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바울세계선교회가 주최한 ‘교회의 본질을 찾아서’ 공개토론회에서 한영숙 목사는 고(故) 해봉 김종환 목사가 1982년 2월 『한국인』에 기고한 글 「민족 자각에서 본 한국 교회사의 이해」의 일부를 소개한 바 있다. 당시 한 목사는 한국교회의 역사를 서구 선교사의 내한을 출발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조선 지식인들이 스스로 서학과 기독교 관련 문헌을 연구하고 신앙을 받아들였던 과정까지 거슬러 살펴야 한다는 김 목사의 시각을 전했다. 김 목사가 한국교회사를 바라본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한영숙 목사는 세미나 이후 이 글의 전문을 본지에 보내왔다. 이에 본지는 김 목사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시각과 당시의 문제의식을 보다 온전히 전하기 위해 원문의 문체와 표현을 유지한 채 전문을 싣는다.
고 김종환 목사는 한영숙 목사의 남편이자 평생 사역 동역자로, 1980년 도미 후 KPCA 뉴욕노회에서 안수받고 1982년 고려교회(현 메트로폴리탄연합감리교회)를 공동 창립했으며, 바울세계선교회를 설립하고 『신앙과 교회』를 발행하며 이민교회 신학과 선교 사역에 힘썼다. 한영숙 목사는 김 목사가 작고한 이후 그가 남긴 설교와 글, 기도문, 시와 그림 등 신학적·문학적 유산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글은 1982년 2월 『한국인』에 게재된 원문으로, 오늘날의 어법이나 맞춤법과 다른 표현이 일부 포함돼 있다. 다음은 글 전문.
민족 자각에서 본 한국교회사의 이해-김종환 목사(1982. 2월 “한국인”)
오늘날처럼 우리 민족이 역사를 재해석하고 역사를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하여 애써 온 적은 없다. 이를 위하여 역사의식이 문제가 되고 강조된 적도 없었다. 오랜 세기를 통해 지켜온 선열들의 문화적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실정은 여러 가지 이유와 설명으로 변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통을 이어가고 문화적 유산을 지켜 가겠다는 민족의 자각이 약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현대의 급격히 발전한 과학문명의 도전과 그들 나름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다양한 세계문화에 접하여 그들을 조명할 여유도 없이 무조건 수용하여야만 할 다급한 상황을 피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외래의 어떤 문명과 문화를 조명하여 취사선택할 우리 자신의 정립된 위치가 빈약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위치가 없으므로 인하여 많은 사람은 그들이 접하는 외래의 이질 문명과 문화 속에 파묻혀 하루라도 빨리 동화되려고 시도하는 실정을 흔히 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질 문명과 문화를 접해야만 하는 한국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공통적인 현상이며, 일상생활의 어떠한 부분에 관계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이것은 정치, 경제, 사회, 윤리, 언어, 종교, 예술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문화 전반에 걸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모두 외면하면서까지 그들 속에 동화하려 애쓰고 노력하더라도 우리가 받는 결과는 늘 감당할 수 없는 거리감과 거부 현상에 이르는 대접뿐이었다.
오늘날 동화되려고 애쓰는 이들은 서구 과학 문명에 적응하여 현대문명의 시민이 되기에 어색하지 않은 배경을 구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들이 생각하는 그 배경이 근래에 흔히 들을 수 있는 ⸢한미수교 100주년⸥, ⸢카도릭 조선교구설정 150주년⸥ 혹은 ⸢개신교 선교 100주년⸥ 등과 같은 기념 구호들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에게는 우리도 이제는 현대문명을 접촉한 것이 세기를 넘어섰다고 하는 자신감이 현대의 타민족이 형성한 문명 속으로 동화를 시도하게 되었다고 말하여도 잘못된 표현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benefit)을 갖추고도 현대문명의 시민이 되어서 안정을 누리는 고위 인사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탈락하는 고배를 마신다. 이들은 회의와 좌절 속에 머무른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하여서 자신의 주위와 배경을 되돌아보고는 그들의 발판이 될만한 근거를 다시 찾아내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카도릭 교회 150주년⸥, ⸢개신교 선교 100주년⸥과 같은 화려한 슬로건을 생각하고 이를 경축하며, 다양한 행사를 시도함으로써 스스로 안위를 받으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에게는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론적인 입장에서나, 역사를 조명하는 입장에서도 ⸢카도릭 교회 150주년⸥의 기념행사 같은 일들은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장품으로나 그들에게 안위가 되는 요행한 경사로 추켜 올리는 과시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고, 어딘가 묵과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자각하여야 하겠다.
