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명설교가로 꼽히는 곽선희 목사가 워싱턴DC를 찾아 ‘설교의 패러다임 전환’에 관해 강연했다. 지난 27일 워싱턴지역한인교회협의회 주최로 열린 교역자 세미나에 참석한 곽 목사는 “교회가 교회 되려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 초점의 변화는 패러다임의 전환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본국의 개신교 감소 현상에 관해 “이는 목회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열심만 내기 때문”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곽 목사는 가톨릭에 비교할 때 개신교의 장점이야말로 말씀선포 행위인 ‘설교’라고 꼽으며 강연의 문을 열었다.

곽 목사는 지식을 전하는 설교, 도덕과 율법을 강조하는 설교, 사회갱신을 목적으로 하는 설교를 본질에서 벗어난 설교라고 지적하는 한편, 기도응답으로 영감있는 설교, 창의력 있는 설교, 검증된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를 바른 설교로 꼽았다.

그는 “설교는 지식을 주거나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라며 “지적인 설교를 하느라 힘들어 하는 목회자들은 지식적 접근을 버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도덕적 설교는 율법이며 영적인 설교는 복음”이라고 말했다.

정치, 공해, 생태계 등 사회적인 갱신을 촉구하는 설교에 관해서도 ‘교회에서는 안해도 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다만 설교로 사람을 바꾸면 이런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목회자들이 설교하고 목회함에 있어서 성도들의 빠른 변화를 기대하며 조급해 하거나 형식적인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경계하라고 조언했다.

반면, 좋은 설교는 “조용히 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는 영감있는 설교, 영적인 감동이 있는 설교다”라고 말했다. “자살하려고 했다가 교회 나와서 감동받고 새 사람이 되는 분들은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설교에서 기도응답을 받는 것이다”라고 예를 들었다.

곽 목사는 “목회자는 늘 공부하고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소재를 갖고 설교해야 하고 낡은 것, 저장해 놓았던 것을 꺼내서 쓰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소재는 늘 자기 경험에서 나와야 하며 이것이 없으면 간접경험이라도 해야 그것이 검증된 진리가 되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곽선희 목사 설교 전문>

목회 현장에서 수고하시는 중에 다시 한 번 같이 만나게 된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오늘 이 시간에 강의를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바로 몇 달 전에 문성모(서울장신대 총장) 박사님께서 책을 쓰셨는데, 제목은 ‘곽선희 목사로부터 배우는 설교’이다.

이 분이 4년 동안 연구를 해서 책을 썼는데, 절절이 절실하게 썼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연구해서 썼다. 이 책을 정독해 주면 별다른 강의를 할 필요가 없다.

요새 제일 큰 문제가 목회자가 열심은 있는데, 공부를 안 하는 것이다. 제가 만든 잠언 “어리석은 자가 소신껏 사는 것처럼 구제불능인 것은 없다.”

개신교 감소에 대해서 목회자들이 심각하게 기도하고 연구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문제는 점점 커진다. 목사들이 공부는 안하고 열심만 내면 이게 바로 교회가 어려워지는 이유다. 정부 통계에 의하면 지난 10년 동안 신교는 1.4% 감소했다. 그런데 카톨릭은 74% 부흥했다. 이 소리 듣고도 정신 못 차리면 시체다.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목사가 아니다. 어찌 카톨릭은 부흥하고 신교는 감소하나? 연구해야 한다. 정말 심각하게. 기도를 해도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보고 부흥시켜달라 한다고 하나님이 다 하시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더 놀라운 것은 신교인이 카톨릭으로 간다. 지성인들이. 가는 이들 추적해 리서치 하니까, 여러 교수들이 연구 발표 논문집에 의하면, 귀담아 들을 이야기가 많다.

카톨릭에는 예배가 있고 우리는 친교, 한쪽은 조용하고 한쪽은 시끄럽다. 시끄러워서 거기 갔다. 정신 못 차리겠다. 지성인들이 하는 말이다. 예배당 가면 15분 동안은 조용히 묵상 기도를 하고 참회 기도를 하고 예배 드리고 싶다고. 그게 우리의 공통적 심정이다. 그런데 교회 오면 시끄러워. 기도할 마음, 시간도 없고.. 카톨릭에는 묵상과 예배가 있단다.

