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세대교체, 교회연합, 2세 사역, 부흥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들고 시카고 지역 목회자 40인을 만난다. 이 인터뷰를 통해 시카고 한인교회의 여론을 수렴하고 한인교회의 미래와 나아갈 바를 조명하고자 함이다. 40인 인터뷰는 시카고 교계의 발전을 위한, 가능한 모든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시무하는 교회의 교세, 목회자의 교단적 배경, 목회 연수 등에 관계없는 순으로 게재된다.

스물일곱번째 인터뷰는 척박한 시카고 한인 이민목회 현실에서 몇 안되는 여성 목회자, 그 중에서도 시카고 지역 연합감리교회 내에서 유일하게 한인교회 담임을 맡고 있는 박미숙 목사다. 여목의 목회적 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한인들의 인식은 아직도 저조한 형편이지만 연합감리교회의 많은 한인 여성들이 미국교회의 담임 목회자를 맡아 성공적으로 목회하고 있다. 박 목사는 서울신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이민와 미국 직장에서 7년간 근무하다 39세에 게렛신학교로 진학해 M.Div.를 마치고 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자로 안수받았다. 당연히 한인교회 목회를 지망했지만 “아직 여목이 한인교회에서 담임하는 것은 어려우니 미국교회로 가는 게 어떠냐”는 감리사의 말에 “알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맥도날드로 뛰어가 한인 불신자들을 전도하며 한인교회인 샘물감리교회를 개척했다. 시카고 지역의 유일한 한인 연합감리교회 담임 여목이라는 타이틀에 개척교회 목사라는 어려움까지 겹쳐진 순간이었다. 12년 전 일이었다.

-먼저 목사님이 목회와 개척을 하게 된 동기나 결심부터 들어 보고 싶습니다.

여성이 목회하는 것은 역시 힘듭니다. 그러나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여목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장로, 어머니가 권사이신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교회에서 존경받는 아버지를 보며 장로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다닌 교회는 예장통합측 교회였는데 40여년 전에 여자가 장로가 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대상과는 달리 아들 딸 차별이 전혀 없으셨고 제게 늘 “너는 박순천 여사 같은 여성 지도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새벽기도회를 다니시다가 자신도 모르게 신유 은사를 받으셔서 부흥사가 되셨습니다. 정작 본인은 “하나님, 전 이런 능력이 필요도 없고 자격도 없으니 목사님들에게 주십시오”라고 은사를 거부했지만 부흥회를 안 나가면 몸이 아파서 견딜 수 없게 되자 결국 사명을 받아 들이고 부흥회에 나서곤 했습니다. 저는 신학이 조금은 자유로운 연합감리교회의 목사지만 신앙만은 “예수가 누구이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왜냐며 어머니가 손을 대니 병자가 낫고 못 걷던 사람이 걷고 귀신이 도망가는 것을 제 눈으로 중학생 때부터 보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성경 한권으로 얼마나 많은 능력이 나타나는지 저는 보았습니다.