카도릭 교회가 150년 역사를 기념, 추모하는 것은 1831년 9월 조선 지역을 교황 대리 교구로 설정하고 초대 교황 대리로 바르델레미 브르겔(BARTHELEMY BRUGUIERE 1792-1835, 10)주교를 임명한 해를 조선에서 정식 교회가 발족한 것으로 보는 데서 왔다고 보겠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는 기독교라는 복음이 서양의 어떤 선교사에 의해서, 또는 외방 전교 신부의 포교와 관계되는 작업에서 기독교회 혹은 기독교의 사상과 신앙이 시작되고 발전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우리 민족 스스로가 역사 속에서 국가와 사회를 구원하고, 나아가서는 인간 자신의 구원을 도모하려고 하는 작업으로서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시작되어서 명맥이 유지되었음을 자각하여야 한다.
외국의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1794년 중국의 주문모(周文謨야고보-1801.5) 신부가 입국했다. 그러나 주문모가 조선에 비밀로 초청 입국할 당시, 이미 조선의 기독교도들은 4000명으로 『독립자치교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학자들과 뜻을 같이하는 민중들이 『독립자치교회』를 운영하면서 고난의 역경을 견디고 목숨을 버려 가면서도 기독교를 얼마나 흠모하고 사랑했는가를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카도릭교회 외방 전교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기 전 1776년으로부터 1794년 까지의 『조선독립자치교회』가 지닌 의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순교까지의 1794년-1801년의 『조선독립자치교회』 내부의 갈등과 형태를 살필 필요가 있다. (글 말미의 범례 참고).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기 9년 전인 1785년(정조 9년)에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에 김범우(金範禹토마스⟵조선독립자치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름)는 지금의 명동(당시 明禮坊진고개)에 있던 자택에다 교회를 열고 예배를 운영하다가 순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서 교인 1000여 명에게 목회하던 이승훈(李承薰), 이벽(李檗), 정약용(丁若鏞) 형제, 권일신(權日身) 등의 석학들은 교회의 행사나 의식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조정의 권력층과 마찰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견해를 취했다. 그리고 스스로 조선자치교구를 결성하여서 10명의 창설 학자들을 신부로 취임시켰다.
그러나 북경의 교시를 철저히 따르던 강경파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용(야고보)은 제사 및 위폐 문제에 대하여 관과에 온건한 자세를 취하자고 하는 권고를 불사하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다가 순교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1791년(정조15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이다. 당시의 조선독립자치교회 평신도들 중에서 (당시 그들은 1명의 주교를 두었으며, 주교에는 이벽, 권철신, 이승훈 등이 교대로 집무한 듯하며 이단원, 유황검, 최창현 등도 신부가 되었다) 북경에 왕래하면서 조선의 제사제도를 철폐하라고 하는 교시를 받은 중진급인 윤유일(尹有一)을 위시한 최인길(崔仁吉), 지장홍(池潢), 유지충, 권상용과 같은 신자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풍습과 의례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서 조정은 물론 서민층과 유생들에게 큰 물의를 일으켰으며, 처절한 참사 사건을 불러 왔다. 이 사건 이후, 조선의 카도릭 교회는 사회문제로 되어서 근 100명에 달하는 신도가 충청도 해미 내포에서 참사를 당하게 되었다. 1801년 2월에는 급기야 정치문제로 화하게 되므로, 이승훈, 정약전, 최창현, 궐철신, 이가환, 등의 『조선독립자치교회』 창설 석학들은 전원 순교를 당하고 평신도 약 300명이 순교를 당하였다. 이것이 신유년의 박해 사건이다.
