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참회록>을 쓴 ‘히포의 성 어거스틴’이라면 무신론의 불쏘시개가 돼 버린 다윈의 진화론 논쟁을 어떻게 변증해냈을까?
최근 한국 창조과학회에서 창조과학이 언급돼 있지 않은 교과서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해 화제가 된 가운데,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비판한 책 <도킨스의 망상(Dawkins delusion?)>을 펴낸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가 ‘어거스틴의 종의 기원(Augustine’s Origin of Species)’이라는 글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에 기고했다.
“지금까지 교회는 창조 기사를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 설명으로 대해 왔지만, 복음주의자들이 고이 간직해 온 이같은 말씀의 권위와 명료성은 위험에 빠진 것 같다”는 맥그래스는 “이는 중요한 문제이며, 다윈 탄생 2백주년 행사들은 우리 영적 조상들이 이와 비슷한 문제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이해하려면 교회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우리를 초대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과학 이론에 맞추지 말고,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맥그래스가 말하는 어거스틴의 관점은 지금처럼 새로운 과학 이론에 맞춰 성경 해석을 ‘조정’하거나 ‘타협’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접근은 신학이 근대과학 이전의 세계관에 갇히지 않고 문화의 압력에 타협하지 않도록 도와줬다고 그는 말한다.
어거스틴은 전 생애에 걸쳐 창조 기사가 언급된 창세기 1-2장과 씨름했는데, 그가 저술한 <창세기의 정확한 의미(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에는 이 두 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조직적으로 자세히 설명하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그는 ‘저자 의도에 충실하고 정확한’ 주석을 쓰려 했고, 이에 따라 △하나님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셨지만 △창조의 질서는 고정돼 있지 않고 △창조 안에서 일어나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변화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창조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달려 있다는 등의 중심 주제를 끌어냈다.
그는 ‘잠재적 씨앗’을 예로 들었는데, 하나님은 씨앗을 창조하셨고, 그 씨앗은 적절한 때 자라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 속에 후에 발현되고 진화할 인과관계를 심어놓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창조의 순간 씨앗을 심으신 하나님은 그 씨앗이 성장하는 시간과 장소도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
더구나 어거스틴은 성경 해석가들이 그 시대 과학적 가정에 얽매이는 것을 염려했다. 대표적인 예가 16세기 천동설을 무너뜨린 ‘코페르니쿠스 논쟁’이다. 그는 이를 1천년 전에 이미 예견한 듯 “어떤 성경 본문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한 본문을 당시 우세한 과학 이론들에 얽매여 해석하면 안 된다”며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모호한 문제들과 관련해 우리 믿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여러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본문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당대에 우리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는 이론의 포로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창조론: 모든 것은 섭리 안에
그렇다면 어거스틴은 창조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는 창세기의 첫번째 창조 기사(창 1:1-2:3)만을 따로 떨어뜨려놓고 해석해서는 안 되며, 두번째 창조 기사(창 2:4-25)는 물론 성경 속 다른 주장들과 함께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시편 33편 6-9절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순간이라고 말하지만, 요한복음 5장 17절은 하나님이 여전히 창조세계 속에서 일하신다고 증거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창세기 2장 4절의 제대로 된 의미에 대해 “날이 창조됐을 때 하나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위의 모든 푸른 것들도 만드셨다”며 6일간의 창조는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창조라는 하나님의 일을 분류하는 방식’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는 또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를 기원이라는 최초 역사로 한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창조하신 것이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잠재력이 펼쳐지도록 세상 속에서 여전히 일하신다고 주장했다. 창조된 순간이라는 최초의 역사, 그리고 창조된 모든 것이 섭리 가운데 인도되는 지속적 과정이라는 두 가지 ‘창조의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과거 완료된 사건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처음 창조할 당시 창조 가운데 감춰뒀던 계획들을 펼치시며 유지하고 감독하는 일을 하신다.
이러한 관점은 우주가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를 따라 진화할 역량을 갖고 창조됐다는 사실을 긍정하게 한다. 따라서 창조의 최초 상태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일치하지 않고, 개발되고 진화하도록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도였다고 그는 주장한다. 진화의 계획이 우연이 아니라 창조 계획에 이미 포함돼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는 창조된 질서가 지속적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감독한다는 것이다. 맥그래스는 “따라서 어거스틴은 우주가 법칙 없이 임의대로 변화한다는 주장에 분명 반대했을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에 깊이 관여하기 때문에 이는 다윈의 임이 변의 개념에도 예외가 아니다”고 말했다. 변화 과정이 예측 불가능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는 법칙이 있다는 뜻이다.
맥그래스는 “어거스틴이 우리를 대신해 다윈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진짜 문제는 성경의 권위에 있지 않고 올바른 해석에 있다는 사실을 보도록 도와준다”며 “현재 논쟁 중인 문제들 중 일부를 밝혀 줄 창조에 대한 권위있는 생각의 방식을 제공해주기도 한다”고 밝혔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자도, 타협가도 아닌 본질과 의도 모두에 대해 깊이 성경적일 뿐이며, 그의 접근이 최종 결론일 수는 없지만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맥그래스는 “당시 권위자들과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한 어거스틴의 비평은 적어도 유력한 과학적 견해에 비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다는 그의 열린 태도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맥그래스의 이 글은 크리스채너티투데이 5월호, 한국어판 6월호에 실려 있다.
