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드림교회(담임 이근호 목사)가 워싱턴 주 상원 부의장인 신호범 장로를 초청해 지난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1세대와 2세대를 위한 비젼컨퍼런스'를 열었다.
교회측은 “어려웠던 어린시절과 19세에 미국으로 입양돼 차별받고 억울했던 과거를 딛고 일어서 워싱턴주 상원의원 및 부의장을 지낸 신호범 장로님의 비전 컨퍼런스를 통해 자녀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는 비전을 갖도록 1세들이 격려해주고 기도해주자는 취지로 마련했다.”고 전했다.
신호범 장로는 첫째날은 '두려워말라(사 41:10)'는 제목으로 2세들을 위해 영어로 간증했으며, 둘째날은 '우리들의 갈길(창 12:1-9)'이란 제목으로 1세들을 위해, 셋째날은 '21세기에 한민족의 살 길(창 12:1-9)'이란 제목으로 워싱턴 지역 동포들을 위해 도전과 비전의 말씀을 나누었다.
다음은 첫째날 간증 요약.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빠가 날 버려서 갈 데가 없었다. 4살때부터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줌마 밥 주세요’하면서 구걸을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친구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늘의 별을 세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 엄마가 그리워서, 미래가 어두워서, 외로와서…
7살 때 겨울은 정말 살아남기 어려웠다.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8살이었던 친구 ‘재원’이와 밤마다 꼭 부둥켜 안고 잤다. 재원이는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겠다’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난 그에게 ‘제발 죽지마. 네가 죽으면 난 어떡해’라고 부탁했다. 어느날 그가 보이지 않았다. 기찻길에 깔려 죽은 그를 발견했는데 일본 순사가 그 시신을 트럭에 던져 넣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나는 외쳤다. “넌 겁쟁이야. 난 절대 안 죽을꺼야”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고 미군들이 한강에 주둔했을 때 매일 그곳에 갔다. 초콜릿 같은 음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어느날 미군들이 타고 있던 트럭에서 팔 하나가 죽 나오더니 나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픽업을 당해서 뜨거운 물에 난생 처음 샤워를 했다. 새 옷과 새 신발을 입히더니 미군들의 하우스보이를 시켰다.
어느날 언덕에서 울고 있는데 한 미군이 와서 왜 울고 있냐고 물었다. 영어를 잘 못했던 나는 그저 ‘go away’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 미군은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꽉 껴안았다. 자신도 아이들이 미국에 있는데 아이들이 울면 지금처럼 안아주었을 것이란다. 그가 바로 나를 입양한 양아버지다. 16살 때 입양돼서 18살 때 미국에 가게 됐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으셔서 교육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에 갔는데 그 때까지 어떤 교육도 받지 못했기에 고등학교에서도 못 받아준다고 하고 초등학교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못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울었더니 고등학교 교장이 정말 공부를 하고 싶으면 GED(검정고시 제도)를 보라고 했다. 그 때부터 영어사전을 한장한장 다 외우기 시작했다. 한 장을 외우고 다른 한 장을 외우면 앞장을 금방 까먹었다. 그래서 한장씩 외울 때마다 그것을 태워서 유리잔에 넣고 물과 함께 마셨다. 그렇게 한 권을 다 외웠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교장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때 선생님이 성경을 주시면서 이 구절을 보여주셨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 구절이 큰 힘이 됐고 그 때부터 매일 성경을 읽었다. 그렇게 해서 14개월 만에 GED를 패스했다. 교장선생님도 놀라셨고 아버지도 매우 자랑스러워하셨다.
그 때부터 박사학위를 딸 때까지 하루 3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 1975년 박사학위를 딸 때도 하나님의 지혜로 가능했다. 먼저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박사학위를 딴 후 한국에 갔다. 어릴 적 재원이와 함께 있었던 역에 가서 하루 종일 그와 대화했다. “내가 다시 왔다. 재원.”
미군 친구들과 좋은 식당에 갔었을 때다. 식당 입구에 백인만 들어갈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친구들이 넌 군인이니까 상관없다면서 같이 데리고 들어갔다. 좀 있으니 식당에서 덩치 큰 사람 둘이 오더니 나를 양쪽에서 들고 식당을 가로질러 문 밖으로 내동댕이 쳤다. 끌려나가는 동안 식당내의 모든 백인들이 나를 주목했다. 그 기억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미국에도 인종차별이 많았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법을 바꾸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정치의 길을 걷게 됐다.
31년이 지난 지금도 난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 사건을 절대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 내 50개 주에 최소한 1명 이상의 한인 정치인들이 세워지는 것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30년 내에 한인 대통령이 나오는 것도 꿈꾸고 있다. 씨뿌리는 농부처럼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으리라.
