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불법 입국한 한상렬 목사가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천안함 희생자들의 살인원흉이라고 한 망발에 대해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안에 저런 입장도 존재할 수 있는지 그저 황당할 뿐이다.
그가 이명박 대통령을 천안함 살인원흉이라고 말한 것도 찬찬히 음미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이명박 정부가 지난 정권처럼 김정일의 비위를 맞추고, 계속 퍼주기를 하고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더라면 천안함 폭침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이명박 정부가 김정일 정권과 적대적인 관계로 갔기 때문에 北이 천안함을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모든 책임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이야말로 북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이명박 정부에게만 모든 잘못을 덮어 씌우는 전형적인 친북좌파 시각이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국가가 처한 위기 시대에 평화를 외치는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한상렬 목사가 북한 땅에서 벌여 온 이른바 ‘평화운동 통일운동’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거짓 평화를 외치며 국가의 위기를 외면했던 거짓 예언자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거짓과 기만이 발견된다.
지금 교회 일각에는 남북관계가 대결구도로 가지 말고 평화를 향해 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당연히 기독교는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평화는 참된 평화, 인권이 살아 숨쉬는 평화여야 한다.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그대로 깨지는 평화는 회칠한 무덤에 불과하다. 그리고 예수님조차도 이러한 가짜 평화를 고발하면서 “내가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음을 잊으면 안된다.
오래 전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방북을 했던 선배 목사의 모습과만 비교해 보아도 그의 목적이 통일의 돌파구를 뚫기 위한 것인지 우리 대한민국 정부를 비방하고 나아가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전 세계의 비난 앞에 처한 북한 정권의 앞잡이로 전락한 것인지 비교가 어렵지 않다.
46명의 천안함 희생자 가족들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이들의 희생을 대통령의 사기극의 결과로 치부했던 그가 판문점에서 북한군의 안내를 받으며 남쪽을 바라보는 사진은 수십 년을 살아 온 대한민국 안에서 스스로 눈감고 귀막은 채 살아 왔던 삶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여겨졌다.
북한에 머무는 동안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북한 언론의 최고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가 진정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바란다면 이곳 휴전선 너머에서도 들리는 북한 동포들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부르짖는 간구와 반인륜적 인권 상황을 똑똑히 듣고 보고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이상한 나라’ 평양은 국가의 탈을 쓰고 주민을 죽이고 죽음으로 내몰고 죽도록 방치하는 양심이 마비된 사교 집단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 정치적 사교 집단의 행태와 북녘땅 곳곳의 거리에서 절규하고 있는 현실을 똑똑히 보고 듣고 와 통회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도 북한 주민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땅은 통곡하고 하늘은 탄식하는데 우리마저 침묵 방관한다면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때에 우리가 북한 주민의 종말론적 인권 상황에 대하여 양심 있는 행동을 한다면 먼 훗날에 우리 민족은 꿈꾸는 것 같은 자유통일을 함께 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오고 있는 자유통일의 날은 메시야의 시대와 같을 것이다.
그가 이명박 대통령을 천안함 살인원흉이라고 말한 것도 찬찬히 음미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이명박 정부가 지난 정권처럼 김정일의 비위를 맞추고, 계속 퍼주기를 하고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더라면 천안함 폭침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이명박 정부가 김정일 정권과 적대적인 관계로 갔기 때문에 北이 천안함을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모든 책임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이야말로 북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이명박 정부에게만 모든 잘못을 덮어 씌우는 전형적인 친북좌파 시각이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국가가 처한 위기 시대에 평화를 외치는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한상렬 목사가 북한 땅에서 벌여 온 이른바 ‘평화운동 통일운동’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거짓 평화를 외치며 국가의 위기를 외면했던 거짓 예언자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거짓과 기만이 발견된다.
지금 교회 일각에는 남북관계가 대결구도로 가지 말고 평화를 향해 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당연히 기독교는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평화는 참된 평화, 인권이 살아 숨쉬는 평화여야 한다.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그대로 깨지는 평화는 회칠한 무덤에 불과하다. 그리고 예수님조차도 이러한 가짜 평화를 고발하면서 “내가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음을 잊으면 안된다.
오래 전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방북을 했던 선배 목사의 모습과만 비교해 보아도 그의 목적이 통일의 돌파구를 뚫기 위한 것인지 우리 대한민국 정부를 비방하고 나아가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전 세계의 비난 앞에 처한 북한 정권의 앞잡이로 전락한 것인지 비교가 어렵지 않다.
46명의 천안함 희생자 가족들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이들의 희생을 대통령의 사기극의 결과로 치부했던 그가 판문점에서 북한군의 안내를 받으며 남쪽을 바라보는 사진은 수십 년을 살아 온 대한민국 안에서 스스로 눈감고 귀막은 채 살아 왔던 삶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여겨졌다.
북한에 머무는 동안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북한 언론의 최고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가 진정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바란다면 이곳 휴전선 너머에서도 들리는 북한 동포들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부르짖는 간구와 반인륜적 인권 상황을 똑똑히 듣고 보고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이상한 나라’ 평양은 국가의 탈을 쓰고 주민을 죽이고 죽음으로 내몰고 죽도록 방치하는 양심이 마비된 사교 집단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 정치적 사교 집단의 행태와 북녘땅 곳곳의 거리에서 절규하고 있는 현실을 똑똑히 보고 듣고 와 통회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도 북한 주민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땅은 통곡하고 하늘은 탄식하는데 우리마저 침묵 방관한다면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때에 우리가 북한 주민의 종말론적 인권 상황에 대하여 양심 있는 행동을 한다면 먼 훗날에 우리 민족은 꿈꾸는 것 같은 자유통일을 함께 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오고 있는 자유통일의 날은 메시야의 시대와 같을 것이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