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새 안경을 맞출 때 마다 렌즈에 색을 조금 넣습니다. 눈을 햇빛으로부터 보호하기위해서는 색 없는 맹알 보다 색안경이 좋다고 의사가 권해서입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고동색 (땅 색하고 가깝다고 권하기에)을 넣었었고, 지금은 옅은 파란색을 선호합니다. 이 색 렌즈가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중요한 일을 합니다. 모든 사물을 보는 배경 색이 렌즈에 들어 있는 색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렌즈의 색을 고동색으로 할 때는 모든 배경의 색이 고동색을 바탕으로 했고, 지금은 제 렌즈의 색이 파란 색이니 모든 배경이 파란색을 바탕으로 합니다.

신앙생활도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다고 봅니다. 특히 목사님들의 개인별 성향 차이는 그 분들이 담임하고 계시는 교회의 전체 색깔을 나타내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칼빈 주의자가 있으면 웨슬리안이거나 다른 신조에 영향을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 중에서 종말론에 심취해서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 같은 예언서만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시는 분도 계십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강조하시면서 통성기도를 특히 강조하고, 어떤 이는 그 반대로 조용하게 묵상기도만 강조하십니다. 어떤 교단은 방언을 권유하고 어떤 교단은 방언을 금하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이고,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강조점들이 사람이나 교단에 따라소 서로 다른 것은 바로 성경에서 내가 혹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와 다른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 것만 옳다고 하는 자세는 결국은 독선입니다. 흔히 진리 수호 주의자임을 자칭하는 분들 중에서 이런 경직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신앙 노선의 문제가 아니라 인성의 문제인 경우들이 많습니다. 세상의 성경을 뿌리로 한 많은 교회들의 색깔이 다른 것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해서 그 누구도 완전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색 있는 안경을 처음 사용할 때에는 고동색이구나, 파란색이구나 하고 느끼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배경 색에 대한 감각이 없어져 버리고 보이는 대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남의 렌즈 색이나 안경테에 대한 비평은 쉽게 할 수 있는 반면 자기 안경의 렌즈 색깔이나 안경테에 대한 모습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신앙도 시간이 지나면 자기의 신앙 깊이나 색깔을 못 느낄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편안한 상태 (comfort Zone) 혹은 익숙한 단계에 접어든다고나 할까요? 이때는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고착화 될 수 있는 위험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old timer 증후군이 있습니다. 이런 류의 분들은 교회에 오래 출석 할수록 주위에는 불신자들은 없고 믿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교회에 이런 저런 일로 봉사가 많아지면서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교인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소위 세상과 다른 피조물이 되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문제점은 성향이 같은 자기들끼리의 그룹을 교회 안에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를 어떤이는 친교 과다증 (Koinotis)이라고 부르더군요. 이 친교 과다증은 교회가 활성화 되는 데 방해 작용을 합니다. 기존의 신자들이 자기들 끼리 어울리다 보면 새로운 분들이 교회를 찾아도 친절히 제대로 대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존 그룹들의 반응으로 인해서 새로 출석 하시는 분들이 이 기존 그룹에 접근하기 힘들거나 잘 융화하지 못하다가 결국은 그 교회를 떠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기의 신앙 상태를 말씀과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자주 점검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개혁 교단 뉴욕 대회 송흥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