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서로 사랑하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고, 또 시간이 자면 자녀를 갖게 된다. 흔히들 자녀가 태어난 후부터 비로소 가정이란 곳이 어떠한 곳인지 그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진가를 알아가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마도 가정에서의 자녀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어린아이 하나가 가져다주는 기쁨은 말로 다 형언키 어려울 정도이다. 아이는 그 부모에게는 물론이고 많은 가족, 친지들에게 기쁨과 보람, 관심, 그리고 사랑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점점 커가면서 자아가 성립되고 학교생활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됨에 따라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이해 못하는 부분도 생기게 된다. 이렇듯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게 되면 자녀 기르기가 힘이 든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부모 된 나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자녀를 바르게 교육시키는 데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데니스 전시(Dennis Guernsey)는 '당신은 어떠한 유형의 부모인가?'(What kind of Parent Are You?)라는 책에서 네 가지 부모 유형을 말하고 있다.
그는 사랑의 지원과 행동 규제의 두 축으로 나누어, 사랑의 지원이 많고 행동의 규제가 많으며 주권적 부모로 본다. 이 유형은 가장 바람직한 유형으로 아이가 아직 미성숙하고 지도가 필요한 줄 알아 규제를 하며, 지도하고,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많으며, 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녀의 자존감을 존중해 준다.
두 번째 유형은 권위주의적 부모로서, 아이들의 행동에 규제를 많이 하여 강한 영향력을 미쳐 부모의 요구와 규제를 따르게 하나, 아이들의 의견, 감정, 욕구는 무시한 채 부모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케 만드는 유형이다. 부모 자녀 사이의 관계보다 순종이 앞서고, 아이들을 위한 사랑의 지원(emotional support)이 미약하다. 이 유형은 보수적이고 완고하며 권위를 부르짖는 과격한 성품의 부모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아이의 견해는 무시되기 때문에 싫어도 해야하고 부모의 명령에 따라야 하기에 자기 개성은 살릴 수가 없다. 자칫하면 자녀를 부모를 위한 꼭두각시로 만들기 쉽다. 이러한 유형의 부모들은 훈계시에 부모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로 때리게 되고, 또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의 지원이 적어 부모를 무서워하거나 공포의 대상으로 느끼기도 한다. 더러는 아이들 자신의 판단이 흐려져, 부모의 기준이 그 아이의 모든 기준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나면 창의력이 상실되고 개성과 독립심, 자율성이 적어진다. 또한 통제가 강해 그 당시를 모면해야 하기에 거짓말을 자주 하게 되고 부모를 속이게 된다.
부모로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껍질만 있는 복종보다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통제도 진정한 사랑의 동기에서 시작한다면 자녀들이 기가 죽거나 용기를 잃고 낙담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골로새서 3장 21절에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를 낙심케 하거나 기가 푹 죽은 패잔병의 모습으로 만들지 않도록 부모 된 우리가 스스로 지양해야 할 부분임을 강조하고 싶다.
세 번째 유형은 수용적 부모로서, 사랑의 지원이 많은 반면 행동의 규제가 적은 유형으로 아이가 원하는 대로 허락하고 지도하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아이가 그릇 행할 때에는 고치도록 명령 혹은 강요하거나 단호하게 말하기보다는 권유하는 정도에 그치는, 쉽게 말하면 버릇없는 아이를 만들기 쉬운 유형이다. 나이 들어 자녀를 낳았거나 오랫동안 자녀가 없다가 자녀를 가진 부모들, 혹은 자녀가 단 하나인 가정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우리 이민 사회에서도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적은 우리 부모님들이 죄책감으로 인해 아이들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허용적인 부모가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엄격한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후에 사회생활에 곤란을 가져다준다. 또한 이 유형의 부모 밑에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자녀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는 엘리 제사장을 예로 들 수 있다. (삼상 1:12-25)
네 번째 유형은 사랑의 지원도 적고 행동의 규제도 적은 무관심한 유형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놔두는 방임형으로 부모 자신의 일과 문제에 몰두하여 아이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녀의 감정적인 욕구에도 무심하고, 부모로서의 어떤 영향력을 미쳐 행동을 고쳐보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문자 그대로 관심이 없는 부모를 말한다. 우리 이민자 부모들도 생존의 위기에 눌려 뜻하지 않게 무관심한 부모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나는 이 유형 중 어떤 유형에 속하는가? 부모로서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충분히 자녀들에게 사랑의 관심과 동기를 가지고 그들을 대하고 있는가? 잠언 22장 6절에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아이들의 행동에 강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주권적 부모가 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교육해야 하며, 효과적인 훈육자가 되어야 한다. 훌륭한 자녀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숨어 있다. 훌륭한 부모로 성숙하기 위해 부모 된 우리는 좀 더 자신을 돌이켜보고 깨달아 바른 모범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어린아이 하나가 가져다주는 기쁨은 말로 다 형언키 어려울 정도이다. 아이는 그 부모에게는 물론이고 많은 가족, 친지들에게 기쁨과 보람, 관심, 그리고 사랑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점점 커가면서 자아가 성립되고 학교생활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됨에 따라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이해 못하는 부분도 생기게 된다. 이렇듯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게 되면 자녀 기르기가 힘이 든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부모 된 나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자녀를 바르게 교육시키는 데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데니스 전시(Dennis Guernsey)는 '당신은 어떠한 유형의 부모인가?'(What kind of Parent Are You?)라는 책에서 네 가지 부모 유형을 말하고 있다.