이 신유박해(辛酉迫害)는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온 봉당의 시련의 결과이며, 동시에 중국의 북경교구로부터 지시를 받은 제사 문제에 대한 교시를 강경하게 수행하려고 하던 중진들로 구성된 일부 교인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였다. 더욱이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진사 윤지충과 권상용이 참사당한 이후, 10년간의 쌓인 원한의 보복으로 인한 피해는 우리 민족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이때 당시의 카도릭 지도자들은 모두 획일적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정약용만은 종신 귀양을 가게 됐음). 이외에도 그 여파는 1815년 중부 및 영남 지방과 1827년 호남지방에서 화전민이 되어서 공동체를 이루고 피신하여서 살던 신자들을 토벌하며 옥사시키는 비참한 시련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조선독립자치교회의 30년 남짓한 역사 속에서 430명에 이르는 순교자와 가혹한 옥고를 치러야 했던 만 명에 가까운 평신도들과 이들에게 종속된 어린아이들의 비극을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조명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우리 민족사의 전통에서 보면, 지식층이나 조정의 집권층이 각박하고 인색한 대접으로 인민을 대하는 치정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종교적인 문제, 자연과학의 문제, 철학의 문제들이 학문으로 연구되는 작업을 흠모하고 정중히 대접하는 풍토가 우리 민족에서는 농민으로부터 집권층에 이르기까지 널리 형성되어 있었음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종교 문제가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게 되고 민족 고유의 미풍을 혼란 시킬 때 예기치 않은 참극이 일어났던 현상은 우리가 민족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일찍이 선조 시대의 석학 허균(許筠1569-1618)은 당대의 유생과 관백 앞에서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천차고성인일등(天差高聖人一等)이니 하늘의 뜻을 따르고 인간을 따르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선언은 당시의 엄격한 유교 문화권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성인인 임금이나 공자 같은 분은 하늘에 이르는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계급사회의 일원 중에 속하는 하나로 봄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파격적인 선언도 정치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진 것이 아니고, 학문과 종교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조정의 관백이나 선비들의 관심의 대상 이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조 시대의 석학 이벽, 권철신, 정약용, 이승훈 등의 선비가 공동으로 서학(西學)을 연구하는 집회는 물론, 조선독립자치교회를 조직 운영하던 시대에도 교회의 이질적인 의식으로 인해서 민족 고유의 의례적인 제사 제도에 도전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정치적인 물의가 없었고 참사의 비극도 없었다. 민족사의 기록에 종교적 화근을 불러일으킨 비극을 초래하게 한 결정적인 원인은 『조선독립자치교회』의 운영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의 강경파인 중진 식자층들이었다. 이들은 북경의 교회로부터 제사철폐 운동의 교시를 받아들여서 제사철폐를 강경하게 추진했다. 이러한 사대주의 종교사상을 가진 중진 식자층들은 『조선자치교구』를 독립적으로 수립한 것과 자치적으로 주교, 신부를 임명한 것을 범죄 행위라고 가르치는 북경교회의 교시를 국내로 가져와서 당시의 『조선독립자치교회』가 흔들리게 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나아가서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초빙하여 결국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를 몰고 와서 300명의 평신도와 민족의 종교지도자들을 전원 순교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참극을 예상했던 정조대왕은 1791년(정조 15년)의 윤지충과 권상용의 사형집행이 조정의 가혹한 판례가 될 것을 염려하여서 참수형(사형)을 보류하라는 긴급령을 내린 일이 있다.
이와같이 우리 민족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종교와 학문 앞에 왕을 위시한 집권층에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관대한 지성의 폭을 지닌 민족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상, 우리의 민족사 속의 교회사는 제대로 조명될 수가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한편 우리의 민족사에서 위대한 『독립자치교회』를 운영하던 18세기 말의 민족 문화의 배후에는 16세기 조선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17세기 초의 서학자들의 전통적인 맥이 흐르고 있음을 간파하여야만 한다.
