지 말라.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충분히 살리기 바란다. 이야기 자체가 가진 파워를 잃어버리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예수님께서 위대한 신학자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께서 훌륭한 이야기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서 누가 위대한 신학자냐 물어보면 바울, 요한이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 그리스도에 대해 예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러분이 강해 설교를 하게 된다면 성경의 대부분의 내용이 이야기식으로 써졌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게 우리에게 참 유익이 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자체가 이야기 문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보는 TV 프로그램, 영화 모든 것이 이야기를 통해서 가치와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이야기식으로 설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냥 아무 이야기나 가지고 와서 진리를 전달할 수는 없다. 반드시 성경의 이야기가 전달이 돼야 한다.
-LA에서 온 목사인데, 일부 교회에서는 말세론에 관심이 높아져 요한계시록 설교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어떤 부분은 저명한 학자도 의견 일치가 안 되고 상충된다. 그런 문맥은 어떻게 적용할 수 있나? 교수님도 요한계시록 설교를 하셨을 터인데 일반적인 유의사항이 있으면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 신문 지상에서 얘기하는 것에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제가 자라온 배경에서도 이런 영향이 있었다. 신문 지상에 나타난 사건 그것을 그대로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이러한 내용이다고 직결시키려고 하는 그러한 위험이 있다. 그래서 아침에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탑 기사들을 그대로 설교에 적용하는 유혹을 많이 받았다. 바로 그런 배경에서 이러한 위험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의 핵심은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의 전쟁. 싸움을 말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악이 선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승리로 이끄시고 선이 악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메시지다.
수년전에 나온 책인데 ‘The Late Great Planet Earth (대 혹성 지구의 마지막 때), 이 책은 달라스신학교를 졸업한 (제가 거기 다녔죠) 이 사람이 한 것은 최근의 타임매거진에 나온 내용을 요한계시록과 연결시켜 쓴 것이다. 그 책은 아주 많이 팔려 나갔다. 그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됐다. 성경이 이렇게 매우 헌신적인 것이라면..하며 많은 사람이 마음을 열고 믿음을 갖게 됐다.
그 후 한 15년이 지난 후에 그 책을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됐던 한 젊은 의사를 만나게 됐다. 그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많은 사건들, 그 책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들이 더 이상 그 책에서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런 나라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자 많은 사람은 혼돈에 빠졌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내용이다. 저는 사도 바울이 그 질문에 대해서 고린도교회에 보냈던 서신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서신 앞부분에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것 외에는 다른 말을 전하지 않겠다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이 헛된 것이 되게 하지 않겠다 한다. 성경이 우리의 삶 실제 생활에 연관성 가지고 있다는 것은 표면적인 연관성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의 연관성을 말한다. 성경은 마치 갈한 자에게 물이 필요한 것처럼, 굶주린 자에게 빵이 필요한 것처럼 실제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시는 것을 믿는다. 문제는 우리가 시계를 바라볼 때 큰 바늘이 12시를 가르키고 있다고 해서 한밤중(Midnight)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작은 바늘이 어디를 가르키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잘 알 수 없다.
-어제 가르쳐주신 일반적인 원리들이 계시록을 강의할 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요한계시록을 설교할 때 마치 원형을 그릴 때 서클을 그려서 하나의 서클이 완성되는 것 같지만 그 다음 원형을 그리면서 진전되어 가듯이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점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는 마치 악이 권좌에 앉아 있고 선이 패배해서 땅바닥에 있는 것 같은 상황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다. 역사가 진행되며 원을 그리며 발전돼 가는데 언젠가는 마지막 서클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들여다볼 때 마지막 때가 이르렀다 하는 메시지는 그 당시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떻게 마지막 때인 줄 알게 하는 메시지였는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저자가 그런 상황을 근거로 해서 말씀을 기록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로마 황제가 가이사가 주라고 고백하도록 만들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해야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다 고백했던 사람들이다.
신앙을 완강히 고백할 때 순간적으로 모든 데서 구원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고백함으로 순교를 당했다. 악은 매우 현실적이다. 모든 문화를 초월해서 악이 존재한다. 그 악 뒤에는 사탄이 있다. 악이 흥행하는 것 같기 때문에 약해져서 믿음을 져버리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다.
