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대 중년 남성들에게‘친구 찾기’붐을 일으켰던‘친구’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70년대 고등학교 학창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켜 주었는데
조직폭력배가 등장하여 칼부림을 하는 폭력성과 선정성이 문제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많은 해악을 가져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중년 남성들에게는
그 동안 잊고 지냈던 학창시절의 추억과 친구들과의 우정을 확인해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왜 이 영화에 그토록 많은 중년 남성들이 매료가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참 친구”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에 그저 함께 있으면 좋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돌며 놀던 친구들처럼,
아무 조건 없이 그저 만나면 좋은 진정한 친구가 없고
오직 경쟁 상대만 있을 뿐이고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적들만 가득한 것입니다.
참 친구를 잃어버린 시대의 반증이 친구에 열광한 첫 번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년 남성들의 제자리 찾기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힘들게 살면서 자신의 위치가 불확실한 사람들이
바로 3,40대 중년들인데, 바로 이들에게 학창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위축되지 않는 영화의 장면들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고 싶어 하는 중년남성들에게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참으로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는 인간,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참된 친구입니다.
인간의 행복 중 하나는 좋은 친구를 만나는데 있습니다.

에센바흐라는 사람은
“한 사람의 진실한 벗은 천명의 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 힘 이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곁에 손으로 셀 수 있는 보화와 같은 친구가 얼마나 있습니까?
조건 없이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친구, 마음을 나누고 서로 위로해 주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얼마나 있습니까?

왜! 외로운 인생이 계속될까?

흔히 물이 너무 깨끗하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그 깨끗함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깃듭니다.
사람들이 나와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공격성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공격하는 듯한 말투와 태도를 보이면
그 누구라도 정나미가 떨어져 도망갑니다.

또 하나는 정죄 성입니다.
자신은 올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마구 지적하며
훈계하며 충고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이미 틀린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곁에는 친구가 없습니다.


수잔 폴리스 슈츠가 지은‘친구란’글을 소개합니다.
친구는 네가 하는 모든 일,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사람
친구는 즐거울 때, 괴로울 때 찾아오는 사람
친구는 항상 너를 격려해주면서 너와 경쟁하지 않는 사람
친구는 너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위로해주는 사람
친구는 그가 없이는 자기 자신이 완전할 수 없는 또 다른 너 자신

그러나 서글픈 현실은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소중한 친구가 없을까? 왜 나에겐 사람이 따르지 않을까?
왜 나에겐 가까운 사이가 없을까? 왜 그렇습니까?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습니다.
사랑도 없고 배려도 없고 인내와 용서 할 줄도 모르고
오직 독선과 자기 잘난 자아와 욕심 그리고 남을 정죄하는 고집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쉼을 찾아 다가오는 친구가 편안히 쉴 곳이 없습니다.
헛된 바람들로 가득 차 편할 곳이 없습니다. 마치 슬픈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습니다.
그래서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찔리고 찌르고 서로 비명 지르고 울어 댑니다.
모처럼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친구들마저도 마구 가시에 찔려 달아나곤 합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못 견딥니다. 어린애도 부모님도 다 날아갑니다. 외롭습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고 바람만 불어댑니다. 이런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 아닐까요?

예수 없는 인생은 모두 가시나무새 같은 인생입니다
이 땅에 진정한 친구가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가시를 가진 가시나무들입니다.
바람만 불면 모두 찔릴 수밖에 없는 부족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가 되시고
외로울 때 좋은 친구가 되시는 그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우리의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아름다운 산밑의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 별입니다.
그는 내 몸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간 나와 항상 같이 하여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날 지키시는 영원한 친구입니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참된 친구를 가진다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친구 없이는 이 세상의 행복도 얻을 수 없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언제고 어디서나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마음을 나누고 꿈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고 함께 울고 웃고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간혹 문득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쏟아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언제든 상관없이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만나서
마음껏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세르반테스(1547~1616, 스페인의 문호)라는 사람은
친구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의 일생을 반밖에 못 산 셈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어거스틴은 “인간의 비극은 종종 사랑해야 하는 대상을 사용하고,
사용해야 하는 대상을 즐거워하는데 있다”고 충고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친구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대상으로 삼고,
사용해야 할 물질이나 권세나 명예를 사랑하는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 비극이 오는 것입니다.

참된 우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기를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그의 친구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요, 구원의 신비입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지면서,
그 짐의 무게를 행복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플 때는 위로를, 두려움에 떨 때는 용기를, 무지로 헤맬 때는 지혜를,
앞이 캄캄할 때는 길잡이가 되어 주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민거리들, 그것들을 우리가 잘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 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바로 하늘 친구인 예수그리스도 입니다.
우리의 죄 짐 맡은 예수를 친구 삼아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든든한 것입니다.
가장 값진 것입니다.

팝송 가사 중에 “You mean everything to me.”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친구 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You mean everything to me.”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 자체로, 한없는 든든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 인해 최상의 기쁨을 누리는 친밀한 관계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그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죄 값을 치르심으로 다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길을 열어 줬습니다.
하나님과의 우정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희생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과 사랑, 진리 그리고 목적을 깊게 알고
신뢰하는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이는 이웃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친구가 분명히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마치 우리들의 친구처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빠짐없이 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친구처럼 우리들의 속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다 이해하여 주는
우리 주님과 그렇게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마음껏 하지 못할 때 신앙생활의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우리들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낄 때,
주님이 친구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신앙적인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친구 삼아 인생을 사는 사람, 그는 이제 이웃들에게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삼고, 이웃에게 참 친구가 되어주는 인생,
그것이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할렐루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 슬픈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 서로 부대끼며 울어 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로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