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한 쪽만의 잘못이랴. 그럼에도 그는 “일차적인 책임은 교회보다 신학 혹은 신학교육에 있다”고 했다. 신학과 목회의 괴리에 대해 물었었다. 마침 한국기독교학회(회장 정장복 박사)가 ‘신학자가 목회자에게 듣는다’는 주제로 목회자들을 만난 터였다.
다소 희석되긴 했으나 예부터 진보를 대표하던 한국기독교학회가 ‘이름값’을 했다. 그 반대 편에 선 수장(首長)의 일성(一聲)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신학자들, 목회현장과 상관없이 책 쓰고 논문 발표
교단은 신조 벗어나지 않는 한 신학자들 존중해야
-기독교학회의 의미있는 행보였다.
“매우 바람직했다. 인사차 정장복 회장님을 찾아뵐 예정이다. 그 때 두 학회가 어떻게 한국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을지, 신학과 목회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 의논하려 한다.”
-신학자와 목회자의 만남을 두 학회가 함께 주최하면 한국교회에 큰 족적으로 남지 않을까.
“동감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신학적 입장이 다른 기독교학회와의 협력이 원활히 이뤄지겠나.
“물론 각 학회가 가진 본래 취지가 있고 신학적 특색이 있으니 그걸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학회의 궁극적 목적이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데 있다면 그것에선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신학과 목회의 관계를 정의한다면.
“바늘과 실이자 기차가 지나는 두 레일이다. 신학자는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도를 교육시켜 목회에 바로 투입되도록 해야 한다. 신학교육이 이론 중심으로 흘러선 안 될 이유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알파요 오메가임을 인식하고 그 말씀의 이해가 또한 신학적 기초 위에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신학적 기반 없이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서 그것을 가르치고 설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왜일까.
“신학자들이 목회 현장을 다소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목회자들도 마치 신학 없이 목회가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일차적 책임은 교회보다 신학 혹은 신학교육에 있다. 신학교육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대학이라는 영역으로 제도화되면서 목회와 멀어졌다. 원룸에 방이 생긴 거라 보면 된다. 대학이라는 방 안에서 학문의 발전은 있었지만 칸막이로 인해 목회현장과는 괴리가 생겼다. 이 안에서 점점 더 그들만의 ‘학문’으로 굳어갔다. 목회현장과 상관 없이 책을 쓰고 논문을 발표했다.”
13일 한국기독교학회의 ‘신학자가 목회자에게 듣는다’ 모임이 ‘목회자 재교육을 위한 또 하나의 교육제도 마련’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며 신학자와 목회자 중 목회자에 방점을 찍었다면 최 교수는 신학자 쪽에 좀 더 무게를 둔 셈이다. 양쪽 모두 의미 있는 지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해결책이 있다면.
“학문으로서의 신학보다 말씀으로서의 신학.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섬기는 본래의 신학. 이런 회복이 신학과 목회의 간격을 좁히지 않을까.”
-신학교육이 교회 울타리를 벗어난게 문제라 했다. 그러나 울타리 안에 있는 것도 바람직한 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한국의 주요 신학대학들이 소속 교단의 영향력 아래서 경직돼 있다는 비판도 있다.
“기본적으로 신학과 교단 혹은 교회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교회는 신학자로부터 말씀을 바르게 배워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와 예일,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등 수많은 대학들이 학문의 자율성이라는 명분 아래 교회로부터 독립했다. 그 결과가 어떤가. 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흘렀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건전한 신학에서 멀어질 경우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처럼 신학과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점을 간과한 채, 신학자들은 교단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고, 교단은 비신학적인 이유로 신학자들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전문적인 신학 훈련을 받지 못한 분들이 신학자의 성경해석과 신학교육까지 통제하려는 모습도 종종 있다. 교단은 신학자가 교단의 신조와 신앙고백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들의 영역을 존중해줘야 한다. 신학자들 역시 교단의 신조와 신앙고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결국 신학이 교회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문제라기보다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거나, 주어진 권한 이상의 것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WCC 총회 확정됐는데 보이콧은 바람직하지 않아
도올 주장, 전혀 근거 없어… 폭넓게 공부했으면
-이제 신학 얘기만 해보자. 복음주의와 보수는 동의어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같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복음주의와 보수, 에큐메니칼과 진보 혹은 자유주의 등이 그런 등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말들이 서구에서 사용됐고 과거에도 그렇게 쓰였으니, 각 단어가 가진 의미를 충분히 의식하지 않은채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럼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도 반대는 아닐 것이다.
