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가나 선교회 주최로 열린 컨퍼런스에 총체적 지역 개발 훈련을 위해 네팔에 다녀왔다. 인도, 파키스탄, 부탄 등 네팔 주위의 여러 나라 현지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참석했는데 힌두과 불교의 발상지인 곳에서 국경을 넘어서는 남다른 하나님의 가족들의 재회시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차와 버스를 타고 이틀을 와야 했지만 반기독교의 문화에 사는 이들에게는 중요한 하나님 가족의 팀빌딩과 정보의 출처가 되며 특히 네팔의 현지 지도자들에게는 많은 것이 새로운 것이었다. 그 유명한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곳이라 여행객이 많을 것이고 도시 케트만두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어두컴컴한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그 기대는 나의 오산이었음이 명백해졌다. 모든 것이 수동으로 돌아가고 비행기편도 몇 되지 않았다.
네팔은 2006년까지 왕국이었다가 과도 정부를 거쳐 2008년 5월 네팔 민주 공화국으로 되었는데 1996년에는 공산주의 이론을 따르는 마오이스트들이 인구 37%나 차지하는 네팔 원주민(자나자티스)이 무장투쟁을 시작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내었다. 지금까지 힌두교가 국교이었다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신헌법에서 국교를 폐지하였는데(지난 6월) 힌두교가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좁은 길에 울퉁불퉁한 도로, 표정이 없는 얼굴들과 삐적 마르로 작은 몸들. 삶이 고달픈 것 보다 더 섬뜩한 것은 생기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엄격한 규율 밑에 풍요와 다산에 대한 염원의 종교의 흔적. 왕정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사회주의 투쟁까지 겪고 더이상 소망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이 한 가운데 아직 십자가를 밖에 내걸지는 못해도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 교회들로 하여금 이 사회가 깨끗게 되고 다시 태어나는 삶을 경험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과 딸들로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 세대와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이 교회에서 나와야 할텐데. 교회와 믿는자들의 역할과 책임이 더 없이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소망이었다.
준비하는 동안 컨퍼런스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성(거룩)과 속(세속)의 이원론이 강함으로 말씀으로 그 패러다임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사상에 입각해 잘못된 이원론 속에 있는 서양 생각의 틀이라면 바알 숭배부터 시작된 힌두제도나 불교, 유교의 정적인 사상에 입각한 이원론은 휠씬 더 뿌리가 깊은 것이다.
실제적인 논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주제 강의에 들어가기 전 기독교 세계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정체성, 일에 대한 신학, 청지기 소명에 대한 강의는 필수였다. 말씀에 바탕해서 새롭게 세계관에 변화가 오기 전에는 다른 변화는 기대할 수 없고 그 변화는 말씀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었다.
연속되는 창조 사역으로서의 경제 활동, 아버지 하나님의 위임자로서 일에 대한 이해와 일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지혜를 더 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영어 후에는 네팔, 힌두로 통역을 하였는데 한국 목사님 말씀시에는 한국어까지 4가지 언어가 반복되었다. 반복되는 말씀 안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결단 그리고 새로운 사랑이 움트고 있었다.
딱딱했던 얼굴들이 아주 서서히 피고, 내면에서부터 결정지어진 소망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자본 사업, 마이크로 론에 대해 - 그 론을 사용하여 이익을 내며 동네에 유익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일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위해 여러가지 사업 케이스를 설명했다.
세미나는 계속되고 오후 6시에 드디어 전력이 끊어졌지만, 촛불과 프래쉬 라이트를 켜 놓고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마음에 움직임이 오고 있었다.
모슬림 지역에서 작은 론으로 종족간의 갈등이 풀린 케이스, 부인이 셋이나 있던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된 얘기들…사례를 설명하면서 더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그들에 대한 신뢰였다. 그들이 더 잘 할 수 있다는.
감옥에 두 세번이나 갇혔었다는 파키스탄에서 온 목사 부부 – 어려움이 오히려 그 사랑을 더 하게 한 것인지. 어렴풋이 머리 속에 있던 사업의 아이디어들이 온전한 계획으로 그려진다고, 닭농장과 미장원은 금방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조용히 얘기한다. 핍박 속에서 더 창의적으로 더 담대하게 나가는 것을 보면서 같은 동지들은 힘을 얻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약간의 자금(론)과 코우칭으로, 그 지도자들의 격려와 가르침으로 얼마나 많은 주의 백성들이 돌아올 것인가. 그들 한사람, 한사람으로 인해 펼쳐질 하나님의 샬롬. 4일의 짧은 세미나였지만 한 달이나 같이 있었던 양, 그들의 마음이 보이는 듯 했다.