그는 사랑의 지원과 행동 규제의 두 축으로 나누어, 사랑의 지원이 많고 행동의 규제가 많으며 주권적 부모로 본다. 이 유형은 가장 바람직한 유형으로 아이가 아직 미성숙하고 지도가 필요한 줄 알아 규제를 하며, 지도하고,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많으며, 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녀의 자존감을 존중해 준다.
두 번째 유형은 권위주의적 부모로서, 아이들의 행동에 규제를 많이 하여 강한 영향력을 미쳐 부모의 요구와 규제를 따르게 하나, 아이들의 의견, 감정, 욕구는 무시한 채 부모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케 만드는 유형이다. 부모 자녀 사이의 관계보다 순종이 앞서고, 아이들을 위한 사랑의 지원(emotional support)이 미약하다. 이 유형은 보수적이고 완고하며 권위를 부르짖는 과격한 성품의 부모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아이의 견해는 무시되기 때문에 싫어도 해야하고 부모의 명령에 따라야 하기에 자기 개성은 살릴 수가 없다. 자칫하면 자녀를 부모를 위한 꼭두각시로 만들기 쉽다. 이러한 유형의 부모들은 훈계시에 부모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로 때리게 되고, 또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의 지원이 적어 부모를 무서워하거나 공포의 대상으로 느끼기도 한다. 더러는 아이들 자신의 판단이 흐려져, 부모의 기준이 그 아이의 모든 기준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나면 창의력이 상실되고 개성과 독립심, 자율성이 적어진다. 또한 통제가 강해 그 당시를 모면해야 하기에 거짓말을 자주 하게 되고 부모를 속이게 된다.
부모로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껍질만 있는 복종보다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통제도 진정한 사랑의 동기에서 시작한다면 자녀들이 기가 죽거나 용기를 잃고 낙담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골로새서 3장 21절에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를 낙심케 하거나 기가 푹 죽은 패잔병의 모습으로 만들지 않도록 부모 된 우리가 스스로 지양해야 할 부분임을 강조하고 싶다.
세 번째 유형은 수용적 부모로서, 사랑의 지원이 많은 반면 행동의 규제가 적은 유형으로 아이가 원하는 대로 허락하고 지도하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아이가 그릇 행할 때에는 고치도록 명령 혹은 강요하거나 단호하게 말하기보다는 권유하는 정도에 그치는, 쉽게 말하면 버릇없는 아이를 만들기 쉬운 유형이다. 나이 들어 자녀를 낳았거나 오랫동안 자녀가 없다가 자녀를 가진 부모들, 혹은 자녀가 단 하나인 가정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우리 이민 사회에서도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적은 우리 부모님들이 죄책감으로 인해 아이들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허용적인 부모가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엄격한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후에 사회생활에 곤란을 가져다준다. 또한 이 유형의 부모 밑에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자녀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는 엘리 제사장을 예로 들 수 있다. (삼상 1:12-25)
네 번째 유형은 사랑의 지원도 적고 행동의 규제도 적은 무관심한 유형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놔두는 방임형으로 부모 자신의 일과 문제에 몰두하여 아이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녀의 감정적인 욕구에도 무심하고, 부모로서의 어떤 영향력을 미쳐 행동을 고쳐보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문자 그대로 관심이 없는 부모를 말한다. 우리 이민자 부모들도 생존의 위기에 눌려 뜻하지 않게 무관심한 부모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나는 이 유형 중 어떤 유형에 속하는가? 부모로서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충분히 자녀들에게 사랑의 관심과 동기를 가지고 그들을 대하고 있는가? 잠언 22장 6절에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아이들의 행동에 강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주권적 부모가 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교육해야 하며, 효과적인 훈육자가 되어야 한다. 훌륭한 자녀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숨어 있다. 훌륭한 부모로 성숙하기 위해 부모 된 우리는 좀 더 자신을 돌이켜보고 깨달아 바른 모범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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