교회는 분위기부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교가 시끄러워서 다 잃어버린 것. 이걸 아셔야 한다. 예배가 공중분해 되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 기도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파괴했다. 기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난 가끔 집회 다니면서 보면, 어떤 교회는 설교 끝난 다음에 통성기도 한다. 그러면 목사가 마이크로 크게 기도한다. 기도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혼을 빼 놓는다. 기도 못한다. 기도하라고 했으면 기도할 분위기를 만들어줘야지.. 대전에 있는 큰 교회 집회 인도하러 갔는데, 목사뿐만 아니라 젊은이 4명까지 마이크로 소리지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기도는 하나님도 들을 수 없겠다. 쉽게 말하면 만민이 기도하는 집. 기도 없고 말씀 없으면 교회가 아니다. 이래서 안 된다. 예배당 여기 있지만, 하늘나라의 agent 여기 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하나님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한다. 그게 교회. 그런데 어쩌다 교회가 이런 데가 되었나? 댄스홀, 노래방이 되었다.

보는 것이 많으면, 듣는 것이 없어진다. 듣는 소리 커지면,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진다. 교회가 보는 게 너무 많다. 어떤 교회 가니까 사방에 써 붙였는데, 기도, 선교하는 교회라고. 휘황찬란. 정신 없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상의 신전은 하나같이 요란한 것. 하나님의 전. 솔로몬 성전은 아무 것도 없다. 천정도 없다. 이게 예루살렘성전이다.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인데 뭘 볼게 있나. 요새 교회는 너무 볼거리가 많다. 시끄럽고 정신이 없다. 혼을 빼 놓는다. 기도, 말씀이 없다. 이게 교회이다. 그러니 교회가 교회의 본성을 잃어버리니까 내려 앉는 것.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 들어서면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예수 소망교회 분당에 만들었는데, 하나님 앞에 은퇴하며 기도했다. 은퇴 하지만, 설교 하게 해 주세요. 지금 8000명 모인다. 3년 반 되었는데, 독특한 교회 속성을 살리려고 했다. 예배 들어서면서부터 기도하는 분위기 만들었다. 파이프 오르간 있는데, 예배 시간 전 30분 전부터 연주하면 그 소리 들으며 기도한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 해 준다.

젊은 이들 멘트 한답시고 5분 설교를 한다. 교회는 분명 만민이 기도하는 집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중요. ‘곽선희 목사는 설교 하나로 목회한다’는 말을 한다. 우리는 심방도 안 한다. 교회버스도 없다.

교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교회 부흥시킨다. 교회 관심 많은 이가 서로 시기, 질투하고.. 제일 좋은 교인이 주일 예배 드리고, 조용히 10만원 헌금하고 그냥 가는 이, 관심 없는 이가 많으면 다다익선. 예배하는 교회 되면 갈라질 수가 없다. 수직적 관계니까. 이게 교회이다. 그래서 카톨릭은 부흥되고 신교는 안 되는 것. 우리 신교의 장점은 뭐냐. 설교이다. 설교가 있으면 교회고, 말씀이 있으면 부흥하는 것. 85%가 관심은 설교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 관심 없다. 교회에서 친교하자 하고 ‘차 마십시오’ 하고.. 하는데, 그런 거 아무 필요없다.

피해야 할 설교

교회가 교회되려면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 잘 하고 싶은데, 왜 안되냐? 설교가 뭔지 모르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제 설교 연구해서 박사 논문 4개, 석사 논문 100개 이상 나왔다. 그런데 그거 보면 50%도 제대로 못 보았다.

