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은 성령 충만과 비례한다.
예수님은 비움의 극치를 이루신 분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고, 철저하게 겸손히 낮추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움은 그냥 단순히 비움의 차원이 아니다. 거기에는 성령의 함께 하심이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셨기에 철저히 자신의 것을 비우실 수 있으셨다. 눅 4장 1절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렇다. 누구든 성령으로 차면 찰수록 쉽게 비울 수 있다. 비우는 만큼 성령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비움과 성령 충만은 비례하는 것이다.
때문에 비움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되는 것이다. 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채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령으로 계속 채우기 위해서는 계속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요7장에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성령의 강물이 흘러난다’고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분명 성령이 강물처럼 흘러 남을 믿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 앞에 매일 친밀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때 성령의 충만함이 당연히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말씀 그대로 해보면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의 내면세계에서 비움이 나타날 것이다.
왜 비움이 어려운가? 성령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운다’는 말의 의미
지난 글에서 ‘비운다’라는 헬라어 단어의 뜻에는 ‘영향력이 없게 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예수님은 모든 삶에서, 사역의 현장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없게 하셨다.’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비운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3가지로 생각해 본다.
1)‘비운다’라는 말은 ‘권리포기’이다.
다윗은 세상의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대상29:11)고 고백한다. 학개 선지자는 ‘은도 금도 하나님의 것’(학2:8)이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사도바울은‘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고전6:20)말한다. 그렇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고, 그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나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때문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에 대한 불만족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2)‘비운다’는 말은 ‘떠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익숙했던 환경, 가장 친숙했던 삶의 터전, 가장 의지하던 삶의 줄, 안정 된 편안한 삶, 등등의 것들로부터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비움이다. 또한 그러한 것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이 비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다면서도 왜 우리는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도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비움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3)‘비운다’는 말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요즘시대는 기준이 없는 시대인 것 같다. 스스로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중시여기고 살아간다. 물론 그럴듯하게 들리는 소리이지만 철저하게 성경과 위배되는 세상의 소리에 불과하다.
‘성경(Bible)’을 ‘정경(Canon)’이라고 한다. ‘잣대’라는 뜻이다. ‘잣대’는 ‘기준’을 의미하는 말이다. 곧 성경이 우리의 잣대이며, 우리의 기준인 것이다. 잣대 없이 치수를 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소리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기준 없이, 삶을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늘의 기준을 외면하고 불완전한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자기 나름대로 정한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는 삶이 우선순위를 분명히 정한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과 그 말씀을 우선순위로 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교만한 마음과 그 부산물인 거만과 무지 때문이다. 광대하시고 넓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비워야 하는가?
요즘 전반적으로 영성분야에서 영성수련을 중시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 훈련을 하다 보면 쉽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영성은 차갑고, 냉기가 돌고, 금욕적이고, 절제되고, 세상의 것들과 단절된 곳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호텔방 따스한 침대에서도 얼마든지 뜨겁게 피어오를 수 있는 것이 영성이다. 마찬가지로 ‘비운다는 것’은 특수한 장소에서 나타나는 한계적인 것이 절대 아니다. 비움은 어디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성령의 일 하심’이다. 호텔방에서도, 세상이 단절된 폐쇄 공간에서도, 금욕적인 특별한 훈련 가운데에서도, 성령을 통한 비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령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비움의 영성은 얼마든지 피어 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비울 수 있을까? 성경에서 제시하는 방법을 따라가면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갈2장20절 말씀이다. 이 말씀을 매일 아침마다 4단계로 나누어서 실천해 볼 것을 권면하고 싶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성실하게 실천해 보자. 분명 성령의 일하심으로 ‘비움’의 평강이 우리 안에 자유롭게 일어남을 기쁨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1 단계>
묵상 말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선포 : 나의 옛 존재가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임을 분명히 믿고 선포한다.
<2 단계>
묵상 말씀 :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이지만 육체 가운데 산다”
선포 : 육체를 가지고 살기에 실수와 실패와 넘어짐과 범죄 가운데 노출 될 수 있는 나약한 존재 임을 철저히 인정하라.
<3 단계>
묵상 말씀 :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선포 : 나약한 존재이지만 내 안에 생명이신 예수님이 분명히 살아계심을 믿고 확신하라. 나는 옛 존재를 벗어버린 새로운 피조물임을 확신하며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확신하라.
<4 단계>
묵상 말씀 :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선포 :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기에, 그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그 분이 나를 살아주시도록 자신을 비운다.
비운다는 것은 예수님께 나의 모든 주도권을 넘겨드린다는 말이다. 주도권을 넘겨드렸다는 말은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생각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행동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살아가시도록 나를 비우는 것이다.
이러한 비우는 영성은 어떤 기간을 정해놓고,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훈련을 받는 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매일 매일 계속 실천할 때 서서히 이루시는 성령의 일 하심이다.
예수님 안에 항상 머물러 있는 사람들, 그들은 성령을 통하여 비우는 영성을 소유할 것이다.
비우는 것은 하늘의 것을 사모하고, 땅에 것을 죽이는 것이다. 비우는 것은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치 않는 것을 버리는 지혜이다. 그래서 비움의 영성은 우리에게 하늘의 능력을 가져다 준다.
비우는 영성을 소유해 봄이 어떨까?