“물론이다. 복음주의 영역에 있으나 좀 더 열린 사람들이 있고 자유주의 입장에 선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을 오히려 복음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선을 그어서 한 쪽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령 기독교학회를 복음주의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단체라고 한다면 그들은 굉장히 싫어할 것이다. 실제로 복음주의신학회와 기독교학회는 서로 활발히 교류한다. 나 또한 기독교학회의 한 분과에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한기총과 한국교회협의회를 합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복음주의신학회와 기독교학회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나.
“기구적 통합은 불필요하다고 본다. 불필요할 뿐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측면도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보고 무오류를 주장하는가 하면 성경 역시 인간의 저작물이기에 오류가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렇게 성경관에서 차이가 난다면 통일은 어렵다. 그게 나쁘다곤 생각지 않는다. 각자가 추구하는 신학적 색깔을 애써 지울 필요가 없다. 고유의 영역이 있다. 다만 교회를 섬긴다든지 하는 공통 영역에서는 연합도 충분히 가능하다.”
-최근 WCC 찬반 논란도 뜨겁다.
“WCC를 역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해서 잘잘못을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 없이 단지 과거에 이랬으니까 하면서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WCC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정확하게 안 후 시비를 가리자는 것이다. 2013년 총회 개최는 이미 확정된 사안이다. 개인적 생각인데, 만약 WCC가 마음에 안 들면 총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참석 자체를 반대하면서 총회를 보이콧하자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순전히 나 개인적인 생각이지 학회의 입장이 아니다. 공식적으론 오는 가을이나 내년 초에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도올 김용옥 씨가 최근 ‘도마복음’과 관련한 책을 냈다.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앞선다거나 구원이 개인의 해탈이라고 하던데.
“나 또한 도마복음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연구해온 사람들 중 하나다. 사실 그의 주장은 20세기 초·중반의 급진 자유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 자유주의 입장도 담고 있지 못한 주장이다. 현재 도마복음을 포함해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세계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영국의 톰 라이트와 제임스 던, 독일의 타이슨, 미국의 미이어 등이다. 이들 역시 도마복음의 역사성과 가치에 비판적이다. 도마복음이 정경복음서보다 앞설 뿐 아니라 이들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도 상당히 급진적인 몇몇 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이런 경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김 씨처럼 유명한 사람이 말하니 정말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조금만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전혀 근거 없는 말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자신이 배운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적 오만이다. 신학을 두루두루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그 분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잦은 지진, 쓰나미, 화산폭발 등을 어떻게 보나. 혹자의 말처럼 하나님의 심판인가.
“신학자나 목회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즉 모든 자연재해를 포함해서 전쟁과 도덕적 타락의 문제, 기아, 기근 등이 왜 일어나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하고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들이 나를 비롯한 교회 및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눈여겨 봐야 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확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지만 단정하는 것은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위치에 서는 교만이다. 결코 단정해선 안 된다.”
-복음주의 신학을 이끌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회장이 된 후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복음주의신학회의 위상과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것이다. 지난 5~6년 새 회원수는 늘었지만 과연 한국교회와 신학계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신학회가 세워진 본래 목적과 취지를 재정립하는데 초점을 두고 싶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는 것이다. 신학자나 목회자를 포함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 그 어떤 학문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최갑종 교수는
고신대(1974, Th.B.)와 고려신학대학원(1977, M.Div.)을 졸업한 뒤 미국에서 리폼드 신학대학원(1982, MA in Biblical Studies), 칼빈 신학대학원(1984, Th.M.), 프린스턴 신학대학원(1986, Th.M.) 등을 나왔다.
미국 시라쿠스 한인교회, 코네티컷 한인교회에서 담임으로 시무했으며 서울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를 거쳐 백석대학교 신약학 정교수, 학사부총장, 신학부총장, 신학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현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한국기독교학회 회원, 한국개혁주의신학회 회원,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부회장, 개혁주의생명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바울연구 1’(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예수님의 비유연구’(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성령과 율법’ 등이 있으며 논문은 ‘새 관점 다시 보기’ ‘로마서 3:21-31에 대한 주석적 연구’ 등 30여 편을 발표했다.