저희 집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많이 받아 아버지가 교회 건축할 때 재정의 90% 이상을 헌금하시고 개척교회도 7개나 세우셨습니다. 어머니는 부흥회로 들어오는 사례금을 모두 모아 신학생 장학금으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이런 능력이 나타나자 목사님들이 어머니를 이단이라고 몰아 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7일을 금식하고 노회 모임에 찾아가 휴회 시간에 발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신학을 공부하고 노회에서 안수받고 목회자로 부름 받았지만 저는 하나님이 직접 부르셨습니다. 저는 목회에 관심도 없고 은사를 바란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했더니 이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단이 되길 원하지 않으니 여러 목사님들이 제가 하는 일 중에 이 성경에 없는 것이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그럼 저는 다시 이런 활동을 안하겠습니다”라고 하셨답니다. 누구도 어머니의 발언에 반박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어머니를 통해서 여성의 놀라운 능력을 보았고 어떻게 하면 불쌍한 사람을 돕고 돌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 평생 여목을 본 적이 없었고 들어 봐야 ‘최자실 목사님’에 관해서만 들은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게렛에 진학해서 보니 절반 이상이 여성들이었습니다. 샘물교회를 개척할 때, 제 기도제목은 불쌍한 사람, 외로운 사람, 혼자된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수가성의 여인처럼, 그 여인이 길러 나오다 주님을 만난 샘물같은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샘물교회를 개척해 12년에 이르렀습니다. 샘물은 작지만 생명수가 솟아나는 그런 곳입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는 성도가 4-50여명 정도지만 제대로 정착된 분이 없습니다. 성도 중 자기 집을 가진 분도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이혼이거나 싱글, 혹은 부부 중 한 사람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개척멤버 없이 혼자 개척을 했습니다. 게다가 한인목회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신학교를 마친 후에 한국어로 된 목회서적들을 5백불어치 사다가 읽으면서 그때부터 본격적인 한인목회 연구를 시작한 셈입니다. 맥도날드를 다니면서 한명 한명 만나고 문을 두들기며 전도했습니다. 어떤 분은 “여호와의증인은 2명이 다니는데 왜 당신은 1명이냐”고 묻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시작해서 한 사람을 적어도 6개월에서 1년 이상 만나면서 전도해 교회로 데려 왔습니다. 대부분 불신자거나 초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개척이 뭔지 모르니까 시작했지 아마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 못했을 것입니다. 남자가 해도 쓰러지는데 여자가 하면 얼마나 갈까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박미숙 목사는 이민목회의 어려움에 개척의 어려움, 여성 목회자로서의 어려움까지 더한 상황이지만 기쁨과 감사 가운데 목회에 임하고 있다.
-개척도 개척이지만 여성으로서 목회하는 것도 이민교회 현실에서 쉽지만은 않으셨을텐데요.

연합감리교회 안에는 한인 여목이 1백명이 넘습니다. 그러나 이중 한인교회 목회를 하는 분은 5-6명 정도로,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대부분이 부목사이거나 미국교회 담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숫자에서만 봐도 여성들의 한인목회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를 시작했을 때 제단에 올라가지 않고 설교할 때만 올라갔습니다. 성도들에게 “성도는 모두 같은 주님의 지체로서 동등하다. 그러나 설교할 때는 지체로서 내 사역이 설교하는 것이므로 제단에 올라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지체로서의 동등성을 강조하면서 목회를 했습니다. 또 저는 예배 때 목회자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난 예수님은 늘 가난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제가 화려한 예복을 입을 때마다 내가 이것을 입을 자격이 있나? 예수님도 이런 것을 입지 않으셨는데….

그러다 보니 제가 예배 때 입는 옷을 보고 성도들의 불만이 너무 많았습니다. “너무 밝다. 너무 어둡다, 너무 치마가 짧다. 옷이 구식이다. 목사가 권위가 없어 보인다”부터 “시장에서 일하는 아줌마 같다”고까지 했습니다. 저는 옷 입는 것부터 화장하는 것까지 너무나 신경이 쓰였습니다. 미국교회는 여성의 옷이나 꾸밈에 상당히 자유로운데 한인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옷을 살 때도 “저 것이 나에게 어울리나”보다는 “성도들이 날 어떻게 볼까”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교회에 아이들이 오면 너무 사랑스러워서 안아주고 업어주면 “이웃집 사람처럼 하니까 목사 권위가 안선다”고 하고 친절하게 하면 “너무 친절하니 교회가 부흥이 안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너무 슬퍼서 많이 울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내가 여자라고 무시하는구나. 내가 차별받고 있구나”라면서 고통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날 무시해라. 그러나 난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단계까지 지나자 “울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날 이렇게 여성으로 만드셨고 여성인 나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신다면 누가 막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머니와 동일한 경험을 하신 셈이네요. 그때 한인교회 개척을 하지 않고 미국교회로 갔다면 어땠을까요?