선조 시대에 허균(許筠)을 포함한 당대의 학자들 간에 이미 기독교에 관한 연구와 평론이 많았다. 숙종 12년(1686년)의 실록에 의할 것 같으면 서학을 연구하는 선비들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영조 34년(1758년) 천주교가 크게 보급되어서 서해 및 관동지방에서 제사를 폐지하는 실례가 많으므로 각도의 관찰사에게 이를 금하도록 령을 내린 실록이 있다. 영조 46년(1770년) 이익(李瀷)의 제자 홍유한(洪儒漢)은 천주학의 경서를 다독한 끝에 신앙생활의 수련을 위하여 소백산에 들어가서 12년간이나 수도 생활을 한 실례가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조 52년(1776년)에는 경기도 광주군 주어리 천진암(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하품리)에서 권일신, 권철신, 최창현, 이가환, 이기양,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이용억, 김원성, (이벽과 이승훈은 1, 2년 후에 참여함) 등, 10명은 1784년 2월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때까지 8년간에 걸쳐서 비교종교와 천주학의 경전을 연구했다. 그 후 점진적으로 이들은 기독교의 신앙을 가지게 되어서 7일에 한 번씩 금식과 기도집회를 가졌다. 우리는 이러한 선조들의 슬기로운 순수한 민족적인 업적을 되돌아볼 때, 우리 민족이 오늘의 세계문화에 공헌할 수 있고 현대 기독교의 향방을 선도할 수 있는 독창력을 가지고 있음을 선조들의 주체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지도자로 자처하는 한국 카도릭 교회 식자층은 로마 교황청의 정치 및 행정적인 안배에서 오는 명분에만 치중하고 우리 조상의 슬기로운 사상을 뒤로 외면하는 사대주의적인 오류를 다시 벌리고 있음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사의 전통에서 볼 때 이러한 오류는 민족 문화의 고립을 자처할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민족 문화의 가치를 왜곡시키고 역사 정신의 가치를 사대주의적인 다른 곳에 두게 만드는 병폐를 끼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외면하는 식자층의 처사는 역사적인 전승을 단절시키고, 그 대가로 사대주의적인 명분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자세는 종적인 면에서는 민족의 전통을 단절시키고 횡적인 면에서는 개신교와 관계를 단절시킴으로 기독교의 모든 분야의 고립과 이질적인 방향만을 조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단절의 현상은 민족의 역사적인 대의 앞에서 통일성을 찾아볼 수 없는, 일시적이고 단면적인 작업에서 늘 새로 시작되므로, 모든 것이 항상 다시 시도되는 난관과 비역사적인 현상을 초래하여서 우리의 문화를 극도로 빈곤한 상태로 몰고 가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현상의 결과로, 오늘의 한국 카도릭 교회는, 개신교가 『선교100주년기념축제』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는 바와 같은, 역사 앞에 궁색한 정신 자세를 취하고 있는 현상의 것을 포용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아마도 개신교의 『선교 100주년』의 근거는 한결같이 한미우호통상조약(韓美友好通商條約)이나 각 교파의 외국선교사들이 입국한 연도에다가 그 출발점을 연결짓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정신 자세 역시 『조선독립자치교회』의 문화권의 전통에 서 있던 서상륜, 이응찬, 백홍준, 이수정, 등의, 선교사 이전의 한글 성서 번역가들의 업적조차 외면하는 사대주의적인 경향에서 오는 기현상의 일환인 것이다. 오늘의 카도릭 교회는 민족사의 전통에 뿌리를 내릴 기반이 없어서 개신교의 궁핍한 정신적 오류를 개선 시켜 줄 민족 문화사의 폭을 가지지 못했음을 아쉬워할 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민족 문화를 몰이해 하는 오늘의 카도릭 교회나 개신교회는 양분된 종파적 문제와 교의화된 편협성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같은 민족의 문화 속에서 자란 이 땅의 인민으로서, 민족의 대의 앞에서 기독교의 사상을 이질적으로 양분화해야 할 까닭이 없다. 오늘의 종교인들에게는 자신이 속한 어떤 종파의 입장에서 민족이라는 객체에 참여하고 있거나, 거기에 관찰하는 자세가 만연되어 있다. 물론 오랜 역사를 지닌 같은 문화의 전통 속에서 공동체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종교 또는 종파가 지닌 기풍, 내지 상징적인 것을 구체화하여서, 어떤 개성적인 형태이든지, 그것을 고수하려는 입장은 본능적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점이 있다. 이러한 형태를 고수하려는 오늘 우리의 속성은 기독교라고 하는 세계적인 종교, 그 포용성의 광범한 폭 앞에서 민족이라고 하는 문제는 본능적인 차원의 것으로 보고서 인색하게 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민족이란 문제는 생물학적 내지는 인류학적인 입장에서 고찰될 수도 있으며, 가족, 내지 씨족, 나아가서는 정치,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동일목적을 가진 공동체 또는 국가주의의 문제로 볼 수 있는 성향이 그 개념적인 요소 자체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우선 생존하고 존립하기 위한 것이며, 타민족에 대해 우월함을 유지하기 위한 경쟁의 일환으로 배타적이고 본능적인 것으로서 정신면에서는 협소하기 그지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광범위한 폭을 가진 세계적인 기독교 사상의 형성과 그 배경의 기반이 되는 전통적인 힘은 그 민족만이 지닌 독자적인 문화의 힘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다시금 인식하여야만 한다. 독일에서의 민족 문화의 기반이 없이는 루터(LUTHER)의 사상과 오늘의 개신교 문화의 폭은 불가능하며, 라틴 민족의 문화권 없이는 성 어거스틴(ST. AUGUSTIN)의 사상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헬라(GREECE)의 문화의 배경 없이는 기독교가 오늘날처럼 성장할 수 없으며, 히브리(HEBREW) 민족의 문화를 외면하고는 히브리 인의 경전의 창작과 전개된 사상의 형성은 절대 불가능하다. 이와같이 세계 문화사 속에서 세계사를 이끈 기독교의 역사와 그 폭은 오늘에 이르러서 일반 언어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차원에서 모든 학문은 물론, 인류의 양심과 인도적인 자세의 어미가 되고 후견이 되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카도릭 교회에서 기념하는 『조선교구설정 150주년 행사』는 로마 교황청에게는 중요하고 기념해야만 할 문제일 수 있으며, 개신교 선교 100주년은 미국을 비롯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들의 종단에서는 중요한 기념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교구설정이라는 대의명분이나, 선교사의 내한이라는 외국과의 연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자각과 민족 문화에 뿌리를 내린 기독교 신앙과 사상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우리가 간파할 때에만, 우리 민족사의 미래가 열릴 것으로 확신한다.