다소 희석되긴 했으나 예부터 진보를 대표하던 한국기독교학회가 ‘이름값’을 했다. 그 반대 편에 선 수장(首長)의 일성(一聲)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신학자들, 목회현장과 상관없이 책 쓰고 논문 발표
교단은 신조 벗어나지 않는 한 신학자들 존중해야
-기독교학회의 의미있는 행보였다.
“매우 바람직했다. 인사차 정장복 회장님을 찾아뵐 예정이다. 그 때 두 학회가 어떻게 한국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을지, 신학과 목회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 의논하려 한다.”
-신학자와 목회자의 만남을 두 학회가 함께 주최하면 한국교회에 큰 족적으로 남지 않을까.
“동감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신학적 입장이 다른 기독교학회와의 협력이 원활히 이뤄지겠나.
“물론 각 학회가 가진 본래 취지가 있고 신학적 특색이 있으니 그걸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학회의 궁극적 목적이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데 있다면 그것에선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신학과 목회의 관계를 정의한다면.
“바늘과 실이자 기차가 지나는 두 레일이다. 신학자는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도를 교육시켜 목회에 바로 투입되도록 해야 한다. 신학교육이 이론 중심으로 흘러선 안 될 이유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알파요 오메가임을 인식하고 그 말씀의 이해가 또한 신학적 기초 위에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신학적 기반 없이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서 그것을 가르치고 설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왜일까.
“신학자들이 목회 현장을 다소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목회자들도 마치 신학 없이 목회가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일차적 책임은 교회보다 신학 혹은 신학교육에 있다. 신학교육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대학이라는 영역으로 제도화되면서 목회와 멀어졌다. 원룸에 방이 생긴 거라 보면 된다. 대학이라는 방 안에서 학문의 발전은 있었지만 칸막이로 인해 목회현장과는 괴리가 생겼다. 이 안에서 점점 더 그들만의 ‘학문’으로 굳어갔다. 목회현장과 상관 없이 책을 쓰고 논문을 발표했다.”
13일 한국기독교학회의 ‘신학자가 목회자에게 듣는다’ 모임이 ‘목회자 재교육을 위한 또 하나의 교육제도 마련’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며 신학자와 목회자 중 목회자에 방점을 찍었다면 최 교수는 신학자 쪽에 좀 더 무게를 둔 셈이다. 양쪽 모두 의미 있는 지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해결책이 있다면.
“학문으로서의 신학보다 말씀으로서의 신학.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섬기는 본래의 신학. 이런 회복이 신학과 목회의 간격을 좁히지 않을까.”
-신학교육이 교회 울타리를 벗어난게 문제라 했다. 그러나 울타리 안에 있는 것도 바람직한 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한국의 주요 신학대학들이 소속 교단의 영향력 아래서 경직돼 있다는 비판도 있다.
“기본적으로 신학과 교단 혹은 교회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교회는 신학자로부터 말씀을 바르게 배워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와 예일,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등 수많은 대학들이 학문의 자율성이라는 명분 아래 교회로부터 독립했다. 그 결과가 어떤가. 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흘렀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건전한 신학에서 멀어질 경우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처럼 신학과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점을 간과한 채, 신학자들은 교단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고, 교단은 비신학적인 이유로 신학자들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전문적인 신학 훈련을 받지 못한 분들이 신학자의 성경해석과 신학교육까지 통제하려는 모습도 종종 있다. 교단은 신학자가 교단의 신조와 신앙고백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들의 영역을 존중해줘야 한다. 신학자들 역시 교단의 신조와 신앙고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결국 신학이 교회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문제라기보다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거나, 주어진 권한 이상의 것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WCC 총회 확정됐는데 보이콧은 바람직하지 않아
도올 주장, 전혀 근거 없어… 폭넓게 공부했으면
-이제 신학 얘기만 해보자. 복음주의와 보수는 동의어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같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복음주의와 보수, 에큐메니칼과 진보 혹은 자유주의 등이 그런 등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말들이 서구에서 사용됐고 과거에도 그렇게 쓰였으니, 각 단어가 가진 의미를 충분히 의식하지 않은채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럼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도 반대는 아닐 것이다.
