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호흡, 그리고 예비하신 수의
마지막 20일, 어머님의 생명이 서서히 멈춰가는 시간 동안 아들과 며느리, 증손자까지 모두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둘째 형님과 넷째 동생이 어머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니카라과 선교지에 있는 셋째 아들인 나는 가족들이 어머님을 뵈러 갈 때마다 화상 통화로 얼굴을 마주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통화할 때마다 “언제 오냐? 빨리 와!” 하시던 그 애타는 부름은 경각의 시간에도 잊히지 않는다.
어머님의 호흡이 잦아들 무렵, 형제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며 수의에 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님 집 장롱 위에 황금색 보자기에 싸인 수의와 흰색 꽃신이 있다는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려주었다. 홀로 묵묵히, 그러나 단정하게 준비해 놓으신 당신의 수의와 꽃신. 생각할수록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마지막 어머님 얼굴을 뵈러 가기 위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서둘러 니카라과를 출발해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결국 어머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다. 2026년 8월 13일 새벽 4시 10분, 9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시고 천국에 입성하셨다. 어머님의 숨이 멈춰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두 아들이 곁에서 든든한 의지가 되어드렸고, 셋째 아들이 타국에서 녹음해 보낸 기도 소리를 들으시며 평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나와 아내가 8월 14일 금요일 밤 8시 30분에 서울 중앙대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고, 기다리던 가족 및 지인들과 함께 목사이자 선교사인 내가 직접 어머님의 입관 예배를 인도했다. 어머님 곁에 둘러선 가족들은 평안한 마지막 얼굴을 뵈며 마음의 소리를 전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7년 전 아버님의 천국 환송 때 조카의 손으로 아버님을 모셨는데, 이번에는 장례지도사가 된 손자의 손으로 어머님의 마지막을 정성스레 모시게 되었다. 사람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세심한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장례지도사인 손자는 평소 할머니가 꽃을 무척 좋아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관을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해 드렸다.
64년 정든 집과 눈물로 남기신 쌈짓돈
어머님은 서른셋 젊은 나이에 지금의 신대방동 집을 직접 지으셨다. CIC 방첩대에 근무하시던 아버님이 잦은 전출로 거처를 자주 옮기셔야 했기에, 다섯 아들을 안정적으로 키우고자 당신의 힘으로 서울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신 것이다. 그 후 세 번이나 수리와 리모델링을 거치며 당신의 손때가 오롯이 묻은 그 집에서 64년을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자고 말씀드려도 어떻게 이 집을 떠나 살 수 있겠냐며 아끼시던 집이었다. “며칠 아프다가 잠자듯 평안히 가고 싶다”시던 평생의 소원 그대로, 가장 사랑하시던 곳에서 안식에 들어가셨다.
단골로 다니시던 집 근처 은행에서는 어머님을 ‘부자 할머니’라 불렀다고 한다. 수년 전 선교지에서 잠시 귀국했을 때, 나는 어머님을 설득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모아두신 재정 상태를 여쭈어본 적이 있다. 통장에 찍힌 액수와 조용히 모아두신 흔적을 확인하고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먹는 것, 입는 것 극도로 아껴가며 평생 안 쓰고 모으신 돈이었다. 자식들에게 결코 손 벌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식들 생일이면 쌈짓돈을 챙겨주시던 어머님의 피땀 어린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전했을 때,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놀라며 깊이 감사했다. 우리는 어머님이 평생 아끼고 모아두신 그 돈으로 가장 명예롭고 아름답게 장례를 치렀다. 생전에 준비해 두신 황금색 수의와 하얀 꽃신을 신으시고, 어머님은 영광스럽게 천국에 들어가셨다.
장례를 마치고 텅 빈 집에 돌아와 어머님의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다. 낡은 사진과 옷가지들, 작은 수첩과 달력 곳곳에는 월세 내역과 누구를 몇 시에 만났는지 빼곡히 적혀 있다. 그 철저하고 꼼꼼하셨던 삶의 흔적들을 조심스레 카메라에 담는다. 정작 당신을 위해 한 번도 꺼내보지 않고 써보지 못한 새 물건들이 집안 곳곳에서 눈에 띈다. 넷째 아들이 사드린 유행하는 새 신발은 포장 상자째 그대로 남아 있고, 냉장고 안에는 평소 소식하시며 부드러운 음식을 드시던 어머님을 위해 둘째 아들이 채워둔 복숭아 통조림과 멜론 아이스크림이 고스란히 놓여 있다.
당장이라도 방문을 열고 “그래, 왔니? 밥은 먹었어?” 하고 나오실 것만 같아, 어머님의 죽음은 믿기지 않고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27년 전, 69세로 천국 가신 아버님의 죽음 때도 이성으로는 인식하면서도 감성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치열했던 삶의 궤적, 눈부신 천국 예복
어머님의 삶의 철학은 강인하고 굳건했다. 빚지지 않고 산다, 남에게 손가락질받지 않는다, 내 손으로 일해서 번다, 아껴 쓰고 모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잘 믿는 기독교 가정으로 산다. 어머님은 70세까지 보험회사에 매일 출근하셨다. 15년 동안 몸담았던 회사 벽면에는 늘 어머님의 실적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제일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매사에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셨다. 낮에는 가만히 계시는 법이 없이 늘 부지런히 움직이셨고, 92세까지도 노인복지회관 두 곳을 일주일 내내 다니시며 활동하셨다.
그토록 쉬지 않고 움직이신 덕분인지, 어머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특별한 지병 하나 없이 건강을 유지하셨다. 93세에 초기 치매 증상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일찍 발견하여 약을 복용하신 덕에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아 평소 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참으로 감사하고 놀라운 것은 어머님의 그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불과 수년 전, 젊은 사람들도 견디기 힘들다던 코로나19를 거뜬히 이겨내셨고, 심지어 집 계단에서 넘어져 고관절을 크게 다치셨을 때도 훌훌 털고 일어서셨던 모습을 보며, 우리 가족은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오랫동안 섬기신 교회에서는 ‘전도왕’ 상을 받으셨을 만큼 복음 전파에 열심이셨다. 성경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다비다는 속옷과 겉옷을 지어 이웃을 구제하며 선행을 베풀어 많은 이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우리 어머님의 삶이 바로 그 현대판 다비다와 같았다. 동네를 오가시며 빵과 과자, 아이스크림을 사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셨던 따뜻한 분이셨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베푸는 일에는 아낌이 없으셨다.
요즘 나는 텅 빈 집을 오가며 어머님이 매일 걸으셨던 신대방동 골목길을 나도 걷는다. 생전에 자주 들르시던 상점들을 찾아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대신 인사를 올리고 있다. 아버님의 천국 환송 때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못지않게 어떻게 생을 마감할 것인가가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이번 어머님의 죽음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새기게 되었다. 더 멋지고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며 후손들에게 크리스천의 훌륭한 모범이 되어주신 어머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어머님의 황금색 수의와 하얀 꽃신.
아, 그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차가운 옷이 아니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불의 기름을 넉넉히 준비했듯, 영원한 본향에 들어가기 위해 97년의 세월 동안 땀과 기도, 그리고 정결한 삶으로 손수 지어 올린 가장 눈부신 천국 예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