목이 메어와 눈을 마추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주님 지켜주소서, 이들의 마음을! 주님 인도하소서, 이들의 노력을! ‘주의 나라 임하소서’ 이것은 우리의 기도이기 이전에 주님의 기도이였고, 우리의 비전이기전에 하나님의 소원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어떤 사람들은 기차와 버스를 타고 이틀을 와야 했지만 반기독교의 문화에 사는 이들에게는 중요한 하나님 가족의 팀빌딩과 정보의 출처가 되며 특히 네팔의 현지 지도자들에게는 많은 것이 새로운 것이었다. 그 유명한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곳이라 여행객이 많을 것이고 도시 케트만두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어두컴컴한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그 기대는 나의 오산이었음이 명백해졌다. 모든 것이 수동으로 돌아가고 비행기편도 몇 되지 않았다.
네팔은 2006년까지 왕국이었다가 과도 정부를 거쳐 2008년 5월 네팔 민주 공화국으로 되었는데 1996년에는 공산주의 이론을 따르는 마오이스트들이 인구 37%나 차지하는 네팔 원주민(자나자티스)이 무장투쟁을 시작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내었다. 지금까지 힌두교가 국교이었다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신헌법에서 국교를 폐지하였는데(지난 6월) 힌두교가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좁은 길에 울퉁불퉁한 도로, 표정이 없는 얼굴들과 삐적 마르로 작은 몸들. 삶이 고달픈 것 보다 더 섬뜩한 것은 생기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엄격한 규율 밑에 풍요와 다산에 대한 염원의 종교의 흔적. 왕정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사회주의 투쟁까지 겪고 더이상 소망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이 한 가운데 아직 십자가를 밖에 내걸지는 못해도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 교회들로 하여금 이 사회가 깨끗게 되고 다시 태어나는 삶을 경험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과 딸들로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 세대와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이 교회에서 나와야 할텐데. 교회와 믿는자들의 역할과 책임이 더 없이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소망이었다.
준비하는 동안 컨퍼런스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성(거룩)과 속(세속)의 이원론이 강함으로 말씀으로 그 패러다임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사상에 입각해 잘못된 이원론 속에 있는 서양 생각의 틀이라면 바알 숭배부터 시작된 힌두제도나 불교, 유교의 정적인 사상에 입각한 이원론은 휠씬 더 뿌리가 깊은 것이다.
실제적인 논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주제 강의에 들어가기 전 기독교 세계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정체성, 일에 대한 신학, 청지기 소명에 대한 강의는 필수였다. 말씀에 바탕해서 새롭게 세계관에 변화가 오기 전에는 다른 변화는 기대할 수 없고 그 변화는 말씀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었다.
연속되는 창조 사역으로서의 경제 활동, 아버지 하나님의 위임자로서 일에 대한 이해와 일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지혜를 더 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영어 후에는 네팔, 힌두로 통역을 하였는데 한국 목사님 말씀시에는 한국어까지 4가지 언어가 반복되었다. 반복되는 말씀 안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결단 그리고 새로운 사랑이 움트고 있었다.
딱딱했던 얼굴들이 아주 서서히 피고, 내면에서부터 결정지어진 소망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자본 사업, 마이크로 론에 대해 - 그 론을 사용하여 이익을 내며 동네에 유익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일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위해 여러가지 사업 케이스를 설명했다.
세미나는 계속되고 오후 6시에 드디어 전력이 끊어졌지만, 촛불과 프래쉬 라이트를 켜 놓고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마음에 움직임이 오고 있었다.
모슬림 지역에서 작은 론으로 종족간의 갈등이 풀린 케이스, 부인이 셋이나 있던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된 얘기들…사례를 설명하면서 더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그들에 대한 신뢰였다. 그들이 더 잘 할 수 있다는.
감옥에 두 세번이나 갇혔었다는 파키스탄에서 온 목사 부부 – 어려움이 오히려 그 사랑을 더 하게 한 것인지. 어렴풋이 머리 속에 있던 사업의 아이디어들이 온전한 계획으로 그려진다고, 닭농장과 미장원은 금방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조용히 얘기한다. 핍박 속에서 더 창의적으로 더 담대하게 나가는 것을 보면서 같은 동지들은 힘을 얻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약간의 자금(론)과 코우칭으로, 그 지도자들의 격려와 가르침으로 얼마나 많은 주의 백성들이 돌아올 것인가. 그들 한사람, 한사람으로 인해 펼쳐질 하나님의 샬롬. 4일의 짧은 세미나였지만 한 달이나 같이 있었던 양, 그들의 마음이 보이는 듯 했다.
목이 메어와 눈을 마추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주님 지켜주소서, 이들의 마음을! 주님 인도하소서, 이들의 노력을! ‘주의 나라 임하소서’ 이것은 우리의 기도이기 이전에 주님의 기도이였고, 우리의 비전이기전에 하나님의 소원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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