최근 한국 창조과학회에서 창조과학이 언급돼 있지 않은 교과서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해 화제가 된 가운데,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비판한 책 <도킨스의 망상(Dawkins delusion?)>을 펴낸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가 ‘어거스틴의 종의 기원(Augustine’s Origin of Species)’이라는 글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에 기고했다.
“지금까지 교회는 창조 기사를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 설명으로 대해 왔지만, 복음주의자들이 고이 간직해 온 이같은 말씀의 권위와 명료성은 위험에 빠진 것 같다”는 맥그래스는 “이는 중요한 문제이며, 다윈 탄생 2백주년 행사들은 우리 영적 조상들이 이와 비슷한 문제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이해하려면 교회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우리를 초대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과학 이론에 맞추지 말고,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맥그래스가 말하는 어거스틴의 관점은 지금처럼 새로운 과학 이론에 맞춰 성경 해석을 ‘조정’하거나 ‘타협’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접근은 신학이 근대과학 이전의 세계관에 갇히지 않고 문화의 압력에 타협하지 않도록 도와줬다고 그는 말한다.
어거스틴은 전 생애에 걸쳐 창조 기사가 언급된 창세기 1-2장과 씨름했는데, 그가 저술한 <창세기의 정확한 의미(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에는 이 두 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조직적으로 자세히 설명하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그는 ‘저자 의도에 충실하고 정확한’ 주석을 쓰려 했고, 이에 따라 △하나님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셨지만 △창조의 질서는 고정돼 있지 않고 △창조 안에서 일어나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변화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창조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달려 있다는 등의 중심 주제를 끌어냈다.
그는 ‘잠재적 씨앗’을 예로 들었는데, 하나님은 씨앗을 창조하셨고, 그 씨앗은 적절한 때 자라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 속에 후에 발현되고 진화할 인과관계를 심어놓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창조의 순간 씨앗을 심으신 하나님은 그 씨앗이 성장하는 시간과 장소도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
더구나 어거스틴은 성경 해석가들이 그 시대 과학적 가정에 얽매이는 것을 염려했다. 대표적인 예가 16세기 천동설을 무너뜨린 ‘코페르니쿠스 논쟁’이다. 그는 이를 1천년 전에 이미 예견한 듯 “어떤 성경 본문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한 본문을 당시 우세한 과학 이론들에 얽매여 해석하면 안 된다”며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모호한 문제들과 관련해 우리 믿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여러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본문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당대에 우리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는 이론의 포로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창조론: 모든 것은 섭리 안에
▲탄생 2백주년을 맞아 다윈을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세계적으로 활발하다. 일반 언론들은 지나칠 정도로 다윈과 관련된 기획을 양산하고 있다. ⓒ기독일보 DB |
그는 또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를 기원이라는 최초 역사로 한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창조하신 것이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잠재력이 펼쳐지도록 세상 속에서 여전히 일하신다고 주장했다. 창조된 순간이라는 최초의 역사, 그리고 창조된 모든 것이 섭리 가운데 인도되는 지속적 과정이라는 두 가지 ‘창조의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과거 완료된 사건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처음 창조할 당시 창조 가운데 감춰뒀던 계획들을 펼치시며 유지하고 감독하는 일을 하신다.
이러한 관점은 우주가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를 따라 진화할 역량을 갖고 창조됐다는 사실을 긍정하게 한다. 따라서 창조의 최초 상태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일치하지 않고, 개발되고 진화하도록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도였다고 그는 주장한다. 진화의 계획이 우연이 아니라 창조 계획에 이미 포함돼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는 창조된 질서가 지속적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감독한다는 것이다. 맥그래스는 “따라서 어거스틴은 우주가 법칙 없이 임의대로 변화한다는 주장에 분명 반대했을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에 깊이 관여하기 때문에 이는 다윈의 임이 변의 개념에도 예외가 아니다”고 말했다. 변화 과정이 예측 불가능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는 법칙이 있다는 뜻이다.
맥그래스는 “어거스틴이 우리를 대신해 다윈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진짜 문제는 성경의 권위에 있지 않고 올바른 해석에 있다는 사실을 보도록 도와준다”며 “현재 논쟁 중인 문제들 중 일부를 밝혀 줄 창조에 대한 권위있는 생각의 방식을 제공해주기도 한다”고 밝혔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자도, 타협가도 아닌 본질과 의도 모두에 대해 깊이 성경적일 뿐이며, 그의 접근이 최종 결론일 수는 없지만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맥그래스는 “당시 권위자들과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한 어거스틴의 비평은 적어도 유력한 과학적 견해에 비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다는 그의 열린 태도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맥그래스의 이 글은 크리스채너티투데이 5월호, 한국어판 6월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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