예수님은 비우는 영성만 가진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채우는 영성’을 가진 분이시다. 예수님은 그냥 무조건 비우신 분이 아니다. ‘채우시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비우셨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채우는 영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올네이션스교회 양종관 목사
예수님은 비움의 극치를 이루신 분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고, 철저하게 겸손히 낮추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움은 그냥 단순히 비움의 차원이 아니다. 거기에는 성령의 함께 하심이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셨기에 철저히 자신의 것을 비우실 수 있으셨다. 눅 4장 1절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렇다. 누구든 성령으로 차면 찰수록 쉽게 비울 수 있다. 비우는 만큼 성령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비움과 성령 충만은 비례하는 것이다.
때문에 비움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되는 것이다. 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채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령으로 계속 채우기 위해서는 계속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요7장에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성령의 강물이 흘러난다’고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분명 성령이 강물처럼 흘러 남을 믿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 앞에 매일 친밀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때 성령의 충만함이 당연히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말씀 그대로 해보면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의 내면세계에서 비움이 나타날 것이다.
왜 비움이 어려운가? 성령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운다’는 말의 의미
지난 글에서 ‘비운다’라는 헬라어 단어의 뜻에는 ‘영향력이 없게 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예수님은 모든 삶에서, 사역의 현장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없게 하셨다.’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비운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3가지로 생각해 본다.
1)‘비운다’라는 말은 ‘권리포기’이다.
다윗은 세상의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대상29:11)고 고백한다. 학개 선지자는 ‘은도 금도 하나님의 것’(학2:8)이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사도바울은‘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고전6:20)말한다. 그렇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고, 그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나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때문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에 대한 불만족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2)‘비운다’는 말은 ‘떠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익숙했던 환경, 가장 친숙했던 삶의 터전, 가장 의지하던 삶의 줄, 안정 된 편안한 삶, 등등의 것들로부터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비움이다. 또한 그러한 것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이 비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다면서도 왜 우리는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도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비움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3)‘비운다’는 말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요즘시대는 기준이 없는 시대인 것 같다. 스스로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중시여기고 살아간다. 물론 그럴듯하게 들리는 소리이지만 철저하게 성경과 위배되는 세상의 소리에 불과하다.
‘성경(Bible)’을 ‘정경(Canon)’이라고 한다. ‘잣대’라는 뜻이다. ‘잣대’는 ‘기준’을 의미하는 말이다. 곧 성경이 우리의 잣대이며, 우리의 기준인 것이다. 잣대 없이 치수를 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소리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기준 없이, 삶을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늘의 기준을 외면하고 불완전한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자기 나름대로 정한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는 삶이 우선순위를 분명히 정한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과 그 말씀을 우선순위로 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교만한 마음과 그 부산물인 거만과 무지 때문이다. 광대하시고 넓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비워야 하는가?
요즘 전반적으로 영성분야에서 영성수련을 중시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 훈련을 하다 보면 쉽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영성은 차갑고, 냉기가 돌고, 금욕적이고, 절제되고, 세상의 것들과 단절된 곳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호텔방 따스한 침대에서도 얼마든지 뜨겁게 피어오를 수 있는 것이 영성이다. 마찬가지로 ‘비운다는 것’은 특수한 장소에서 나타나는 한계적인 것이 절대 아니다. 비움은 어디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성령의 일 하심’이다. 호텔방에서도, 세상이 단절된 폐쇄 공간에서도, 금욕적인 특별한 훈련 가운데에서도, 성령을 통한 비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령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비움의 영성은 얼마든지 피어 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비울 수 있을까? 성경에서 제시하는 방법을 따라가면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갈2장20절 말씀이다. 이 말씀을 매일 아침마다 4단계로 나누어서 실천해 볼 것을 권면하고 싶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성실하게 실천해 보자. 분명 성령의 일하심으로 ‘비움’의 평강이 우리 안에 자유롭게 일어남을 기쁨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1 단계>
묵상 말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선포 : 나의 옛 존재가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임을 분명히 믿고 선포한다.
<2 단계>
묵상 말씀 :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이지만 육체 가운데 산다”
선포 : 육체를 가지고 살기에 실수와 실패와 넘어짐과 범죄 가운데 노출 될 수 있는 나약한 존재 임을 철저히 인정하라.
<3 단계>
묵상 말씀 :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선포 : 나약한 존재이지만 내 안에 생명이신 예수님이 분명히 살아계심을 믿고 확신하라. 나는 옛 존재를 벗어버린 새로운 피조물임을 확신하며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확신하라.
<4 단계>
묵상 말씀 :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선포 :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기에, 그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그 분이 나를 살아주시도록 자신을 비운다.
비운다는 것은 예수님께 나의 모든 주도권을 넘겨드린다는 말이다. 주도권을 넘겨드렸다는 말은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생각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행동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살아가시도록 나를 비우는 것이다.
이러한 비우는 영성은 어떤 기간을 정해놓고,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훈련을 받는 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매일 매일 계속 실천할 때 서서히 이루시는 성령의 일 하심이다.
예수님 안에 항상 머물러 있는 사람들, 그들은 성령을 통하여 비우는 영성을 소유할 것이다.
비우는 것은 하늘의 것을 사모하고, 땅에 것을 죽이는 것이다. 비우는 것은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치 않는 것을 버리는 지혜이다. 그래서 비움의 영성은 우리에게 하늘의 능력을 가져다 준다.
비우는 영성을 소유해 봄이 어떨까?
예수님은 비우는 영성만 가진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채우는 영성’을 가진 분이시다. 예수님은 그냥 무조건 비우신 분이 아니다. ‘채우시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비우셨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채우는 영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올네이션스교회 양종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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