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즈장로교회(담임 장영춘 목사)는 전도바람 100배 높이기 뉴욕전도대회를 22일부터 23일 이틀간 이신웅 목사(한국 신일교회 담임), 박성철 장로(신원그룹 회장, 신일교회 원로장로)를 강사로 초청해 개최했다. 이신웅 목사는 주일 1부-4부 예배 말씀을 전했고 박성철 장로는 22일과 23일 저녁 7시 집회 간증을 전했다.
이신웅 목사는 서울 신학대학교, 서울신학대 대학원 졸업, 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D.Min(목회학 박사), 미주 크리스챤신문 이사, 세계 복음화 협의회 부총재, 한국 강해설교학교 이사, 신길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박성철 장로는 신길교회 원로장로 및 전도왕으로 신원그룹 회장, 전경련 운영위원회 위원,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22일, 23일 저녁 집회 시 간증을 전한 박성철 장로는 10년 전에도 간증 사역을 한 적이 있는데 간증만 하고 나면 하나님이 한 것을 자신이 한 것처럼 말한 것 같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 같아 며칠은 마음이 아프고 회개가 돼 사역을 멈추었다고 했다.
그러나 작년 70을 맞아 원로장로가 된 지금은 9살 때 집을 나와서부터 겪은 자신의 고난과 역경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곳곳에 있어 그것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대농의 손자였지만 마약과 주색에 빠진 아버지가 논을 팔아 집안은 기울고 학교도 다닐 수 없는 상황에서 무료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친구 2명의 말을 듣고 따라나선 것이 목포에서 떨어진 고하도라는 섬의 중앙국립감화원이었다. 전국에서 범죄 청소년들을 데려와 감화를 시킨다는 곳이었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다.
그곳에 있던 피난민 교사가 그를 불러 "예수 믿어라. 기도하고 성경 봐라. 그리고 전도해라"고 말하며 그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고 신앙을 가르쳤다. 근처 초등학교에 감화원의 11명의 친구와 같이 다닐 때는 기도를 하면 돌을 던지거나 때리는 친구들을 피하려고 학교와 감화원 사이에 있던 공동묘지 옆에서 늘 기도했다.
그 교사는 박 장로에게 "여기서 어려움을 이기고 성공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라고 했다. 박 장로는 공동묘지 옆에서 늘 그렇게 기도했다.
또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갑자기 초등학교 6학년으로 건너뛰니 학업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에 가기 위한 시험도 치러야 해서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고 그 교사는 조언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전국의 초등학생들이 중학교 입시를 위해 한날한시에 보는 도학력평가에서 박 장로는 1등을 차지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박 장로는 중학교 학비 면제가 된 10명 중 한 사람이 됐고 15만원 장학금도 받았다.
그러나 학비가 면제돼 등록비를 따로 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개학하는 날 가보니 등록비를 내지 않아도 책값은 그날 내야 하는데 오지 않아 등록이 취소됐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국립중앙감화원에서 목포중학교에 간다고 마을에서도 떠들썩했는데 입학이 취소된다는 것은 소년 박성철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박 장로를 지도해주던 피난민 교사도 교장과 얘기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박성철 장로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장이 출근하는 아침 7시부터 퇴근하는 오후 5시까지 교장실 앞에 서 있었다. 그래도 안 되니 교장이 퇴근한 오후 5시 이후에는 교장의 사택에 찾아가 안방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교장은 교육자 20년 만에 너 같은 아이는 처음 본다며 너는 특별한 아이라며 입학을 허락했다. 박성철 장로는 "그런 끈기와 인내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간증했다.
