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아신대학교)
(Photo : ) 신성욱 교수(아신대학교)

[1] 주일 새벽, 2시 반에 잠에서 깼다. 어제 아주 오랜만에 전주에 내려왔다. 음식의 고장 전주에서 저녁 식사를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삼겹살을 선택했다. 삼가야 할 음식을 먹다 보니 속쓰림을 겪게 된다. 곧바로 후회 할 일을 참지 못하니 아직도 절제가 부족함을 절감한다. 보통 5시쯤 깨는데 왜 이리 일찍 일어나게 된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낯선 호텔에서 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사역 때문에 부담이 컸던 것 같다.

[2] 아침 6시 40분부터 한 교회에서 4차례 설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5부까지 설교해도 부담이 없었는데, 이젠 3부만 넘어가면 숨이 찬다. 나이 듦이 여실히 느껴진다.
아무리 설교가 위대한 특권이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권능의 사역이라 해도, 전하는 자에게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중노동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배나 존경하라는 것이리라.

[3]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역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소중한 말씀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기에 설교자의 삶은 남달라야 한다.
'메시지'(Message)가 아무리 성스럽고 신적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전하는 '메신저'(Messenger)가 문제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게 된다. 따라서 메신저로 나선 설교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고결하고 정결한 인격자로 살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구별되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이다.

[4] 이 땅에 그런 훌륭하고 귀감이 되는 사역자들이 적지 않음을 본다. 비록 큰 교회를 맡지 않고 유명세를 타지 않아도 그런 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이 새벽에 말씀을 맡아 수고할 모든 목회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축복과 도전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이란 분의 명언 한마디와 그녀의 삶을 들려줄까 한다.

[5] 그가 남긴 말 중에 가장 소중하고 의미심장한 말이다. “When I consider the cross of Christ, how can anything that I do be called sacrifice?”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내가 하는 그 어떤 일을 어떻게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조금 더 설교적인 표현으로 옮기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노라면, 내가 주님을 위해 치르는 그 어떤 대가도 어찌 희생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이다.

[6] 핵심은 “내가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셨는가?”이다. 그래서 이 말은 단순히 “헌신하라”는 격려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드린 것을 희생이라고 자랑하는 마음 자체를 십자가 앞에서 무너뜨리는 말이다.
이 말을 남긴 에이미 카마이클은 어떤 사람일까? 1951년에 세상을 떠난 '에이미 카마이클'은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선교사로, 인도에서 무려 56년 동안 사역한 선교사이다.

[7] 그녀는 1867년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났고, 일본에서 잠시 사역한 뒤 1895년 인도로 갔다. 이후 평생 인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사역에서 놀라운 전환점이 찾아온다. 처음부터 어린이 사역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그녀는 당시 사원과 관련된 환경에서 어린 소녀들이 심각한 착취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8] 그 아이들을 직접 데려와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1년 '도나부르 공동체'(Dohnavur Fellowship)를 세웠다. 이 공동체는 위험한 환경에 놓인 어린이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곳으로 발전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에이미 카마이클은 1895년에 인도에 들어간 후 195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고향 아일랜드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도나부르에서 어린이들을 돌보며 56년을 보내다가 1951년 83세로 인도 도나부르에서 생을 마쳤다.

[9] “내가 하는 어떤 일을 어찌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 말을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젠 제대로 알 것이다. 56년간이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남긴 한마디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쉡게 파악할 수 있을 게다.
적어도 그는 이 땅에서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던 사람은 아니란 말이다.
자신의 젊음과 고향, 안정된 삶을 내려놓고 평생을 선교지에서 보낸 사람의 고백이다.

[10] 그래서 이 문장이 더욱 강력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녀에게 십자가는 '희생의 기준'이었다. 에이미 카마이클의 사고방식은 이렇다. “내가 무엇을 포기했는가?”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포기하셨는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우리의 희생은 갑자기 작아진다. 내가 포기한 '시간, 돈, 명예, 편안함, 건강, 성공', 심지어 '내 인생 전부'까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11] '희생'이라는 단어조차 그리스도 앞에선 감히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문장은 사실상 이런 고백으로 해석해야 한다.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드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주보다 존귀하신 주님께서 먼저 모든 것을 주시고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명언은 '십자가 중심의 헌신'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님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가?”

[12] 그런데 복음은 질문을 뒤집는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셨는가?” 이 질문을 십자가 앞에서 던지는 순간,
헌신은 의무가 아니라 '감사'가 되고, 희생은 자랑이 아니라 '특권'이 된다. 그래서 에이미 카마이클의 말은 바울의 고백과도 잘 연결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본 사람은 “내가 이렇게까지 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13] 대신 “주님이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셨는데, 내가 무엇을 아깝다고 하겠습니까?”라고 말하게 된다.
주님의 희생 앞에선 어떤 우리의 땀과 수고와 고난이 있더라도 희생이라 할 수 없다.
오늘도 우리 모두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신실한 사명자들이 다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