제가 좀 교만한 편입니다. 집도 상당한 부자였고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반장을 도맡아 했습니다. 어딜 가더라도 나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그게 완전히 깨졌습니다. 여성 목회자에다 교회까지 작으니 어디 가도 조용히 앉아 있으면 되지 나설 필요가 없으니 좋았습니다. 이렇게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이 제 인생의 큰 축복이었습니다. 아마 미국교회에서 목회를 했다면 지금도 앞에 나서느라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샘물교회를 개척할 때만 해도 “난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이들이 날 필요로 하므로 내가 여기 있다”고 자부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하나님이 샘물교회를 통해 날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성도와 문제가 생기면 “내가 이 문제를 아직 해결 못했구나. 내가 이런 부분에 아직 완성이 덜 됐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배짱도 많이 생겼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관해서는 너무나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저는 지금 작은 한인교회에서 목회합니다. 이민에 정착하지 못해 한국으로 가는 분도 많고, 경제 위기로 인해 타주로 가는 분도 많습니다. 그렇게 교인 이동도 많고 교회가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소외되고 힘든 분들의 믿음의 보금자리입니다. 모두 다 길거리에서 만나서 데려 온 분들입니다. 전 하나님이 이들을 위해서, 또 저를 위해서 샘물교회를 시작하셨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죽 들어 보아도 여성 목회자의 장점이 여러가지 있어 보입니다.

우리 여성들이 목회를 참 잘 합니다. 남성 목회자들이 잘 적응하지 못하는 까다로운 미국교회에 간 한인 여목들도 참 잘 적응하고 성공적으로 목회합니다. 미국교회는 철저히 파트너십을 존중하기에 한국 남성처럼 권위적으로 목회할 수 있는 풍토가 아닙니다. 여성은 아무래도 생활력이 강하고 파트너십이 뛰어 납니다. 어디 가서 대화가 잘 안되는 성도를 만나고, 영어가 안 통하더라도 따뜻하게 인내하고 이겨냅니다.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은 남성적 측면이 강하지만 신약에 오면 예수님과 성령님은 여성적 측면이 강합니다. 하나님은 돌보시는 분이고 목회도 양을 키우는 일입니다. 특히 이민목회는 여성들이 훨씬 어울린다고 봅니다.

여성은 섬세합니다. 자상합니다. 남성들은 그냥 스치는 일도 여성들은 찾아냅니다. 이민사회 성도가 얼마나 힘듭니까? 밤 늦게까지 일하게 될 경우, 그 집에 가서 어린이들도 봐 주고 밥도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일도 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이웃집 아줌마”라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는 선한 목자셨기에 저는 양이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고, 양이 울 때 함께 우는 그런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양이 아플 때 자신은 배부르다면 그것은 참 목자가 아닐 것입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신다는 주님처럼 제가 하는 이런 섬김은 “이웃집 아줌마”라서가 아니라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는 도움만 받고 떠나기도 하고, 어떤 성도는 도움을 받은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서 떠나기도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양을 돌보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여성들의 장점입니다.

-여성 목회자들의 연합 모임은 잘 되나요? 이 지역은 어떤가요? 목사님은 잘 참여하는 편인가요?

연합감리교회에는 한인 여성 목회자들은 연합 모임이 있습니다. 다른 교단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경우는 한인 목회를 하다 보니 미국교회를 담임하는 연합감리교회 한인 여목들의 모임에 가면 목회적 상황이 좀 다르다 보니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한인 목회자들의 모임에 가면 대부분이 남성 목회자들이라 또 어색합니다. 그러나 목회에 도움이 되는 세미나나 행사가 있을 때는 가끔 참여하곤 합니다.

-이 지역 교회연합 문제를 이야기 할 때, 어떤 점이 개선이 되면 좋을까요?

