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복음이야기, Q 말씀복음서에 대한 바른 이해

어릴 때 이웃집 아이들하고 사소한 일로 다툼을 하다가 이웃집 아이들 어머니로부터 "네 부모님이 어떻고, 가정 교육이 어떻고" 하면서 매우 혼났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내 어머니께서 보시고 그 이웃집 어머니에게 크게 화내셨던 일을 기억한다. 그 이유는 아이들 다툼의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일이지 어떻게 남의 가정의 부모 인격과 가정 교육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무조건 내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하여 조목조목 따지시면서 조용히 타이르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오늘 나는 어린 시절 내 어머니의 심정으로 요즘에 일어나고 있는 도올 김용옥 교수(세명대 석좌교후, 중앙일보 기자)와 기독교 및 교회에 대한 불편한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2007년 한국 EBS(교육방송)에서 시작한 인터넷 강의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에서 도올은 교육방송에서 영어강의를 위하여, 판권이 없는 것을 선택하다 보니 요한복음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성경 내용을 설명하다 보니 필연코 신학적인 문제가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인은 <정통신학>에 입각하여 성경 내용을 본래의 의미대로 전달하고자 다짐하고 있었으나, 첫 번 강의부터 많은 신학적인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기독교계를 화나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또한 요즘 도올은 <요한복음 강해>, <기독교성서의 이해>, <도마복음이야기 1>, 등의 기독교 서적을 출간하고 있다. 물론 동양철학을 전공한 그가 기독교의 서적을 출판하고 또한 성경을 방송을 통하여 대중적으로 강해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복음의 대중화와 활성화를 위하여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도올은 정통 기독교 신학자도 아니고,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도 아니다. 그런데 도올이 기독교와 교회와 신학에 대하여 너무 깊숙이 무차별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이런 점이 나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런 불편함은 마치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의 심정일 것이다. 물론 도올이 말하고 있는 문제점이 기독교와 교회와 신학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또 현재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인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앞서는 것을 잘못된 것일까?

김용옥 교수는 자신을 기독교 평신도라고 하면서 자신의 믿음의 뿌리를 예수교장로회의 권사님이었던 어머니와 유아세례 받은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그의 아내도 기독교 계통의 대학교수이며 그의 장모는 모 감리교회의 장로였고, 그의 집안의 많은 친인척들이 현재 기독교의 교회에서 중직으로 헌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가 가서 예배를 드리면 감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여 비판적인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게 되면서 점차 교회에서 "솔로몬의 백합화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어서 북한산에 가서 등산하면서 새소리 물소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찾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교회에서 보고 싶었던 백합화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만약 그에게 교회가 백합화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그는 반 기독교인(?)이라는 불명예가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아름다운 평신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이제 그의 강의를 통하여 그가 추구했던 "백합화 같은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는 공관복음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핵심진리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막 12:31) 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교회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맹목적으로 믿고 천당에 가는 것이 당신들의 신앙의 본질인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혀 논구하지도 않고 전혀 언급하지도 않는다 할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계명 하나를 죽을 때까지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가? 예수는 과연 부활과 대속을 선포했을까? 이웃의 사랑을 선포했을까?"라고 묻고 있다.

이러한 도올의 질문을 받은 나의 심정은 이렇다. 학문하는 자들의 맹점은 너무 일방적이고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이라는 것이다. 도올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어떻게 기독교와 교회의 신앙의 본질을 <믿음-신앙고백>과 <삶-행위> 중 한 쪽을 선택하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가? 이 시점에서 내가 도올에게 제시할 답은 기독교와 교회의 신앙은 A or B가 아니라 A and B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즉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믿음-신앙고백>과 <삶-행위>의 균형 있는 조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올은 <도마복음이야기>와 를 근거하여 역사적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육성으로 제자들과 대중에게 선포하셨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행위>를 중심으로 선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올은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와 신학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 <삶-행위>에 절대적인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도올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는 아니다. 기독교와 교회와 신학은 <삶-행위>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복음과 구원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복음과 구원의 신비는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와 신학에서는 <믿음-신앙고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믿음-신앙고백>은 예수님을 기점으로 탄생한 초대교회부터 2천년 역사를 흘러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전수된 것이다. 만약 도올의 말대로 기독교와 교회가 이 <믿음-신앙고백>을 외면하고 <삶-행위>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2천년 교회의 역사와 모든 전통을 파괴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신학 중에서 성경신학과 신약신학 및 역사적 예수와 Q 말씀복음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 왔고,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도올의 도발적인 요구가 담고있는 소박한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 듯 하다.

즉 오늘날의 기독교와 교회와 신학이 너무 <믿음-신앙고백>적인 면으로 치 닫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이 너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적 믿음 중심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일방적으로 "주여 주여"만 외치고 있다는 것에 반성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의 기독교와 교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 백성의 <삶-행위>는 외면한 채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필요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충당하기 위하여 믿음이라는 허울아래 주술적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외치는 것만을 가르치는데 치중하고 있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학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행위>에 대한 실천적인 면을 외면한 채 앞으로 우리의 미래에 다가올 부활과 재림과 천국에 대한 신비적이고 비역사적인 것만을 체계화하고 연구하여 가르치는데 치중하고 있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맺고자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독교와 교회와 신학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 대한 신앙고백의 뼈대를 중심으로 더욱 든든히 서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 도마복음이야기나 Q 말씀복음서 및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천국백성의 윤리와 삶과 행위에 대한 실천적인 면을 교회 안팎에서 강조하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 감당해야만 한다. 만약 이 일에 사명을 갖고 기독교의 신학자들과 교회의 목회자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도올과 같은 사람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고, 그들은 불쾌하게 계속적으로 교회의 뺨을 때릴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