에베소교회는 참으로 진실하고 열심 있는 신앙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에베소교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악의 세력으로 인하여 위협 당하고 악이 침투하며 첫사랑을 잃어버리는 상황이다. 이게 요한계시록이 쓰여질때 에베소교회의 상황이었다.
이야기식 설교를 위해 이야기를 배워야 하고 시편 설교를 위해 시를 배워야하듯 묵시록을 설교하기 위해 묵시에 대한 것 을 배워야 한다.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 증거로 미국 건강보험법에 마이크로칩을 이마나 손에 넣는다고 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13장에 666이라고 했던 적그리스도의 표시 아닌가?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말씀이 지금 나오는 마이크로칩과 관계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상징적인 것이 현실에 나타나는 또 하나를 말해줄 수 있겠지만 적그리스도의 내용이 마이크로 칩과 관계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제 강의하시면서 청중의 필요로부터 설교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라는 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전혀 관심 갖지 않는 부분을 질문 갖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 다르고 어떻게 하면 잘살고 이민 와서 성공할 것인가 그런 관심 속에 있는 사람들을 나름대로 하나님의 관심대로 돌리도록 하는 것이다. 전혀 필요로 느끼지 않는 그들에게 거룩하게 살고 전도해야 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관심을 일으키고 답변 줘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이사야나 예레미야처럼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우리가 어떻게 필요에 대해 관심을 일으켜 답변을 줘야할 것인가?
우리가 시작할 때는 피부로 느끼고 있는 필요에서 시작을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필요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된다.
수년전에 가족을 데리고 텍사스에 휴가를 갔다. 참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하루는 오후 5시 30분- 6시가 됐을 때 제 딸이 배고파했다. 그때 우리가 솜사탕을 파는 곳에 이르게 됐다. 제 딸이 솜사탕을 사탕이라며 달라고 했다. 제가 1불을 내서 솜사탕을 사주면서 교훈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것을 먹느라고 온 얼굴에 묻혔다. 그러다가 다시 저에게 주면서 이건 진짜 사탕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제 딸을 데리고 가서 식당에서 밥을 먹게 해주었다.
설교할 때 사람이 가진 필요를 무시할 수 없다. 당신 배고픈 거 아니라고 하면 안 되고 거기서부터 정말 필요한 것을 일깨워줄 수 있다. 회중이 있는 시점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TV에서 찰리 쉰이라는 사람, 이 유명한 미국의 연예인이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마약 중독에 빠져서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도 잃어버리게 됐다. 찰리 쉰은 자기가 필요로 한 것을 마약을 통해 충족시킬 수 있다고 착각한 거다. 찰리 쉰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영혼의 메마름에 대한 것이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의 필요가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전도지를 전해 주는 것만으로 필요를 채워줄 수 없다. 현재 그 사람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의사들이 환자 치료하듯이 증상을 잘 살펴야 한다. 증상으로 해서 원인을 발견하고 원인을 치료 해줘야 한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전도하는 것을 얘기하면 두려워한다. 즉시 생각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정면 대결해서 복음을 제시하고 영혼을 구원해내야 된다는 생각이다. 제 딸은 전도에 열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비행기를 타면 옆에 앉은 사람과 자연스럽게 얘기하다 신앙적인 대화를 나눈다. 어떤 때는 상대방이 그런 부분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 하면 중단하고 다른 얘기를 나눈다. 제 딸의 생각은 신앙적인 얘기를 하다 원치 않으면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인 얘기를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전도라고 생각한다.