제가 목회를 하다 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회나 여성들의 모임에서 설교를 요청받곤 했는데 그때마다 자격지심이 들었습니다. “교회도 부흥 못 시킨 주제에 내가 전하는 모든 말이 다 거짓말이고 자기합리화다”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모임에 참석하는 것 자체에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됐습니다. 모임에 어쩌다 참석을 해도 큰 교회 목회자와 작은 교회 목회자로 모임이 나뉘어지고 작은 교회 목회자는 마치 실패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힘을 받기 위해서 연합 모임에 가는 것인데 오히려 기가 죽어 오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자격지심에 사로 잡혀 있었는데 어떤 분이 “목사님은 목사인데 어디 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절 도전했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제가 개척한 교회는 작지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참이고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전하면 되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이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고, 다른 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 자체가 우리 교회의 존재 가치이고 제가 목회하는 보람이었습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담대해졌고 그런 자격지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 모임에서 나오는 말도 “이렇게 하면 교회가 부흥된다. 얼마나 커졌다” 이런 이야기이지 작은 교회를 돌보는 이야기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연합 모임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나,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혹은 열 달란트 받은 자가 다 함께 이야기 하고 한 달란트 받은 자를 돌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해 주면 좋겠습니다. 연합 모임이 작은 교회의 자존감을 살려주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 지역 목회자 공석 현상에 관해서도 들어 보셨나요?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 일에 관해 목회자들이 탈진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도 목회를 해 보니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남성 목회자들도 성도들이 주는 상처나 힘듦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웃어야겠습니다. 서로 웃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면 좋겠습니다. 기쁘고 감사하게, 울다가도 금방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자마다 은사가 다른 것은 확실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가 탈진하거나 떠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제 지론은 “내가 이 교회에서 살아남고 버티면 어디 가더라도 잘할 수 있지만 이곳에서 버티지 못하면 어디 가도 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버티지 못하게 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좀더 인내하면 좋겠다는 의견이시지요? 성도들에게도 인내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성도들의 문제는 성도들의 문제고 제 입장에서는 목회자들만 봅니다.

-2세 목회에 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저는 2세 목회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2세 목회가 잘 안되는 이유로는 2세를 1세에게 끼워 맞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청년들을 봐도 사고방식이나 문화가 너무나 다른데 2세 지도자들을 1세의 틀에 맞추어 키워 내려 하니 이게 시작부터 어려울 수 밖에요. 이렇게 다른 존재들이 1세 교회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전 결국 이민 역사가 오래될수록 2세, 3세들이 미국교회로 편입되어 가지 않을까 전망합니다.

-그것은 한인교회 입장에서 부정적 현상이 아닌가요?

사춘기를 넘어 청년이 되면 2세들은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미 이들은 미국화 돼 있어서 한국인보다는 미국에 사는 한인으로서의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 갑니다. 지금 한국도 농촌으로 가면 동남아시아인들이 시집와서 민족이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우리 2세, 3세들은 미국교회로 편입되어 갈 것 같습니다.

▲미국교회와의 따뜻한 연합도 여성 목회자가 가진 장점인 따뜻한 권위와 섬김을 십분 발휘한 덕분이다.
-샘물교회는 미국교회인 트리니티연합감리교회와 교회를 같이 사용하고 있지요? 어떤 장점이 있나요? 아무래도 2세들의 교육에 도움받을 리소스가 다양할 것 같습니다.

트리니티교회는 성도가 3백명에, 백인이 주를 이루는 미국교회입니다. 서로 자매교회가 되어서 서포트 하고 행사도 같이 참여하면서 아름답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12년 전, 개척돼 밴슨빌에 있다가 3년 전, 현재 위치인 마운트프로스펙트로 이전하면서 트리니티교회에 들어오자 이들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차장 문제부터 청소 문제까지 하나하나 마찰이 일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부터 섬기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쓴 공간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이 쓴 공간까지 다 청소하고 저부터 청바지를 입고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제가 대걸레질만 3년을 했더니 이젠 프로 수준입니다. 어떤 미국인 성도는 “신학교에서 화장실 청소는 안 가르쳐 주죠”라고 진지한 농담을 던질 정도였습니다. 늘 제가 먼저 미국인 성도들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도울 것이 없는지 묻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얼마동안 했더니 미국교회가 우리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지금은 하나처럼 됐습니다. 우리 성도 중에는 미국교회 예배를 드리고 샘물교회에 와서 또 예배 드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교회 소식도 많이 알게 되고 이들이 사용하는 기독교 교육 공과나 프로그램에 우리 2세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규모가 큰 교회에다 교단이 같다 보니 이들이 사용하는 값비싼 교재들도 저희는 그냥 쓸 수 있고 각종 프로그램에도 함께 하게 됐습니다. VBS부터 사회봉사활동까지 다양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주고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이 가진 큰 것을 주는 것입니다.