“물론이다. 복음주의 영역에 있으나 좀 더 열린 사람들이 있고 자유주의 입장에 선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을 오히려 복음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선을 그어서 한 쪽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령 기독교학회를 복음주의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단체라고 한다면 그들은 굉장히 싫어할 것이다. 실제로 복음주의신학회와 기독교학회는 서로 활발히 교류한다. 나 또한 기독교학회의 한 분과에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한기총과 한국교회협의회를 합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복음주의신학회와 기독교학회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나.
“기구적 통합은 불필요하다고 본다. 불필요할 뿐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측면도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보고 무오류를 주장하는가 하면 성경 역시 인간의 저작물이기에 오류가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렇게 성경관에서 차이가 난다면 통일은 어렵다. 그게 나쁘다곤 생각지 않는다. 각자가 추구하는 신학적 색깔을 애써 지울 필요가 없다. 고유의 영역이 있다. 다만 교회를 섬긴다든지 하는 공통 영역에서는 연합도 충분히 가능하다.”
-최근 WCC 찬반 논란도 뜨겁다.
“WCC를 역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해서 잘잘못을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 없이 단지 과거에 이랬으니까 하면서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WCC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정확하게 안 후 시비를 가리자는 것이다. 2013년 총회 개최는 이미 확정된 사안이다. 개인적 생각인데, 만약 WCC가 마음에 안 들면 총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참석 자체를 반대하면서 총회를 보이콧하자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순전히 나 개인적인 생각이지 학회의 입장이 아니다. 공식적으론 오는 가을이나 내년 초에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도올 김용옥 씨가 최근 ‘도마복음’과 관련한 책을 냈다.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앞선다거나 구원이 개인의 해탈이라고 하던데.
“나 또한 도마복음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연구해온 사람들 중 하나다. 사실 그의 주장은 20세기 초·중반의 급진 자유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 자유주의 입장도 담고 있지 못한 주장이다. 현재 도마복음을 포함해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세계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영국의 톰 라이트와 제임스 던, 독일의 타이슨, 미국의 미이어 등이다. 이들 역시 도마복음의 역사성과 가치에 비판적이다. 도마복음이 정경복음서보다 앞설 뿐 아니라 이들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도 상당히 급진적인 몇몇 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이런 경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김 씨처럼 유명한 사람이 말하니 정말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조금만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전혀 근거 없는 말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자신이 배운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적 오만이다. 신학을 두루두루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그 분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잦은 지진, 쓰나미, 화산폭발 등을 어떻게 보나. 혹자의 말처럼 하나님의 심판인가.
“신학자나 목회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즉 모든 자연재해를 포함해서 전쟁과 도덕적 타락의 문제, 기아, 기근 등이 왜 일어나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하고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들이 나를 비롯한 교회 및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눈여겨 봐야 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확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지만 단정하는 것은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위치에 서는 교만이다. 결코 단정해선 안 된다.”
-복음주의 신학을 이끌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회장이 된 후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복음주의신학회의 위상과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것이다. 지난 5~6년 새 회원수는 늘었지만 과연 한국교회와 신학계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신학회가 세워진 본래 목적과 취지를 재정립하는데 초점을 두고 싶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는 것이다. 신학자나 목회자를 포함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 그 어떤 학문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최갑종 교수는
고신대(1974, Th.B.)와 고려신학대학원(1977, M.Div.)을 졸업한 뒤 미국에서 리폼드 신학대학원(1982, MA in Biblical Studies), 칼빈 신학대학원(1984, Th.M.), 프린스턴 신학대학원(1986, Th.M.) 등을 나왔다.
미국 시라쿠스 한인교회, 코네티컷 한인교회에서 담임으로 시무했으며 서울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를 거쳐 백석대학교 신약학 정교수, 학사부총장, 신학부총장, 신학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현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한국기독교학회 회원, 한국개혁주의신학회 회원,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부회장, 개혁주의생명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바울연구 1’(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예수님의 비유연구’(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성령과 율법’ 등이 있으며 논문은 ‘새 관점 다시 보기’ ‘로마서 3:21-31에 대한 주석적 연구’ 등 30여 편을 발표했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