한국교회의 본래 시작은 신, 구교를 막론하고 서양의 선교 기구의 작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민족의 사유(思惟)의 표현을 배려한 동기에 연루한 민족정신의 집체인 집현전의 작업으로부터 시작하여서, 송, 명대의 대국으로부터 이 땅에 들어온 학문과는 문화적 차원을 달리하는 우리 선조의 성리학의 실존적 자각의 기반 위에서 존립해 온 민족 문화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전통에 서서 민족 공동체의 삶을 일으키려고 시도함에 따라서 서학을 도입 연구하게 됨은 자연적인 과정으로서 선조들은 서양의 종교와 과학을 연구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의 전제는 어디까지나 국가와 사회를 구원하려는 시도였음을 많은 문헌에서 보게 된다. 선조들이 기독교의 경전의 부분적인 것이나, 교의문, 기도문을 수집하고 연구함에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의 지식이 학술적인 데에만 머무르지 않고, 점차로 발전하여 신앙의 체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신앙은 자연적으로 식자층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전해졌다. 이러한 종교사상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기존의 어떤 전통과 부딪히지 않고 자연스러움 속에 참고 견디는 철학이 내재하여 있다. 마치 큰 산과 바다가 일시적인 소란을 묵과하며 견디는 것과 같이 말이다. 종교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대주의자들이나, 근시안적인 집권자들이 다소 존재하여 있다고 하더라도 고난받은 민중과 민족의 석학들의 열매는 민족의 공동체와 우리 자신의 구원에 이르는 역사에 참여하여서 민족 문화의 전통 속에서 주류를 이루는 맥이 되고 있음을 자각하여야만 한다.
한민족이 그 특유의, 유사한 기독교적 사상을 형성하던 시대 (필자는 세종의 한글 창제 시대를 의미한다)를 제외하더라도, 1600년 초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00년 동안의 근대 기독교사상 운동사를 조명할 때, 민족의 전통적인 정신문화의 기반이 없이는 근 1천만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은 교파주의의 혼란에 휩쓸리고, 역사에 참여할 모든 기독교 단체를 분열시킨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교파주의의 혼란과 분열은 외부의 선교 책략에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타민족이 형성한 오늘의 문명 속에서 그들의 관용이 없이는 현대문명의 주변에서 나마도 설 자리가 없음을 밝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 사상을 한국의 전통문화 속에서 보아야 하고, 교회의 역사는 한국 민족의 민족사에서 고찰하여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만, 한국 기독교가 세계 문화사의 대열에서 큰 몫을 이루는 문이 열린다고 확신한다. 우리 민족에게만 보여진 자연과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민족 공동체를 구원하려는 석학들의 학문적 작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민족의 것으로 내재 될 때라야만, 우리는 성서의 정신과 만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사의 정신을 성서 자체로 생각할 수 없지만, 민족사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그 정신이 성서 안에 현존하고 있음을 자각할 때에만, 민족 문화를 고수한 이 땅 인민의 노고와 민족을 구원하려고 애쓴 민중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범례
교회의 성격 / 기간 / 연도별 교인 수 / 교회 중심지 / 기타
학술과 사경교회 / 1776~1784(8년) / 10명~100명 / 경기도 광주군 주어사 / 10명의 학자들이 공동생활
조선독립 자치교회 / 1784~1794(10년) / 100명~4,000명 / 서울 명예동 진고개 / 주미명과 신부 9명
갈등하는 자치교회 / 1794~1801(7년) / 4,000명~10,000명 / 경기도, 전라도, 서울 / 주문모 신부 재류중
은둔의 평신도교회 / 1801~1836(36년) / 확실한 기록 없음 / 경기, 충청, 전라, 경상 / 산간지역 및 어촌에 분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