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 이름 중심 신학의 회복

에스겔에는 우리가 아는 하나님과는 조금 다른 하나님의 모습이 나온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묘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만 만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말씀이 오늘의 말씀이다. 오늘 말씀에는 우리를 축복하는 것이 우리를 위함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반복되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이다.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꼽으라면 그것은 하나님이다. 성경은 인간의 구속사역을 위하여 쓰여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찬양사역은 하나님 중심의 사역이고 변화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 이름 중심의 책이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고 높임을 받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인간이 타락하는 이유는 인간 중심의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지옥' 설교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복음의 양면성 때문이다. 복음을 듣고 나면 너무 감격해서 하나님의 사랑만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장 27~28절에 보면 예수의 가장 큰 소망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5번 정도 하나님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려 한 것이 구약과 일치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을 때 벌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다. 우리의 신앙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편 23편 3절에 보면 우리를 위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나와있다. 어찌보면 하나님이 이기적이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이름은 온 우주만물이 그 이름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이름을 위하여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다. 십계명의 첫 계명도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감정에 의해 변질된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교회의 모든 사역이 사람과 연관된 사역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중심이 되기 쉽다. 모든 사역은 사람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찬양사역은 사람을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이다. 찬양사역은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이 뜨거워지거나 변화되겠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름 중심의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 영광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2. 극진한 찬양의 회복

역대상 16장29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찌어다’라는 구절이 도전과 부담이 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되 그 이름이 받아 마땅한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린 아이로부터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이 될 수 있다.

25절에 보면 ‘극진히’라는 단어가 나온다. ‘극진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한정되어 있다. 부모나 왕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하나님을 ‘극진히’ 찬양해야 한다.

’극진히’는 히브리말로 '메오드'라고 한다. '메오드'는 구약성경에 300번 쓰인 단어이다. 이 단어가 어디에서 쓰였는지도 아주 중요하다. 창 1장에 보면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의 ‘심히’가 바로 ‘메오드’이다. 하나님이 창조 중간에 ‘메오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이 완성된 다음에 ‘메오드’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그렇게 찬양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새찬양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하지 않고는 그렇게 하기 힘들다.

이사야서 43:21은 우리의 창조의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유일한 말씀이다. 우리의 창조의 목적으로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는 것은 원어적으로 보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지 추상적인 찬양이 아니다. 광의적 의미의 찬양은 삶이 찬양이 되는 것이며 협의적 의미의 찬양은 기악이나 목소리로 드리는 찬양이다.

그러나 사43:21은 ‘테힐라’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협의의 찬양의 의미를 갖는다. 악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자기가 원하신 것이 아니다. 명령이었다. 시편 33:3에 보면 ‘새 노래로 즐거운 소리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라’고 나와 있다. 이것은 명령이다.

3. 새찬양 사역은 영성을 회복시키는 사역이다.

왕하 3:15- 이 상황은 엘리사가 영감이 있어서 예언을 하는 상황이 아니라 하기 싫어하는 상황이다.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라 했다. 그와 같이 음악을 통해서 영성이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49:4 - '수금으로 나의 마음을 풀리로다.' 아주 어려운 말씀을 음악을 통해서 풀어주겠다는 말씀이다. 음악을 통해서 영감이 회복된다. 영성 회복 운동 때 마다 찬양의 회복이 같이 일어났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음악이 어떤 수준의 음악이냐에 따라 영성이 결정된다.

시 40:3 - 새 노래를 하나님께서 내 입에 두셨다고 다윗은 고백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음악가이다. 다윗은 자기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찬송가가 귀중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4. 마지막 시대의 사역이다.

계 14:7 - 중국 새찬양 컨퍼런스의 주제 성구였다.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다 보니 찬양이나 예배보다 전도가 더 중요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시간이 가까웠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이야기한다. 영광을 돌리라는 것과 찬양을 드리라는 것이 동격으로 이사야43장 7절, 21절에 나와있다. 여기에 보면 내가 내 영광을 위해서 창조했다고 나와있는데 21절에는 내게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 찬송했다고 나와 있으므로 두 가지를 비교해서 봤을 때, 그것이 동급으로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천국에서 해야 할 일이 찬양이므로 영원히 해야 하는 사역이 찬양이다.

지금은 찬양보다 다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성경에는 하나님을 극진히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왜 짧은 시간에 극진히 찬양하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세상의 어떠한 일과도 무관하게 그분은 극진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영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의 사정과 관계없이 그 분은 영광스러운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한 사람씩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께서 복음 듣는 자들을 더하시는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역대하 20장 -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 세워서 여호와를 찬송하게 했다. 그들은 목숨을 다해서 찬양했다. 그런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께서 싸우셨다. 그리고 적들을 패하게 하셨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찬양사역자들의 사역의 중요성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찬양사역자들은 영적 싸움의 최선봉에 서있다. 영적 전쟁을 내가 싸울 것인가 하나님으로 싸우시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찬양 사역자들에게 달려있다. 하나님을 찬양으로 기쁘시게 하고 목숨을 다한 찬양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주셨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싸움을 대신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자녀들이 피흘리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찬양을 받으시는 것을 원하시고, 그러므로 대신 싸워주시는 은혜가 있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라. 예레미야 13:16 - 흑암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고 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고 그분이 받으 실 만한 극진한 찬양을 돌려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5. 예배 회복

역대하 29장 28절-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 유대민족이 포로로 잡혀가기 전 왕으로 망하기 전에 영적부흥이 일어났던 왕이다. 영적 부흥을 일으켰던 왕의 공통점은 찬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번제를 마치기 까지 나팔을 불었다고 하는데 번제는 하루종일 걸린다. 그러므로 하루종일 나팔을 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찬송과 경배라는 단어가 나온다. 두 단어가 한 구절에 나온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두 가지가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배의 원뜻은 섬긴다. 몸을 굽혀 절한다 라는 뜻이 있다. 경배가 그와 같은 단어이다. 히스기야 왕때 찬송과 경배가 회복되었다. 예배의 회복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찬송가를 잊어버리고 있어서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겠는가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다음세대에 찬송을 물려주려는 것은 찬양과 예배가 분리 될 수 없기 때문이다.

6. 어린이 찬양의 회복

마태21:16.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찬미를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셨다. 하나님은 이들의 찬양에 관심이 많다. 이것이 극진한 찬양과 연결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의 찬양을 회복해야 한다. 이 사역은 음악의 기초를 가르쳐 주고 있다. 처음에 피아노 콩쿨을 시작한 것은 피아노가 음악의 기초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이 새찬양 사역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콩쿨은 우리의 사역의 시작일 뿐이다. 준비된 찬양사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찬양 꿈나무라는 말이 없는데, 꼭 있어야 하는 단어라고 생각해서 만들었다. 역대상 25장1~3절에 보면 전부 아버지에게 찬양을 배워서 찬양했다고 말하고 있다. 레위지파는 가문이 찬양하는 가문이라 아이들은 날 때부터 찬양을 듣고 교육을 받아서 크면 자동으로 찬양을 하고 나이가 들면 찬양을 가르치다 부름을 받았다. 구약시대에는 찬양꿈나무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