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에 막을 내린 WBC 야구에서 한국이 일본을 두 번이나 이겼지요? 근데 우리한테 한번 이긴 일본이 쿠바와 결승에서 승리하므로 일찌감치 보따리 싸야 할 일본이 대전 ‘방법’ 때문에 우승한 것 아닙니까? 메이저리그 진출을 목표로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선수들 안 되겠다 싶으면 빨리 K리그에 둥지를 틀어야 합니다. 적기에 ‘방법’을 바꿀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충만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모두 최고의 인생을 살며 최대한의 좋은 것을 얻고 싶어 하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이 주장 하는 ‘방법’과 그 시대 속에 흐르는 사상을 선호하고 따르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법의 차이점”에 있는 것이지 목적은 결국 ‘잘 사는 것’, 인생의 진리와 행복과 기쁨과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결혼식장 가보세요. 식장에서 하객들 앞에서 ‘만세’하고 외치는 신랑 자주 보게 됩니다. 나의 힘으로 나의 능력으로 내가 잘 나서 신부를 얻었다는 승리의 환호성입니다. 예복을 입고 팔 굽혀 펴기를 수십 번씩 하는 신랑도 나타납니다. 모두가 자신의 건강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뜻 아닙니까? 물론, 건강하지 않고 배우지 못 했고 좋은 직장 가지지 못 했다면 누가 그 사람의 배우자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생각하는 “방법의 차이점”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절대시 하는데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출처와 시작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난리법석을 피우고 결혼한 부부가 이혼하잖아요! 부끄럽기는 커녕•••, 안 맞으면 찢어지는 게 당근이지요! 하면서 반문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만 갑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행복과 기쁨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방법’ 은 인생들 처음부터 잘못 되었으니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 죄를 뉘우치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 모양새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그것을 인정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데 그것도 사람 많은 데서 떠들고 다니면서 말하니까 엄청 자존심 상하는 것입니다. 한 술 더 떠서 지금 현재 상태로는 안 되니까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하니 나의 존재에 대한 모욕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에 대해 이야기 하는 성경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성경의 이야기를 할 때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의 한계 안에서 가르치는 교훈은 얼마든지 들을 용의가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소리 즉, 인생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허무하다는 그 말에 많이 가진 자 일수록 심기가 아주 불편합니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압니까? 성경이 인생들의 죄를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수치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최고는 안 되어도 나름대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송두리째 뒤집어서 자만심, 선입견을 사정없이 깨부수었습니다. 원래 “입에 쓴 것이 약이 된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도 그러합니다. 성경이 인생을 정죄할 때 모욕감과 함께 부당하다고 느껴 집니까? 악을 드러내고 위선과 가면과 속임수를 벗겨내며 인생에 진리를 말하며 영원한 삶을 주시는데 왜 문제가 됩니까? 인생이 생각하고 걱정하며 소원하는 것, 또 자신 안에 추하고 더럽고 역겨운 것이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줄 압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인생의 모습 그것들이 사실은 나의 진실 된 모습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성인(Saint)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 정직하고 공평하게 언급합니다.
그런데 왜 이 “방법의 차이점”에 대해 인정하며 존중하지 못하고 분노합니까? 인생은 마라톤과 같은 장기 레이스를 달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결승점에서 면류관을 얻는 우승을 바라보며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10등도 꼴등도 우승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훈련의 방법에 따라 뛰는 방법도 다르고 체력도 스피드도 차이가 납니다. 나름대로 자기의 방법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 가장 좋았냐는 결승에서 말해 줍니다.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이 될 것입니다. 생명의 길은 오직 한 길뿐이요. 행복과 기쁨에 이르는 길도 한 길뿐입니다. 인생들 모두가 하나같이 잘 살고 영원한 그 길을 가고자 합니다. 문제는 “방법의 차이점”입니다. 인생이 끝나는 그 날까지 기회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생들 참으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서 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쉬어가며 위를 쳐다 볼 줄도 알고 영혼에도 시간을 투자할 때 충만한 삶을 위한 “방법의 차이점”가운데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인지 귀한 깨우침이 있었으면 합니다. 샬롬.