후에 박성철 장로는 신문사 교정부에 들어가 편집부에서 일도 하고 청와대 출입기자 등도 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전라도 출신이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공보담당을 했다. 1971년에는 신안군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다 공천이 안 돼 보세공장에 들어가 일을 했다. 일이 많아 일주일에 2-3번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1년 반 하다 보니 몸무게가 10kg 이상이 줄고 한번은 새벽 1시가 돼 기절해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쓰러졌다 다시 깨어난 박 장로에게 의사들은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생명을 살려주신 것을 감사해 당시 35살이던 박 장로는 "일생동안 1년에 100명을 전도하고 교회는 100개 이상 세우고, 신학생 100명 이상 뒷바라지하겠습니다. 새벽기도와 공예배는 빠지지 않고 십일조는 1억 원 이상 하겠습니다"는 서원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외 박성철 장로는 개성, 베트남, 중국, 과테말라에 세운 공장과 예배당의 모습, 서울을 비롯한 각 국의 공장 직원들이 예배 드리는 장면을 영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신웅 목사는 서울 신학대학교, 서울신학대 대학원 졸업, 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D.Min(목회학 박사), 미주 크리스챤신문 이사, 세계 복음화 협의회 부총재, 한국 강해설교학교 이사, 신길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박성철 장로는 신길교회 원로장로 및 전도왕으로 신원그룹 회장, 전경련 운영위원회 위원,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22일, 23일 저녁 집회 시 간증을 전한 박성철 장로는 10년 전에도 간증 사역을 한 적이 있는데 간증만 하고 나면 하나님이 한 것을 자신이 한 것처럼 말한 것 같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 같아 며칠은 마음이 아프고 회개가 돼 사역을 멈추었다고 했다.
그러나 작년 70을 맞아 원로장로가 된 지금은 9살 때 집을 나와서부터 겪은 자신의 고난과 역경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곳곳에 있어 그것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대농의 손자였지만 마약과 주색에 빠진 아버지가 논을 팔아 집안은 기울고 학교도 다닐 수 없는 상황에서 무료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친구 2명의 말을 듣고 따라나선 것이 목포에서 떨어진 고하도라는 섬의 중앙국립감화원이었다. 전국에서 범죄 청소년들을 데려와 감화를 시킨다는 곳이었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다.
그곳에 있던 피난민 교사가 그를 불러 "예수 믿어라. 기도하고 성경 봐라. 그리고 전도해라"고 말하며 그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고 신앙을 가르쳤다. 근처 초등학교에 감화원의 11명의 친구와 같이 다닐 때는 기도를 하면 돌을 던지거나 때리는 친구들을 피하려고 학교와 감화원 사이에 있던 공동묘지 옆에서 늘 기도했다.
그 교사는 박 장로에게 "여기서 어려움을 이기고 성공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라고 했다. 박 장로는 공동묘지 옆에서 늘 그렇게 기도했다.
또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갑자기 초등학교 6학년으로 건너뛰니 학업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에 가기 위한 시험도 치러야 해서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고 그 교사는 조언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전국의 초등학생들이 중학교 입시를 위해 한날한시에 보는 도학력평가에서 박 장로는 1등을 차지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박 장로는 중학교 학비 면제가 된 10명 중 한 사람이 됐고 15만원 장학금도 받았다.
그러나 학비가 면제돼 등록비를 따로 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개학하는 날 가보니 등록비를 내지 않아도 책값은 그날 내야 하는데 오지 않아 등록이 취소됐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국립중앙감화원에서 목포중학교에 간다고 마을에서도 떠들썩했는데 입학이 취소된다는 것은 소년 박성철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박 장로를 지도해주던 피난민 교사도 교장과 얘기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박성철 장로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장이 출근하는 아침 7시부터 퇴근하는 오후 5시까지 교장실 앞에 서 있었다. 그래도 안 되니 교장이 퇴근한 오후 5시 이후에는 교장의 사택에 찾아가 안방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교장은 교육자 20년 만에 너 같은 아이는 처음 본다며 너는 특별한 아이라며 입학을 허락했다. 박성철 장로는 "그런 끈기와 인내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간증했다.
후에 박성철 장로는 신문사 교정부에 들어가 편집부에서 일도 하고 청와대 출입기자 등도 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전라도 출신이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공보담당을 했다. 1971년에는 신안군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다 공천이 안 돼 보세공장에 들어가 일을 했다. 일이 많아 일주일에 2-3번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1년 반 하다 보니 몸무게가 10kg 이상이 줄고 한번은 새벽 1시가 돼 기절해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쓰러졌다 다시 깨어난 박 장로에게 의사들은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생명을 살려주신 것을 감사해 당시 35살이던 박 장로는 "일생동안 1년에 100명을 전도하고 교회는 100개 이상 세우고, 신학생 100명 이상 뒷바라지하겠습니다. 새벽기도와 공예배는 빠지지 않고 십일조는 1억 원 이상 하겠습니다"는 서원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외 박성철 장로는 개성, 베트남, 중국, 과테말라에 세운 공장과 예배당의 모습, 서울을 비롯한 각 국의 공장 직원들이 예배 드리는 장면을 영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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