제가 여성이다 보니 아무래도 권위주의를 버리고 미국인 성도들에게 먼저 따뜻하게 다가가려 한 것도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샘물교회는 교회 규모에 비해서 무숙자 섬김 등 사회 활동에 굉장히 활발하지요? 사회 봉사와 복음 전도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교회와 함께 하는 무숙자 섬김, PADS에 매번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성도들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요즘 경제대란 때문에 외모로 보면 전혀 무숙자 같지 않지만 실은 무숙자가 되어 차에서 잠을 자거나 셸터를 찾는 분들이 많습니다. 시카고 지역에 사설 복지센터가 몇 군데 있긴 하지만 무숙자에게 처소와 직장을 제공해 주는 곳은 공공기관에서 하는 곳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 샘물교회에서는 PADS의 연장으로 “샘물의 집”을 건립해 인종에 관계없이 이들 무숙자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계획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3만5천불을 모았습니다. 앞으로 6만5천불을 더 모아 나일스나 데스플레인 같은, 한인들이 많은 지역에 “샘물의 집”을 세우려 합니다. 집을 잃고 힘든 상황에 처한 분들이 언제든 와서 몇달간 머물며 안식을 얻고 교육받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곳입니다. 간단한 클리닉도 만들고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클래스도 열 겁니다. 물론 예배도 드립니다. 샘물교회의 아웃리치 프로그램으로 활용하면서 복음을 전할 계획입니다.

이 센터를 세우기 위해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것처럼 일명 ‘이삭줍기’ 운동으로 6만5천불을 모금하려 합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생기는 푼돈을 모아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며 동시에 병든 자는 고쳐 주셨고 배고픈 자는 먹이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닮아 가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다. 성도가 아픈데 “아프지 마세요”라고 하는 것이 목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제가 그 병을 고쳐 주지 못한다면 병원에 데려가 주는 것이 목자의 할 일입니다. “믿음이 있느냐? 그럼 행함을 보이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가르침입니다. 항상 신앙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저는 나중에 작은 모텔을 통째로 사는 것이 꿈입니다. 그래서 1층은 성전으로 만들어 예배 드리고 나머지는 불쌍한 사람들이 와서 쉬고 재활되고 새 삶을 찾게 하고자 합니다. 수백명 목회도 귀하지만 이렇게 10-20명이라도 살려 내면 그것도 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동료 목회자들께 한 말씀 더 해 주십시오.

저는 여목으로 개척을 시작해 12년간 너무도 많이 울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고 좀더 안정된 미국인 목회를 하고 싶다 생각도 했습니다. 연합감리교회는 장로교나 침례교와 달리 저 같은 엘더 목사는 반드시 목회지로 파송되도록 해 최소한의 경제적 보장이 됩니다. 저 역시 아마 미국교회로 파송되었다면 개척교회에 이민교회 목회자로 겪는 지금의 형편보다는 경제적 사정이 조금 나았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자립되어 갈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교회로 가지 않고 한인교회 개척을 할 때 제가 하나님께 받은 비전과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 함께 이 비전을 이뤄보자” 해 놓고 혼자 떠나 버리면 그것은 제가 정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왜 힘들고 떠나고 싶을까 제 스스로를 분석해 보니 결국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했는데 돈 때문에 떠나고 싶다면 앞으로 그 찬양을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부족한 제가 많은 말을 했지만 힘든 목회의 길을 함께 가는 이민 목회자들이 교회가 작다고, 부흥되지 않았다고 힘들어 하지 말고, 혹은 누군가로부터 상처받고 무시당했다고 쓰러지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 이 길을 힘써 달려 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