뉴욕예안교회 오 영 관 목사(dyoh03@yahoo.com)
사람은 누구나 충만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모두 최고의 인생을 살며 최대한의 좋은 것을 얻고 싶어 하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이 주장 하는 ‘방법’과 그 시대 속에 흐르는 사상을 선호하고 따르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법의 차이점”에 있는 것이지 목적은 결국 ‘잘 사는 것’, 인생의 진리와 행복과 기쁨과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결혼식장 가보세요. 식장에서 하객들 앞에서 ‘만세’하고 외치는 신랑 자주 보게 됩니다. 나의 힘으로 나의 능력으로 내가 잘 나서 신부를 얻었다는 승리의 환호성입니다. 예복을 입고 팔 굽혀 펴기를 수십 번씩 하는 신랑도 나타납니다. 모두가 자신의 건강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뜻 아닙니까? 물론, 건강하지 않고 배우지 못 했고 좋은 직장 가지지 못 했다면 누가 그 사람의 배우자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생각하는 “방법의 차이점”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절대시 하는데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출처와 시작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난리법석을 피우고 결혼한 부부가 이혼하잖아요! 부끄럽기는 커녕•••, 안 맞으면 찢어지는 게 당근이지요! 하면서 반문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만 갑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행복과 기쁨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방법’ 은 인생들 처음부터 잘못 되었으니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 죄를 뉘우치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 모양새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그것을 인정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데 그것도 사람 많은 데서 떠들고 다니면서 말하니까 엄청 자존심 상하는 것입니다. 한 술 더 떠서 지금 현재 상태로는 안 되니까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하니 나의 존재에 대한 모욕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에 대해 이야기 하는 성경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성경의 이야기를 할 때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의 한계 안에서 가르치는 교훈은 얼마든지 들을 용의가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소리 즉, 인생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허무하다는 그 말에 많이 가진 자 일수록 심기가 아주 불편합니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압니까? 성경이 인생들의 죄를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수치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최고는 안 되어도 나름대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송두리째 뒤집어서 자만심, 선입견을 사정없이 깨부수었습니다. 원래 “입에 쓴 것이 약이 된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도 그러합니다. 성경이 인생을 정죄할 때 모욕감과 함께 부당하다고 느껴 집니까? 악을 드러내고 위선과 가면과 속임수를 벗겨내며 인생에 진리를 말하며 영원한 삶을 주시는데 왜 문제가 됩니까? 인생이 생각하고 걱정하며 소원하는 것, 또 자신 안에 추하고 더럽고 역겨운 것이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줄 압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인생의 모습 그것들이 사실은 나의 진실 된 모습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성인(Saint)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 정직하고 공평하게 언급합니다.
그런데 왜 이 “방법의 차이점”에 대해 인정하며 존중하지 못하고 분노합니까? 인생은 마라톤과 같은 장기 레이스를 달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결승점에서 면류관을 얻는 우승을 바라보며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10등도 꼴등도 우승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훈련의 방법에 따라 뛰는 방법도 다르고 체력도 스피드도 차이가 납니다. 나름대로 자기의 방법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 가장 좋았냐는 결승에서 말해 줍니다.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이 될 것입니다. 생명의 길은 오직 한 길뿐이요. 행복과 기쁨에 이르는 길도 한 길뿐입니다. 인생들 모두가 하나같이 잘 살고 영원한 그 길을 가고자 합니다. 문제는 “방법의 차이점”입니다. 인생이 끝나는 그 날까지 기회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생들 참으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서 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쉬어가며 위를 쳐다 볼 줄도 알고 영혼에도 시간을 투자할 때 충만한 삶을 위한 “방법의 차이점”가운데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인지 귀한 깨우침이 있었으면 합니다. 샬롬.
뉴욕예안교회 오 영 관 목사(dyoh03@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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