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 1943)라 책이 있다. 이 책은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 사랑, 책임, 순수성’에 대한 깊은 우화이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성경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지만, 그 사상과 장면들 가운데는 성경적 메시지와 강하게 연결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그중 가장 성경 본문에 가까운 내용이 하나 있다.
[2] 이것은 성경에 제일 가까울 정도가 아니라 성경 구절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할 정도로 흡사한 내용이다. 바로 이 문장이다. “사람은 오로지 가슴으로만 올바로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게 어느 내용과 같은가 하면 삼상 16:7b절이다. 바로 이 내용 말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3] 이 구절과 생텍쥐페리의 내용이 일치되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삼상 16:7b절을 원문 그대로 번역한다면 얘기는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삼상 16:7b절에는 “외모를”이나 “중심을”과 같은 목적어가 전혀 나오질 않는다. 오히려 “두 눈으로”와 “가슴으로”만 있을 뿐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두 눈으로'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가슴으로' 보느니라.”
[4] 이걸 보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육안(肉眼)으로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심안(心眼)으로 보느니라.”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한 문장과 비교해 보자. “사람은 오로지 가슴으로만 올바로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일맥상통하다고 생각지 않는가? 그렇다. 육안으로 판단하면 본질적인 그 사람의 속사람을 알 수 없지만, 심안으로 보면 그것이 제대로 보인다는 뜻이다.
[5] 그동안 육안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나 스스로 눈에 보이는 대로 남을 판단하고, 나 역시 남으로부터 육안으로 판단 당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사람의 진면목을 보려면 가슴으로, 심안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심안을 가지고 사람을 올바르게 보는 이가 세상에 몇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편견 없이 속사람이라는 본질을 꿰뚫고 계신다.
[6] 그렇다고 단순히 “하나님만이 심안으로 보신다”라는 선언으로 끝나버리면 되겠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사무엘 선지자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무엇으로 보고 있느냐?” 우리는 여전히 육안에 의존한다. '외모, 학력, 직함, 경제력, 말솜씨, 분위기, 이미지' 등, 눈에 보이는 조건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사람의 껍데기만 만질 뿐, 그 영혼의 깊이는 놓치고 만다.
[7]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실 때도 그 기준은 달랐다. 키가 크고 준수한 엘리압이 아니라, 들판에서 묵묵히 양을 치던 소년의 중심을 보셨다. 겉으로는 철부지 막내요, 집안에서 외모도 제일 떨어지고 재능도 최하에 속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속사람을 보시고 큰 사명을 맡기셨다. 이것이 신앙의 시각이다. 육안은 비교하게 하지만, 심안은 이해하게 한다. 육안은 분별 이전에 판단하지만, 심안은 사랑 안에서 깊은 곳을 본다.
[8]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처럼 판단하는 심안을 가질 수 있는가?
심안은 타고나는 감각이 아니라 ‘길러지는 영적 시력’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고,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지 않으면 형성되지 않는다. 자기 안의 편견과 교만이 깨어질 때 비로소 타인을 깊이 볼 수 있다. 결국 심안이란, 다른 사람을 바르게 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빛 아래서 보는 눈’이다.
[9] 더 나아가, 심안으로 본다는 것은 단지 통찰력이 아니라 '사랑의 태도'를 말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깊이 보지 못한다. 관심이 없으면 본질을 보려 하지 않는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가 말했듯이 “길들인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는 것은, 관계 속에서만 진짜 시력이 열린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보시는 이유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실패와 연약함 너머의 가능성까지 보신다.
[10]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어야 한다.
“주님, 사람을 육안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편견과 경험의 잣대로 재지 않게 하소서. 저에게도 심안을 주셔서, 사람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하소서.”
육안으로 보면 실망이 보이지만, 심안으로 보면 하나님의 가능성이 보인다. 육안으로 보면 허물이 보이지만, 심안으로 보면 회복의 씨앗이 보인다.
[11] 결국 신앙이란 보는 방식의 변화다. 세상의 눈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육안에서 심안으로 옮겨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심안의 완전한 소유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과 성령 안에 거할 때, 우리도 조금씩 그 시각을 닮아갈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눈을 감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가슴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만 심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