1. 지식을 전하는 설교는 피해야

설교에 제일 무서운 함정이 있다. 잠깐 실수하면 함정에 빠진다. 자기도 모르게. 첫째는 institute. 설교를 지식화 하는 것. 설교는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이 많은 지식을 주려고 한다. 그러니 설교 준비하느라 힘든 것. 저는 한평생 설교하는 것 한 시간 준비 한다. 45분이면 된다. 그런데 왜 설교준비 하는 게 힘들어지냐? 지적인 설교를 하려고 하니까. 교인들에게 지식 준다고 사람이 달라지냐? 설교는 깨달음으로, 감동으로가 아니다. 사람이 변화되어야.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가 되어야.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면 성경 공부 많이 하는 교인이 사람 되는 것 봤나? 많이 하면 할수록 말썽이다. 마지막엔 목사 나가라고 한다. 왜 그럴까? 목사가 설교 잘 못하니까. 많은 지식. 여러분 아시는 대로. 지식 많아지면 교만해진다. 지식만 가지고 말만 많아지고 생각이 복잡해진다. 지식은 가질수록 의심 많아진다.

야곱이 아들이 12명. 여기까지는 좋은데 ‘아내가 4명이고 몸종을 통해 자식을 낳았네’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성도는 계속 의심이 깊어진다.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다. 남을 정죄하게 된다. 바리새인 서기관이 된다. 이들이 다 성경 학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일단, intellectual approach 를 버려야 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에 초점 맞추어야 한다. 유명한 이야기 많이 해서 되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명 설교가가 교회를 죽인다. 지적 접근은 헬레니즘적인 접근. 히브라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묵상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

2. 도덕성을 강조하는 설교도 피해야

도덕률을 강의하는 것. 계속 도덕성을 말한다. 다 소용없는 짓이다. 도덕에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잔 소리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애들 놓고 이래라 저래라 말씀은 이렇다. 저렇다. 도덕적 훈계가 사람을 만들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간단히 말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다. 도덕적 훈계가 사람 살리지 못한다. 변명거리만 만들어 준다. 현대 교회가 너무 도덕 강연을 많이 한다.

‘아내를 사랑하라’는 도덕 강연,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설교. 이게 교회이고 설교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교회가 왜 부흥이 안되겠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 속에서 사람이 변한다. 자기도 모르게. 변화가 되어서 원수 같은 마누라가 천사같이 변하고. 이게 바로 설교이다. 영적 변화가 이루어 지는 것. 도덕주의, 율법주의에는 한계가 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는 죽이는 것이다라고 했다. 율법적, 도덕적 이야기는 제발 그만하라.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데, 교회에 와서 또 얻어맞아야 하나?

3. 사회화(사회의 복음주의화)-사회 갱신 목적

설교해서 세상 바꾸어야 한다. 나라, 공해, 생태계 등등. 이런 이야기는 교회에서 안 해도 된다. 이게 설교의 주제가 되면 안 된다. 이런 사회 이야기 세상이야기, 정치 이야기 그만 합시다. 필요 없다.

4. 조급성.

이 자리에서 당장 변화가 있기를 너무 바란다. 적극적 반응을 바란다. 부흥사 스타일. 하도목사가 아멘하라고 하니 어느 장로가 “아멘꺼리가 있어야 하지” 그랬다고 한다.

5. 형식주의.

결과주의에 치우친다. 당장 몇 사람 모이면 되는 줄 안다. 그것도 아니다.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면 되는 것. 내가 씨를 뿌리고 하나님이 신비로운 가운데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것. 서두르다 다치는 것이다.

바른 설교

1. 영감 있는 설교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이야기 하겠다. 바른 설교가 뭘까. 첫째. 영감 있는 설교. 영적 감동.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설교. 도덕성으로 듣는 것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다. 조용히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다. 이게 중요.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가 교회 나와서 감동 받아 새 사람 되어 사업한 분들 있다. 이런 변화. 말씀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말씀이 사람을 확 바꾸어 놓는 것. 이런 영감 있는 설교.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설교 통해서 기도 응답을 받는다.

어느 날 저희 교회에 외국인 몇 사람 왔다. 이 분이 가면서 편지를 남겨 놓고 가셨다. 20년 동안 기도했던 기도 제목이 있었는데 설교 중에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귀중한 것 인가. 기도 응답으로서의 설교. 응답은 설교 중에 받는 것. 설교를 통해서 듣는 것. 이것이 영감있는 설교.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설교.

2. 창의력 있는 설교.