믿는 사람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언제든지 기회가 주어질 때 과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딸은 전도할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대화를 나누고 어떤 시점에 가서는 그 사람을 복음을 저보다 더 잘 제시할 수 있는 사람에게 소개시켜줘야겠다 해서 더 전도를 잘하는 사람에게 연결시켜준다. 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 그리고 전도를 사모하는 마음은 대부분 있다.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문제는 복음을 제시하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국에 와서 40년을 살고 있는데 세 아들 중 두 아들 졸업할 때 학교에 가서 오프닝과 클로징 기도를 했다. 그런데 그때 학교 담당자로부터 부탁받은 것이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 타종교도 이해해야 하니 기독교 목사지만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빼주라고 했다. 상당한 갈등을 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목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두 번을 다 제 신앙대로 기도했다. 미국이 점차 점차 예수 없는 하나님 쪽으로 간다. 미국도, 신학까지도 변질되는 상황 속에서 동포들과 목사님들이 사역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9.11 사건 이후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다종교지도자 모임에 저도 초청을 받았다. 그때 저에게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유대인들, 모슬렘,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데서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기도하라고 요청을 했다. 그때 저는 아쉽지만 참석할 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르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 일반 사람들은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이슈라 생각을 안할 것이다. 교묘하게 제한을 두면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인데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하게 되면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
제 딸이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많은 회사들을 상대로 동기부여를 하는 그런 강의를 한다. 제 딸이 어느 한 회사에서 강의하며 다른 성경 공부 그룹에서 만났던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그날 제 딸의 강의에 대해 비평하며 제안하기를 회사 상대로 강의할 때는 신앙적인 것은 제외하고 했으면 좋겠다 해서 제 딸이 의아해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지금 질문하신 분들과 같이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이런 일이 점점 심해지지라 생각한다.
-예전부터 선배 목회자들이 말씀하시기를 설교는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전달이라고 했다. 저도 그것을 옳다고 생각해서 나름대로 인격을,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해보면서 설교 준비를 해왔다.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그리고 특별히 강단에서 설교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그때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며 성령께 주도권을 내어드리면서 저를 양보하며 잘 협조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로 돌아가서 그때부터 이미 설교, 프리칭(Preaching)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설교자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설교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인격이 중요하다.
설교할 때 성령의 이끄심을 느꼈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 저도 잘 모르지만 경험적으로 볼 때 어떤 때는 성령께서 여기서 나와 함께 하셔서 이끌고 가신다 느낄 때 있지만, 성령은 이웃 다른 교회에 가 계신다 느낄 때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예수님께서 군중을 먹이실 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엄청난 사람을 먹이셨듯 우리의 설교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수많은 청중을 풍성하게 먹이실 때가 있다. 우리가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같은 것을 드리는데 어떤 때는 풍성하게 먹여주시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왜 그렇지 않은지 저도 알 수 없다.
어떤 때는 주일 설교 하고 났는데 느낌이 거위가 날개에 상처를 입어서 날아가다가 떨어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지만 교인 중 한 사람이 주중에 지난 주 설교는 큰 감동과 의미를 주었던 설교입니다 얘기하면 저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오늘 내가 설교한 것은 지금까지 설교한 것 중 최고의 설교였다 생각하는데 예배 후 반응을 보면 감동이 없었다 그런 결과를 보기도 한다.
제가 비블리컬 프리칭이라는 책을 쓸 때 한 챕터 전체를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에 관해 할당했다. 거기서 제가 실제 현실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를 안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인격을 얘기할 때, 기도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서 기도에 대해 설교한다거나 전도를 하지 못하면서 전도에 대해 설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설교 자체는 우리 자신의 삶과 인격을 통해 나오게 된다.
-세대가 동성연애에 관한 법률이 통과가 되고 어느 교단에서는 허락하는 교단도 있어 동성연애 목사가 배출된 교단도 있다. 점차 퍼져나갈 거라는 생각한다. 드라마, 인터넷, 방송 그런 쪽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처음에는 죄라고 생각하다가 점차 죄의식도 못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설교해야 되나? 회중들 중에 그런 분 있을 텐데 어떤 식으로 설교해야할지 조언을 부탁한다.
간음 행위나 다른 이슈들을 다루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지금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상처를 주는 일이고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라 얘기할 때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 죄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청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말씀을 강단에서 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항상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있다. 거짓말뿐만 아니라 다양한 옳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선포할 때 그러한 행위 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쪽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적으로 지혜롭게 전하면서 분명히 전달돼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무엇을 제시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제 동료들 중에 바로 그러한 동성연애의 삶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교단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 제가 그 친구들에게 얘기한다. 나 또한 동성연애하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앉는다면 수용할 수 있다. 그 사람들 옆에는 거짓말하는 사람, 간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안수하며 괜찮은 것으로 인정하고 사역자로 파송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과 함께 어울렸던 사람은 그렇게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세리들이었고 죄인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가장 정죄했던 사람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들과 같이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주님께서 진정 정죄했던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우리 스스로가, 저 자신이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 '특별히 은혜를 주신다'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모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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