교회측은 “어려웠던 어린시절과 19세에 미국으로 입양돼 차별받고 억울했던 과거를 딛고 일어서 워싱턴주 상원의원 및 부의장을 지낸 신호범 장로님의 비전 컨퍼런스를 통해 자녀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는 비전을 갖도록 1세들이 격려해주고 기도해주자는 취지로 마련했다.”고 전했다.
신호범 장로는 첫째날은 '두려워말라(사 41:10)'는 제목으로 2세들을 위해 영어로 간증했으며, 둘째날은 '우리들의 갈길(창 12:1-9)'이란 제목으로 1세들을 위해, 셋째날은 '21세기에 한민족의 살 길(창 12:1-9)'이란 제목으로 워싱턴 지역 동포들을 위해 도전과 비전의 말씀을 나누었다.
다음은 첫째날 간증 요약.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빠가 날 버려서 갈 데가 없었다. 4살때부터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줌마 밥 주세요’하면서 구걸을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친구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늘의 별을 세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 엄마가 그리워서, 미래가 어두워서, 외로와서…
7살 때 겨울은 정말 살아남기 어려웠다.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8살이었던 친구 ‘재원’이와 밤마다 꼭 부둥켜 안고 잤다. 재원이는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겠다’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난 그에게 ‘제발 죽지마. 네가 죽으면 난 어떡해’라고 부탁했다. 어느날 그가 보이지 않았다. 기찻길에 깔려 죽은 그를 발견했는데 일본 순사가 그 시신을 트럭에 던져 넣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나는 외쳤다. “넌 겁쟁이야. 난 절대 안 죽을꺼야”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고 미군들이 한강에 주둔했을 때 매일 그곳에 갔다. 초콜릿 같은 음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어느날 미군들이 타고 있던 트럭에서 팔 하나가 죽 나오더니 나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픽업을 당해서 뜨거운 물에 난생 처음 샤워를 했다. 새 옷과 새 신발을 입히더니 미군들의 하우스보이를 시켰다.
어느날 언덕에서 울고 있는데 한 미군이 와서 왜 울고 있냐고 물었다. 영어를 잘 못했던 나는 그저 ‘go away’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 미군은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꽉 껴안았다. 자신도 아이들이 미국에 있는데 아이들이 울면 지금처럼 안아주었을 것이란다. 그가 바로 나를 입양한 양아버지다. 16살 때 입양돼서 18살 때 미국에 가게 됐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으셔서 교육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에 갔는데 그 때까지 어떤 교육도 받지 못했기에 고등학교에서도 못 받아준다고 하고 초등학교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못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울었더니 고등학교 교장이 정말 공부를 하고 싶으면 GED(검정고시 제도)를 보라고 했다. 그 때부터 영어사전을 한장한장 다 외우기 시작했다. 한 장을 외우고 다른 한 장을 외우면 앞장을 금방 까먹었다. 그래서 한장씩 외울 때마다 그것을 태워서 유리잔에 넣고 물과 함께 마셨다. 그렇게 한 권을 다 외웠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교장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때 선생님이 성경을 주시면서 이 구절을 보여주셨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 구절이 큰 힘이 됐고 그 때부터 매일 성경을 읽었다. 그렇게 해서 14개월 만에 GED를 패스했다. 교장선생님도 놀라셨고 아버지도 매우 자랑스러워하셨다.
그 때부터 박사학위를 딸 때까지 하루 3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 1975년 박사학위를 딸 때도 하나님의 지혜로 가능했다. 먼저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박사학위를 딴 후 한국에 갔다. 어릴 적 재원이와 함께 있었던 역에 가서 하루 종일 그와 대화했다. “내가 다시 왔다. 재원.”
미군 친구들과 좋은 식당에 갔었을 때다. 식당 입구에 백인만 들어갈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친구들이 넌 군인이니까 상관없다면서 같이 데리고 들어갔다. 좀 있으니 식당에서 덩치 큰 사람 둘이 오더니 나를 양쪽에서 들고 식당을 가로질러 문 밖으로 내동댕이 쳤다. 끌려나가는 동안 식당내의 모든 백인들이 나를 주목했다. 그 기억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미국에도 인종차별이 많았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법을 바꾸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정치의 길을 걷게 됐다.
31년이 지난 지금도 난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 사건을 절대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 내 50개 주에 최소한 1명 이상의 한인 정치인들이 세워지는 것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30년 내에 한인 대통령이 나오는 것도 꿈꾸고 있다. 씨뿌리는 농부처럼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으리라.
▲특송 김주영 사모 | |
▲사회 곽종연 전도사 | |
▲온누리드림교회가 신호범 장로를 초청해 비젼컨퍼런스를 열었다. | |
▲기도 이대우 안수집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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