새롭다. 새로운 소재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 공부해야 한다. 컴퓨터에 들어있는 소재는 낡은 것. 고물상자. 새롭게 책을 읽고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소재가 되는 것. 낡은 것 저장한 것 꺼내어서 안 된다. 컴퓨터 설교는 교인들이 다 안다. 이렇게 되면 떠난다. 새롭게 느끼고 경험한 것이라야 한다. 항상 새로움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3. 검증된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

여자 목사 중 상당수 처녀이다. 통계학 적으로 결혼 한 사람보다 처녀 교역자가 더 일 많이 할 것 같죠? 열심히 하고 목숨 걸고 하니까. 그런데 목회 안 된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목사는 남편 있고 애가 몇 씩 있다. 이상하죠. 알다가도 모를 놀음. 정치가도 그렇다. 처녀들이 더 할 것 같죠? 전부 남편 있고 애가 수두룩하다. 이 사람들이 일 많이 한다. 이거 알아야 한다. 왜 노처녀가 안 될까? 사랑하라 하면 교인들이 ‘사랑해 봤냐?’ 자녀교육이 어떻고 ‘네가 애 낳아봤냐?’

카톨릭 신부가 설교 잘 하는 이 없다. 경험이 없다. 검증된 진리가 아니다. 제가 군선교 관계 하는데 24년 이사장 하는데, 군인들에게 가서 설교하면, 옛날 방위나갔던 사람들 그 사람이 설교하러 가면, 군대에 몇 기생입니까? 방위.. 어 그렇구만.. 설교 안 된다. 제가 참전 군인. 지금도 국가에서 8만원씩 준다. 경험이 없으면 안 된다.

자기 경험이 없으면 안 된다.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경험 속에서 스크린 되어야 한다. 메시지가 충분히 소화 되어야. 이것을 증거라고 한다. 사건을 통해 내가 경험한 사건을 통해 말하는 것. 이게 증거. 행동한 게 없다. 그러면 안 된다. 좀 더 중요한 이야기 하자면, 북한에 자주 다닌다. 북한 선교 20년 동안 하는데, 젊은 이들이 ‘북한 언제 갔어요?’하고 물어본다. ‘갈 때마다 돈 많이 들어서 자주 못 가’ 그러면 ‘목사님 자주 갔다 오세요’ 한다. 갔다 오면 설교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가서 비참한 것 보고 오면 설교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경험이라는 것. 몸을 부딪혀 직접 경험, 돌아보는 동안에 현대 젊은 목사들이 너무 체험이 없다. 체험적 목회자, 신앙도 아니고. 책 봐서 말만 하는 것. 추상적이고.. 이 설교는 감동이 없다. 그래서 검증된 진리여야 한다.

왜 손으로 만졌나? 이런 사건이 있고서야 설교가 되는 것. 검증된 진리. 안에서 간증처럼 witness 증거로 나오는 설교래야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 그럴려면, 제일 핵심적인 것은 목사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어떻게 듣게 하겠나.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내가 먼저 들어야. 성경을 하나님을 말씀으로 믿는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한다.

휴스턴에 가면 조엘 오스틴이 있다. 신학도 하지 않았던 그에게 설교를 맡길 때 그 아버지는 “네가 목사집에서 35년 살았으니 신학 한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만큼 체험적 진리가 중요한 것이다.

그 교회가 부흥하는 3가지가 있다. 첫번째 교회가 전용적으로 쓰는 용어를 쓰지 않고 일반 용어로 복음 설명하는 점이다. 신학을 안했으니까 신학용어를 모른다. 두번째는 신학적 변론을 벌이지 않는다. 세번째는 성경 해석이 없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Inductive preaching이다. 효도안하는 자식에게 아무리 효도하라고 말해도 듣지 않는다. 얘야, 너 몇 살이냐? 공부하기 싫지? 네. 나도 그랬다. 그리고. 네가 장가가서 너 같은 아들 낳으면 어떻게 하겠니? 죽여버리죠. 이렇게 말한 아들이 금방 효자가 됐단다. 계율적으로 도덕적 연설하지 말고, 사건 속에서 설명이 되어야. 생생한 사건 속에서 설명이 되어야. 그래야 사람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