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소중함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하여 떨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특별히 신분 문제로 인해 수년 혹은 더 오랜 기간 동안 처자식을 그리워하며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어느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밤새워 통곡하며 가슴 아파하는 어느 불법 체류자의 애환이 우리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서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8년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그토록 고대하던 영주권도 취득했다. 그래서 가족이 이민 수속을 잘 마치고 비자를 받아 미국에 들어오는 것이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되었다. 성령께서는 날마다 부르짖어 기도하게 하셨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십사고 기도했다. 그런데 영주권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영주권을 받게 될 것을 꿈으로 보여주셨다.

영주권을 받기까지 과정 과정을 돌이켜 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8년간의 세월 동안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셨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주님을 붙들고 기도하게 하셨으며, 믿음으로 잘 견딜 수 있도록 항상 곁에서 위로하고 힘이 되어 주셨다. 언제나 필요할 때마다 사람을 붙여 주시고 사방에서 도움의 손길이 있게 해주셨다. 오늘도 나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나와 같은 케이스로 가족을 초청한 사람들이 대부분 비자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의 심사가 워낙 까다로워서 십중팔구는 거절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인터뷰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데 아직 확실한 응답을 받지 못해 나는 조금은 조바심이 났다. 나는 더욱더 간절히 주님 앞에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1993년 7월 4일 동산 장로교회가 브롱스에서 용커스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교회 건물은 동산 위에 있는 큰 창고 같은 것으로 아이스크림 웨어하우스로 사용하다가 비어 있는 곳이었다. 테니스 코트가 열네 개 들어 있다고 하면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시설이라고는 이층에 사무실로 쓰던 방 다섯 개가 전부였다. 워낙 큰 건물이라 지붕은 전부 함석으로 되어 있고, 기둥은 돔 형식으로 철 빔으로 되어 있었다. 앞으로 이 건물 안에다 예배실도 짓고 친교실이며 식당이며 필요한 시설들을 만들어야 했다. 교회는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제반 시설물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꾸는데 집사람이 동산 장로교회 식당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분명히 꿈으로 보여 주셨다. 나는 이 꿈이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확신이 왔다. 아직 식당 건축은 시작도 안했지만 앞으로 식당을 건축하게 될 것이 분명하고, 집사람이 이 식당에서 봉사한다는 것은 비자를 받아 미국에 들어와야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이라는 확신이 왔던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자 받아서 미국으로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드디어 비자 인터뷰 날짜가 나왔다. 한 달 여 기간이 남았는데 아내는 무척 불안하다며 걱정을 했다. 한 번 거절당하면 일 년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면서 고민에 빠졌다. 나는 하나님께서 비자를 순적히 받게 해준다고 응답해 주셨다면서 걱정 말고 기도나 열심히 하자고 당부를 했다. 그러나 아내는 믿기지 않는 눈치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제 보름 남짓 남았는데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행사에 가서 알아봤다면서 요즘 미국 비자 받는 데는 돈을 쓰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며 육백만 원을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으니까 그대로 믿자고 강조해 보았지만 아내는 돈을 들여서라도 단번에 비자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터라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집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승낙을 했다.

며칠 후 실망한 목소리로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돈을 준비해 갔더니 이미 늦어 지금은 돈을 써도 아무 소용이 없고 돈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면서 아쉬운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하나님, 감사합니다"란 말이 튀어나왔다. 저들은 돈을 버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일 텐데 그 돈을 그냥 받아 두었다가 요행히 비자를 받으면 자기들이 챙기면 될 것이고 못 받으면 그냥 돌려주면 될 텐데 어째서 그냥 가져가라고 했을까? 분명히 우리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감사가 나온 것이다.

인터뷰 전날 나는 아내더러 아이들과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고 나서 인터뷰에 나가라고 당부를 하고, 나도 금식한 뒤 인터뷰 시간에 맞추어 예배당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해주소서. 담당자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고 아내와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사 순적히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몇 차례 전화 끝에 통화가 되었다. 딸아이가 받았는데 "아빠, 우리 비자 받았어요. 며칠 있다가 미국으로 갈 거예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조마조마하던 차에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아내의 말인즉 심사관이 몇 마디 묻는데 절박한 심정으로 대답도 잘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아이들한테 몇 마디 묻고는 아이들 때문에 보내 줘야겠다고 하면서 도장을 찍어 줬다는 것이다. 옆에서 통역하는 아가씨가 "아줌마는 운수 대통했어요. 요즘 미국 비자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데 아줌마같이 쉽게 받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다시금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가슴 졸이며 애태우던 순간 순간들, 8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하나님 앞에 눈물도 많이 흘렸고 원망도 탄식도 많이 하고 절망의 터널 속을 수없이 넘나들었어도 좌절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믿었습니다. 기쁨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그리고 1993년 11월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에 도착하여 아내는 오늘날까지 15년이 넘도록 동산 장로교회 식당에서 봉사하고 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